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 나오는 나귀들:
경주성경침례교회 주일설교
석양에 바쁜 사람
2016. 1. 23. 11:46
성경 속에 나오는 나귀들
본문:
오늘 오전에 다 같이 읽으실 성경말씀은
(마가복음 11장 1-10절)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신 줄 알고 받들어 읽겠습니다.
<그 후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주께서 제자들 가운데 둘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 있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고 하면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고 말하라. 그러면 즉시 그 사람이 그것을 여기로 보내리라.”고 하시더라. 그리하여 그들이 가서, 사거리 문 밖에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더라. 그때 거기에 서 있던 몇 사람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나귀 새끼를 푸니 무슨 짓이냐?”고 하자,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니, 그들이 허락한지라, 제자들이 그 나귀 새끼를 예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펴니 주께서 그 위에 타시더라.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더라. 사람들이 앞서 가고 뒤따르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우리의 조상 다윗의 왕국은 복이 있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더라.>
<성경 속의 나귀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귀는 꾀가 많은 동물로 알려졌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국어 책에는 “꾀 많은 당나귀”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날마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당나귀가 있었는데,
하루는 소금을 등에 지고 운반하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물속에 자갈돌이 잔뜩 깔린 시내를 건너가는데 그만 발이 미끄러져 당나귀는 시냇물 한복판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쓰러졌던 당나귀가 일어서는 순간 그 무겁던 등의 짐이 순식간에 가벼워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등에 잔뜩 지고 있던 소금자루가 물에 닿자 그만 소금이 녹아버려 짐이 가벼워졌던 것입니다.
며칠 후 당나귀는 이번에는 등에 잔뜩 솜뭉치를 지고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솜이지만 큰 뭉치를 지고 가자니 찌는 듯한 여름날에 힘들기는 소금이나 솜이나 무겁기만 했습니다.
이번에도 당나귀는 전에 넘어졌던 시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시내를 힘들게 건너가던 당나귀는 냇물 한가운데서 전에 소금을 지고 가다가 물에 쓰러진 후 순식간에 짐이 가벼워진 일이 기억났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발이 미끄러진 척하며 쓰러졌습니다.
주인은 호통을 치며 당나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당나귀는 안간힘으로 일어서기는 했지만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짐이 한층 더 무거워져 허리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소금은 물에 들어가면 녹아서 그 자루는 가벼워지지만,
솜은 물에 들어가면 흠뻑 물을 머금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무거워지는 원리를 당나귀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나귀 중에서는 매우 영리한 당나귀였지만 뜻밖의 사태를 당하여 소금과 솜의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당나귀의 허둥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부터 나는 성경에 나오는 당나귀에 대한 몇 가지의 예들을 살펴보고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성경 속의 나귀들> 그 첫째는 창세기에 나오는 나귀의 예입니다.
창세가 49장 14,15절을 찾겠습니다.
<잇사칼은 두 짐 사이에 구부리고 앉아 있는 강한 나귀로다.
그는 쉼을 좋게 여기고 땅을 보고 기쁘게 여기며,
그의 어깨를 낮춰 짐을 지고 조공에 종이 되었도다.>
보는 것처럼 잇사칼에게는 대단한 영예가 주어졌습니다.
그는 짐꾼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두 개의 짐이 지워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백성에 대한 짐이었지요.
그는 그 짐들을 기꺼이 짊어져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쉼을 얻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희락의 땅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잇사칼은 짐을 잘 지기는 하지만(14절) 때때로 돈을 벌기 위해 타협하려고 합니다(15절).
