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바울신학 7~12강 – 김세윤 교수

바울신학 7~12강 – 김세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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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4.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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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7강

바울이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비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즉 지금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하는 때이고 그 때까지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심장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오는 때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계획을 바울이 어떻게 계시받았느냐? 지나번에 우리가 그 계시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때에 받았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나타남의 상황 속에서 특히 이사야에 있어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나타남의 상황속에서 선지자가 궁전회의,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해서 그곳에서 자기가 선포해야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계시 받게 됨을 살펴보고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과 이사야의 소명의 체험과 견주어서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받은 계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성경적으로 확인받을 것인가? 그런것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 부름받음과 이사야의 선지자로 부름 받음의 유사점을 하나씩 살펴 보았는데 그중에 아마 세개를 한 것 같다.

네번째로 하나님의 회심 가운데 궁정회의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듯이 바울도 αποκαλυτειν(계시한다)는 말과 αποκαλυψις 또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자기가 환상 속에서 하나님 우편에 앚아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자기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번 첫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αποκαλυψις라는 언어 자체가 그리고 μυστηριον이라는 언어 자체가 그렇다.

궁정회의에서의 하나님의 דוס(계획)의 드러남을 말하기 때문에 또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들 중 히브리인으로 히브리인으로부터 난 히브리인이라고 바울은 소개한다. 이런 철저한 유대인의 바리새인 신학자가 어떻게 다메세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만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의 모든 신학적인 조류들의 공통적인 이해는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고, 지금이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때이다. 이스라엘이 다 회개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신학에서 랍비들은 토론이 많았다.. 왜 이렇게 메시야가 안오고 지체를 하느냐? 모든 이스라엘이 아직 회개를 안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온을 높이고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러면 하나니의 영광의 빛이 시온에서 온세상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면 모든 이방인들이 여호와가 진짜 ‘신’인 것을 알고 자기들이 지금까지 섬긴 신들이 전부 우상이며 목석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그것들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또 자기들 속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모시고 시온에 몰려와서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 좀 관대한 유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그러고 좀 편협하고 못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은 그렇게 해도 구원을 못받고 그렇게 와도 이스라엘의 종 노릇이나 한다고 민족주의로 만들어 놓았다. 무슨 소리냐면 즉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사야 시대가 와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그 연후에야 이방인들이 이런 식으로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온다. 이것은 선지서들에서부터 오는 이른바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순례 이방인들의 시온에로의 종말론적인 순례사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사야 2장 11장 등 미가 5장 2장 등 온갖 곳에 다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먼저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메시야의 구원을 받고 그 뒤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인보다 먼저 구원받는다는 법은 없다. 유대신학에서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철저한 유대의 종말론에 지금가지 고착된 바리새인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이방인들이 사도로 나설수 있느냐? 가령 갈6장6장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들을 계시했다고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다 회개했는가? 천만의 말씀.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덕을 힘 입었는가? 천만의 말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전혀 믿지도 않고 그런데 그들은 제쳐두고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것을 살펴보아도 바울에게 있어서 롬11:25절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구원의 계획을 전혀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구원의 계획을 바울이 그때에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에 동시에 계시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있게 이방인들의 사도로 나설 수 있으며 뒤돌아 보지 않고 뒤돌아 보지 않고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그곳에 보수(바리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훼방하고 반대를 해도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또 하나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사야가 그의 부를 때에 이스라엘이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하나님의 뜻을 받은데서 바울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 같다. 사실에서 바울의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복음을 선포하면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는데 이스라엘은 복음에 더 저항한다. 그래서 그들의 심장이 더 완악해진다. 이것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선포가 이스라엘 심장을 완악하게 했듯이 바울의 복음선포도 이스라엘 심장을 더 완악하게 했다. 또 하나 로마서 11:25에 언제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이 완악하게 되냐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이렇게 한시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것이 한시적이다.

