성령이 행하시는 네 가지 사역 (롬 8:1-17)


생명의 성령이 행하시는 네 가지 사역 (롬 8:1-17): 날짜 : 2016-07-10

서론

로마서 7장의 결론은 불신자, 신자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신자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이어지는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께 나아온 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시는지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시는데,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오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성자 하나님과 다른 위격이시지만, 동일한 신성을 가지시고 동일한 목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7장까지 ‘성령’이라는 단어를 3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8장에는 ‘성령’, ‘영’이라는 단어를 20회나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의 주제는 단연코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로마서 8장의 전반부 1~17절까지 살펴보며 성령의 사역이라는 주제를 네 가지 관점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가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가지를 주십니다.

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1~4절)

성령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 법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는 ‘죄와 사망의 법’이고, 둘째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불신자들은 모두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놓여 있는 존재임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자연 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께 죄가 있고, 죄를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고, 죄의 종이 되어 부끄러운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며, 심판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죄가 있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습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모두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스스로 자기 죄를 속할 수 없고, 스스로 지옥을 벗어날 능력도 없습니다. 로마서 7장의 말씀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자연인으로서의 불신자는 살아갈수록 죄가 늘어나게 되고, 죄에 대한 책임 역시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장수하면 할수록 지옥의 형벌도 커지는 것입니다. 장수하는 만큼 죄를 오랫동안 많이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 불신자들은 정말 큰 곤경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곤경에 처한 불신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복음’(Good News)입니다.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을 지옥에서 건져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실까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육신의 죄를 속하셨습니다. ‘육신의 죄를 정하사’에서 ‘정하셨다’는 것은 ‘속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속죄제’(Sin Offering)로 자신을 드리셨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셔서 스스로 죗값을 갚을 수 없는 죄인들의 죗값을 갚아주시고,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에게 의를 주셔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사 천국에 가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전혀 없습니다. 죄성으로 인해 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을 100% 다 지키심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 의를 전가시켜 주심으로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의를 받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죄인들이 지옥을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지옥을 벗어나려고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죄가 늘어날 뿐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이 부활도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받고 완전한 의인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심판받아야 할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은 새 사람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이고, 언제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다 충족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게 의가 없더라도 예수님이 이루신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고, 이 연합을 이루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 안에 계십니까? 마귀 안에 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 위대한 승리가 선언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자에게만 정죄함이 있고, 그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정죄 받는 일이 없고, 영원토록 정죄 받을 일이 없어집니다. 영원히 정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엄청나게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런 자유와 구원과 영생 주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The Spirit of Life)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무엇일까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연합되어 예수님 안에 있게 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아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법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죄 있는 자가 모두 지옥에 간다는 것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의를 얻어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든지,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어느 법 아래 있으십니까?
“나는 귀찮습니다. 나는 그런 재판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죄수가 재판을 받을 때 판사를 향해 “나는 재판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더욱 중한 형벌이 부과되듯 더욱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게 될 뿐입니다. 불신자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예수의 새 생명으로 살아 언제 죽어도 천국가고, 정죄함이 없는 존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죄의 지배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 지옥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Ⅱ. 성령은 새 주인이 되어 성도의 마음을 지배하신다.(5~11절)

성령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새 주인이 되십니다.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 안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둘에 시간차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은사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바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성령을 받는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방언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성령세례’, ‘Second Blessing’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모두 이단사설이요, 신비주의로 가는 첩경입니다. 침례교와 개혁주의는 이런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은사나 경험일 다름이지, 그때에 비로소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언제 들어오실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침례는 방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셔서 새로운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만약 방언이 성령의 내주를 대표하는 사건이라면 2세기부터 19세기까지 방언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현상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검증 앞에 설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불건전한 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내주’(Indwelling of the Holy Spirit)는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새 주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옛 주인이 있습니다. 옛 주인은 ‘자아’입니다. 그리고 그 자아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귀도 우리의 옛 주인입니다. 마귀와 자아가 나의 옛 주인이었을 때는 마음을 온통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 옛 주인은 힘을 잃고 새 주인이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새 주인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새 주인이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리모델링’하십니다. 다 뜯어 새롭게 고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리모델링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우리의 영혼, 마음, 생각을 고치시며, 둘째는 육신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상에 획기적인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5~8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생각’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우리의 생각을 바꿔주십니다. 과거에 옛 주인이 지배하고 있을 때는 육신의 일만 생각했습니다. 죄가 좋아하는 것, 사망의 생각, 하나님과 원수 된 생각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고 하나님의 법을 어길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상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옛 주인이 사령탑이 된 이상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들만 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주인이신 성령이 들어오시니까 영의 일을 생각하고, 생명과 평안을 주는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생각을 하게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나는 아니야. 나는 저 목사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옛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주인이 들어와서 생각이 바뀌면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예배 시간이 기다려지고, 성경의 내용을 알고 싶어집니다. 과거에는 교회라는 곳이 이상한 사람들만 다니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이 바뀌면 밖에서 바라만 보던 교회와 완전히 다른 곳임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 하나님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모시게 된 사람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한 번 들어오시면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의 삶을 개선(리모델링)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자들과 대화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은 형식적인 표현들에 익숙해 있지만, 새신자들은 생각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다 보니 신선한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말들이 재미있습니다.
또 성령은 성도의 육신도 리모델링하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리모델링은 단순한 성형수술정도가 아닙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은 ‘죽을 몸’(Mortal Body)입니다. 죽을 몸은 아무리 리모델링 해봐야 결국 죽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이 죽을 몸을 완전히 새롭게 살리십니다. 그 때는 추하지도, 약하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새 주인,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께로 가면 성령이 내주하시고 마음과 생각뿐만 아니라 육신도 바꿔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생을 얻은 존재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마귀입니까? 성령이십니까?