그래서 공세는 형제들에게뿐만 아니라 외국의 침입자들에게도 바쳤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을 찾겠습니다. <너희는 서로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그 뒤 6장 5절도 찾겠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짐을 질 것이니라.> 2절은 우리 자신이 마땅히 지는 짐 외에도 형제의 짐을 질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보다 우월합니다. 요한복음 7장 23절을 찾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거든 하물며 내가 어떤 사람을 안식일에 온전히 낫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나에게 화를 내느냐?> 보는 것처럼 모세의 율법보다 안식일의 주인인 그리스도의 법은 더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죄의 짐을 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그 무거운 죄의 짐을 지시고도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 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5편 22절을 찾겠습니다. <너의 짐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라.> 보다시피 시편 기자는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려 하지 말고 우리의 짐을 주께 맡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의 나귀들> 그 둘째는 말하는 발라암의 나귀입니다. 민수기 22장 28,29절을 찾겠습니다. <발라암이 나귀에게 말하기를 “이는 네가 나를 조롱하였기 때문이라. 내가 내 손에 칼을 가졌더라면, 지금 내가 너를 죽였으리라.” 하니 나귀가 발라암에게 말하기를 “나는 네 것이 된 때부터 오늘까지 네가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네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더냐?” 하니, 그가 말하기를 “없었느니라.” 하더라.> 한글 킹제임스성경에서는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만 영어 킹제임스성경에는 “she” 라는 여성대명사가 쓰인 것으로 보아 그는 수나귀가 아닌 암나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2장 16절을 보면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man)의 음성으로 말하여 그 선지자의 미친 짓을 막았느니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나귀는 암나귀인데 남자의 목소리로 주인 발라암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도대체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선지자를 화들짝 놀라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말 못하는 나귀가 말을 하는데 그것도 나귀 숙녀의 입에서 사내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나귀는 그 선지자 밑에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하다가 도중에 주저앉고 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여기저기 주님을 모셔다가 드릴 수 있지만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신실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발라암이 탔던 나귀는 나귀답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진리를 온화하게 전했으며 한마디도 헛되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대꾸하거나 적당히 구슬리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녀 자신의 주인을 흉보지도, 자기의 운명에 불만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적지에 도달하자 정곡을 콕 찌른 후에 자신의 임무를 끝냈던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참으로 대단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숙녀인지 신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도 아닌 이 나귀가 내뱉은 몇 마다의 말이 기록되어 수 천 년에 걸쳐 보존될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을 찾겠습니다. <너희의 말이 항상 은혜와 더불어 있게 하고 소금으로 맛을 내듯 하라. 이는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소금이기에 그들의 말은 소금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탕막대 같지 않고 소금과 같습니다. 상처가 드러나는 곳에는 소금을 넣어 문지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나귀들> 그 셋째는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잃어버렸던 나귀입니다. 사무엘상 9장 3,4절을 찾겠습니다. <사울의 아버지 키스가 나귀들을 잃자 그의 아들 사울에게 말하기를 “이제 너는 종 하나를 데리고 일어나, 가서 나귀들을 찾으라.” 하더라. 그가 에프라임 산지를 지나고 살리사 땅을 지났으나 찾지 못하였고, 그들이 살림 땅을 지났으나 거기도 없었으며, 그가 베냐민인들의 땅을 지났으나 찾지 못하니라.>
자신이 보살펴야 했던 나귀들을 잃어버린 사건은 매우 눈여겨볼 만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양들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그들을 지켰습니다. 사울의 나귀 이야기에서 두 남자와 그들이 기르던 짐승의 관계는 후에 그들이 다스리기로 되어 있던 백성들과의 관계를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나귀와 양, 모두 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곁길로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또한 한쪽으로 새기를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은 정도보다 샛길이 낫다고 속삭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물통에서 떠온 것보다는 훔쳐온 물이 달고 맛있다고들 합니다(잠 9:17).
여기서 정리해 보면 사울의 소년 시절은 잃어버린 죄인의 유형인 나귀를 나타내는 반면 다윗의 소년 시절은 성도의 유형인 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속의 나귀들> 그 넷째는 욥의 시대의 나귀입니다. 나귀는 역시 나귀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 하나님의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모양이나 특징이 변화된 동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어떤 증거도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화론을 숭배하는 자들의 모든 음모와 계획을 송두리째 거부합니다.
욥기 1장 14절을 찾겠습니다. <한 심부름꾼이 욥에게 와서 말하기를 “소들은 밭을 갈고 나귀들은 그 옆에서 풀을 뜯는데> 여기서 소는 정결한 성도를 예표하는 반면 나귀는 불결한 죄인을 나타냅니다. 즉 소들은 쉴새없이 주인을 섬기며 그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지만, 나귀들은 주인의 소유와 소들이 내는 산물을 먹어치우는 데만 급급할 뿐입니다. 죄인과 성도의 경우와 얼마나 흡사합니까! 성도는 자신의 주를 위해 일하는 반면, 불신자는 자신을 위해서 일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유익을 구하지만 죄인은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을 뿐인 것입니다.