이것은 이사야 6:11절과 연관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하고 그들의 눈을 무겁게 하고 귀가 멀게 해서 이사야의 말을 못깨닫고 이사야가 선포하면 선포 할수록 심장이 완악해져서 그들을 심판한다고 하니까 이사야가 묻는다.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심장이 완악하게 함은 항상 한시적이 언제까지니이까? 이질문은 시편에도 여러번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 가운데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게 부르짖는 문장 형식이 이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언제까지 입니까?에 대한 답이 이사야 6장에 주어졌는데 아마 바울도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한다. 너는 유대 인간에는 더이상 복음을 선포하지 말고 이방인에게 가서 에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해라. 이렇게 명령했다면 구약에 항상 나오는 이 문장형식에 따라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물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라고 그러는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런 정도 바울의 비밀과 이사야서 6장의 계시와 유사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그 완악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빛이 되어 주의 구원이 땅끝가지 이르게 하여야 한다(사49:1-6). 바로 갈라디아서 1:5에 보면 바울이 사49:1절에 바로 이 ‘주의 종이 부름’을 자기의 부름에 적용하고 있다. 주의 종을 불러서 이방인의 빛이 되게 했듯이 그래서 주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한다는 예언이 자기의 사도직에로의 부름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울이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서 이방인의 빛이된다. 이방의 빛이 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다.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말이다. 빛이라는 말은 계시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 또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들어면 완성되어 이빙인의 완전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도 끝나고 글하여 그들도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긍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도 바울은 어쩌면 이사야 6장 13절에서 얻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이사야 6장 13절이 특히 탈굼을 보면 당시 어떻게 해석이 되냐면 하나님께서 벌하시고 그 뒤에 불로 다 태워버리고 그루터기에서 새로 나는 싹으로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시작한다. 해서 탈굼을 보면 지금 우리 구약성경 이사야 6:13보다 훨씬 더 소망있게 훨씬 더 긍정적인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것에서 바울은 완악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이스라엘이 그것이 끝이 나고 그 끝 뒤에는 구원이 있을 것을 확신한 것 같다. 또 이사야 49:5,6절에서도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확인한 것 같다. 이제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바울의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중요한 바울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요점들을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왜 바울이 유대인 선교를 포기하고 이방인 선교자로 나섰나를 설명할 수 있다. 조금전 이야기 한 것대로 당시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유대 종말론은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유대의 대다수가 거의 구원을 안 받았는데 바울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로마서 11:25절에 확고한 구원사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울이 왜 그렇게 바삐 뛰어다니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하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나를 설명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바울은 자기에게 알려진 온 세계를 돌면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다.

세째로 바울과 유대 사도들과의 갈등을 설명할 수 있다. 유대 사도들은 유대교의 종말론에 집착을 한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이 구원받고 그 나중에 이방인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자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먼저 교회를 세운다.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교회를 세우는데 유대 사도들에게 있어서 보면 이게 아주 위태로운 일이다. 이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나 이런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아마 야고보와 보수 바리새 사도들의 눈에는 이게 아주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 AD 46년 쯤에 예루살렘 교회 leadership이 베드로에게서 야고보로 넘어간다. 베드로가 그곳의 핍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됨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지도력 아래 놓이게 되는데 그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과격히 보수적이 된다. 그래서 바리새적으로 되어간다. 이들이 입장에서 볼때 바울의 이방인들의 선교는 아주 위험하다.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이방인들이 저렇게 다닌다 말이다.

지금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시온이 영광받고 모든 이방인들이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까지 지금 현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먼저 유대인들이 되어야 할터인데 어떻게 되는가? 할례받고 율법을 수용함으로서 유대인들이 되어서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현재의 구원에 동참해야 할 터인데 바울은 율법과 할레를 깡그리 무시하고 곧장 이방인들에게 먼저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들의 교회를 세운다. 그러기에 아주 위험하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바울의 교회에 대표단을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 보내가지고 너희들은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너희들이 지금 구원받을 때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때이다. 그런데 바울이 정통성이 없는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배운 일도 없고 우리와 관계가 없는 자가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 어느 근방에서 자기가 에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엉터리 복음을 선포해 가지고 지금 교회를 세우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이 이제라도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다 수용하고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이 되고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자로 구원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교회 침투를 해가지고 문제를 일으켜서 바울은 그게 아니다. 율법을 수용하고 할례를 받는 행위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라하고 가령 갈라디아서,고린도 후서,빌립보서 에서 보는 격렬한 투쟁과 갈등을 하다.