Ⅲ. 성령은 성도들에게 의무를 부과하신다.(12~14절)

12~13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은 우리가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이 새로운 주인이 되셔서 우리 안에서 리모델링하시는데,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는 성도가 완전히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도 성도로서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 말아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 사람은 약간 복잡한 존재입니다. 옛 사람으로 살던 때의 옛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옛 성품을 육신, 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 사람이 된 성도는 옛 성품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죽여야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은 옛 성품 죽이는 일을 도와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어도, 옛 성품이 있기 때문에 죄에게 져서 죄가 원하는 대로 살면 망하게 됩니다. 지옥 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원해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육신을 죽이면 그 사람은 살게 됩니다. 운동을 해도 이기고, 사업을 해도 승승장구하고, 직장에서도 승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옛 성품을 좇아 살면 안 됩니다. 새 성품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고, 새 성품을 따라 살면 그 사람이 살게 됩니다. “왜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도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나?” 생각하시는 분은 육신에게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육신을 죽여 사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신을 죽인다는 것은 존재를 없앤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김치를 담글 때 소금을 뿌리면 뻣뻣한 배추의 힘이 빠지면서 흐물흐물해지지 않습니까? 옛 성품, 육신이 일어나려고 하면 팍 눌러 죽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옛 성품은 ‘똥개’이고, 새 성품은 ‘애완견’입니다. 똥개와 애완견이 싸우면 당연히 똥개가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똥개를 굶기고 애완견을 잘 먹이면 절대로 똥개가 애완견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애완견의 힘을 길러주고, 똥개의 힘을 빼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을 죽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성도가 육신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 육신의 죄가 우리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영국 공화정시대에 올리버 크롬웰이 정치를 했는데, 그 밑에 아주 훌륭한 군목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존 오웬’(John Owen)입니다. 그가 쓴 23권의 전집 가운데 제6권의 제목이 ‘죄 죽이기’(Mortification of Sin)입니다. 성령론에 관한 명저로 손꼽히는 이 책에는 이런 문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죄를 죽이는가? 아니면 죄가 당신을 죽이고 있는가? 당신이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우리는 죄를 죽여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속에는 남아 있는 죄성이 있습니다. 물론 제 속에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성이 마음껏 활개 치게 내버려두면 그 사람은 조만간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새 성품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Ⅳ. 성령은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15~17절)

15~16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종의 영이고, 성령은 양자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아바’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단어가 아빠, 엄마입니다. 그런데 애들이 아빠라고 부르다가 좀 더 크면 아버지, 혹은 아버님이라고 부릅니다. 아버님은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떤 성도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님’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빠라고 합니다. 매우 친근한 것이죠.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을 전제로 합니다. 아이들이 “아빠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 시대에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매우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자식이 잘못했을 때 아버지는 자녀를 죽일 수도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아버지 앞에만 서면 쩔쩔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즉 아빠라고 부르게 하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결론

로마서 8장은 아주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부흥회를 인도해도 수차례 설교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제임스 몽고메리라는 신학자가 “로마서는 성경의 반지와 같고, 그 중의 8장은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장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에게 네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죄와 사망의 법 아래 계십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계십니까? 당신 마음의 주인은 마귀입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은 육신을 죽이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육신이 당신을 죽이고 있습니까? 당신은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 질문들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질문들입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새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을 따라 그 분이 원하시는 일들을 행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