이사야 1장 3절을 찾겠습니다. <소도 자기의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여기서도 우리는 동일한 진리를 예로 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소는 자신을 돌보는 이에게 관심을 주는 반면, 나귀는 주인의 양식을 축낼 뿐입니다. 소는 자신의 주인에게 헌신적이지만 나귀는 주인의 선물에만 관심을 둘뿐입니다. 소는 자신이 섬기는 이와의 친교를 구하지만, 나귀는 꼴만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친교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죄인은 그리스도의 선물을 바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 예로 갈보리 언덕 위의 병사들은 구주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주님의 옷을 놓고 도박판을 벌렸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원했던 것은 주님이 아니라 그분의 소유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 성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성경 속의 나귀들> 그 다섯째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에 쓰시려고 고른 것은 다름 아닌 어린데다가 작기까지 한 어린 나귀였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 있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고 하면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고 말하라. 그러면 즉시 그 사람이 그것을 여기로 보내리라.”고 하시더라. 그리하여 그들이 가서, 사거리 문 밖에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더라. 그때 거기에 서 있던 몇 사람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나귀 새끼를 푸니 무슨 짓이냐?”고 하자,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니, 그들이 허락한지라, 제자들이 그 나귀 새끼를 예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펴니 주께서 그 위에 타시더라.> 보는 바대로 우리 주님께서 타신 나귀는 실로 보잘 것 없는 나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어느날 우리도 취하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어리고 작을 뿐 아니라,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더라. 사람들이 앞서 가고 뒤따르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우리의 조상 다윗의 왕국은 복이 있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더라> “호산나” 이것은 왕국의 도래를 알리는 공식적인 외침소리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왕국을 세우시고 이방인들을 멸하시리라는 것을 다니엘 선지자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셔야 했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그분은 다시 오셔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벽하게 실현될 일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스카랴는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스카랴 9장 9,10절을 찾겠습니다.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지르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오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지니셨고, 겸손하시며 나귀를 타시리니 나귀의 새끼인 어린 나귀니라. 또 내가 에프라임으로부터는 병거를, 예루살렘으로부터는 말을 끊어 버릴 것이며, 전쟁의 활도 끊어지리라. 그리고 그가 이방에게 평화를 말하리니 그의 다스리심이 바다로부터 바다까지이며 강으로부터 땅 끝까지 되리라.> 이것은 무천년주의자들과 후천년주의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말씀입니다. 이 두 절이 초림과 재림을 한꺼번에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은 초림 때 그리스도의 승리의 입성에서 성취 되었으며, 10절을 재림 때에야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려나 이 나귀야말로 창조주이자 구속주를 태웠으니 실로 대단한 나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나귀는 고집 센 인간을 상징합니다. 잠언 26장 3절을 찾겠습니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어리석은 자의 등에는 매니라.> 성경 기록자인 성령님은 말과 나귀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를 알고 계셨습니다. 말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하면 채찍질을 해야 합니다. 또 나귀는 그 위에 누가 탈 때까지는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즉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한편 어리석은 자는 맞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남부 타타르 , 페르시아, 시리아, 에게 해의 섬들에는 들나귀 곧 야생 나귀가 있다고 합니다. 문명이 그들의 울창한 숲을 상당히 파고들어 갔지만 어떤 것들은 리비아의 사막을 아직도 달리고 있습니다. 욥기 39장 5-8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들나귀를 놓아주어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들나귀의 줄을 풀어 주었느냐? 내가 광야를 그들의 집으로 불모지를 그들의 처소로 마련했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북적댐을 조소하며 부리는 자의 외치는 소리도 무시하느니라. 산등성이가 그의 초장이니 그가 푸른 것은 모두 찾아다니느니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고 계신 당시에는 시리아, 아라비아, 북아프리카에는 많은 들나귀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들나귀들은 그 본성을 통제할 수가 없어서 그 등에 올라타기 전에는 들나귀를 길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집 센 들나귀도 하나님은 쉽게 길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암나귀가 말을 하기도 하고 창조주가 타고자 하면 제 등위에 창조주를 공손히 받들기도 합니다. 들나귀처럼 고집 센 사람들이지만 주님께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