그래서 유대 사도들 그러면 모순이 있다. 왜 그러느냐? 바울은 베드로를 자기 편이라고 본다. 바울과 야고보 일당과의 갈등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다른 이해에서 설명이 된다.

네째로 어떤 바울의 선교의 형태가 설명이 되냐면 바울은 이방 선교를 하면서도 항상 한눈은 예루살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가 말하는 이른바 1차,2차,3차 여행 끝에서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기가 로마를 향해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소망이 가득차서 고린도에서 로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우선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에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지금 자기가 오랫동안 로마로 갈려고 했는데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에서의 일에 의해서 지체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린도에서의 반란 때문에 바울이 오랫동안 지체했다. 그런데 드디어 고린도의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기쁜 마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야말로 그렇게 바랫던 로마행 그리고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면서도 그러면 빨리 뛰쳐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바랐으니까. 어디에 써 있는가? 롬1:15절에 다 써있다. 그러면 왜 예루사렘으로 돌아 가느냐? 돌아가는 것도 아주 위험한 여행이다. 자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여행이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끝에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한 기도를 부탁한다. 그 기도 제목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가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손에서 구출되도록 이당시에는(AD 57년 쯤) 팔레스틴에서 열혈당 운동이 아주 고조된 때이다. 66년에 드디어 반란전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열혈당 운동은 이방인들에게 적대감도 있었지만 특히 이방인과 교류하는 유대 백성들에 대한 그들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힌다 해가지고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일차적인 표적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체포될 가능성이 많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잠복을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속에서 구출되도를 기도를 부탁한다.

또 하나의 기도제목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 교회들의 헌금을 받아주도록… 바울은 이것도 불확실하다. 왜 그러냐면 예루살렘 교회도 야고보와 같이 바리새주의적 지도력 하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인정안 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의 교회들이 한 헌금을 받아주지 않으면 이 말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인정 안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세계에서 세운 교회는 큰 문제가 생긴다. 바로 그런일 때문에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했으며 바울이 헌금을 걷은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었다. ①하나는 바로 아까 이야기한 이방인들 종말론적인 순례이다. 신지자들의 vision에 의하면 종말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시온이 나타나면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들을 가지고 온다고 그랬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 영광이 빛을 바울이 전파한다. 이사야 49:1-2절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전파한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어쨌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2:1-0절에 보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께로 왔다. 그 증거로 그들이 헌금을 해서 그들이 보화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한다는 사도들의 예언에 따라 이 바울이 헌금을 모집한 것이다. 헌금을 모집해서 고린도를 해서 오는데 다시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각 교회에서 몇 명씩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왜 ? 그렇게 위험한 상황인데 유대인들이 얼씬만 해도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한데로 이바인과 교류한다는 가장 큰 핍박의 표적이었는데 바울이 그렇게 위험하면 혼자 변장을 하고 슬쩍 갈 일이지 보란듯이 이방인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는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이 옛 선지자의 약속(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선포해서 그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거둔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의 헌금 목적이 옛 이방인들이 종말론적인 시온에 대한 순례를 완성(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②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목적도 있었다. 어쩌면 구제목적이 기본적이니까 먼저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사도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특별히 바울에게 그것을 부탁했다(갈2:10).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울도 내가 구제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제 다음에 옛선지자들이 비젼확인.

③예루살렘 교회(유대인들)와 이방인들 교회의 교제(fellowship)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의 중요한 이유는 곧 이방인들 교회의 정당성 인정문제이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가 헌금을 안받는다하면 이제 이방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되는 것이다. 그런 바울은 구원사적인 연속성이 없이 자기가 자기 교회를 세운것 밖에 안돼 버린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로마 세계의 동북구(동반부)에서의 선교를 일단락 짓고 서반부로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음에 있어서 여기에서의 선교를 결산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원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된 그리스도 교회로 인정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 목적이 있다. ④또 하나의 목적은 로마서 11:13-14절 거기에 “내가 내 이방인들의 사도됨은 영광스럽게 여긴다”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랑한다는 말이다. 아주 자랑한다는 소리이다. 이것을 자랑한다. 목적이 무엇이라고 그러는가?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라도 그중에 몇사람을 구원하고자 해서 그렇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기 이방인 사도직을 유대인들에게 자랑을 하다. 그게 아니고 어떻게든지 유대인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야 되겠는데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로 하여금 시기나게 해서라도 구원시켜야 하는 것이 제일 순위이다. 바울이 대 헌금단을 조직해가지고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 이 헌금을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음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나타낸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은 개 돼지들로서 전혀 구원 가능성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서 구원의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헌금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바울이 이방인 사도직을 자랑한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해서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런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언제 구원받는가? 충만한 수(이방인의)가 들어올 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시키려고 하는데 그방법이 시기나 나게 하는 것이다. 바로 헌금에 이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이 헌금은 바울의 보시는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또는 바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거둔 것이다.

그런 바울의 선교 형태. 이런 것 그리고 바울이 왜 이방 선교 여행이 끝나면 꼭 예루살렘에 돌아왔느냐? 보는 바와 같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는 조건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 이방인 사도 바울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도 바울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급하다. 하루빨리 지금 로마에서 마치고 스페인에 가서 거기서 복음 선포하고 빨리 북부 아프리카에 와서 거기서 복음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리아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당시 자기에게 알려진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다. 바로 바울의 이와같은 구원사적인 이해가 바울의 이와 같은 선교형태를 낳게 된 것이다.

오는 우리에게도 바울의 선교전략이라든지 선교이해는 상당히 생소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선포한다는 소리는 각 개인에게 하나하나 다 복음선포해서 말귀 알아들었느냐? 해가지고 말귀 알아들었으면 교회 나와서 학습받고 세례받고 그래서 몇 년 공부 더해야 된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소위 복음화이다. 그런데 바울의 신약의 복음 선포를 보면 대개 큰 도로변에 큰 도시에 가서 거기 몇 사람 회당에 가서 두어번 소리 지르고 그래가지고 믿게 된 사람 몇 사람 해가지고 그러면 너희들끼리 예수 잘 믿어라 하고 딴 도시로 가서 또 회당에 가서 두어번 설교하고 몇 사람 모아 가지고 이제 복음이야 가르치고는 그러면 너희들끼리 잘 해봐. 너희들을 성령께 맡긴다. 그리고는 또 옮겨가고 이랬다. 바울이 언제 거기에 있는 사람에게 다 복음 선포했는가? 바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에베소와 고린도이다. 그러나 에베소도 2년 정도 햇수로는 3년 정도 머물렀을 것이다. 고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외는 잠깐 머물정도였다. 그래놓고는 바울이 롬 15:10에서는 뭐라고 그러는가? 내가 이지역(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서는 복음을 편안히 전파했다고 한다. 편안히 전했다는 말은 복음을 꽉 채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더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새로운 세계로 가야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울에 이해에 있어서는 소위 오늘날 새로운 개념으로 말한다면 represantative Universalism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다. 그래서 한 사람은 개인이 아니고 그가 속한 족속의 대표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복음을 들었으면 그 사람에 속한 족속이 복음을 다 들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울이 로마로해서 스페인으로 가서 그 다음은 북 아프리카로 해서 복음을 선포할 모든 꿈이 좌절되었을 때 바울은 새롭게 깨닫는다.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로 하여금 온 세상에 빙 돌게 한 것이 아니고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았다. 모든 이방인들의 대표가 누구인가? 로마의 가이사이다.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통치자가 가이사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헌금단을 데리고 왔다. 바울이 우려한 대로 거기서 체포되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이런 온 세계를 다 돌면서 실제로 자기가 복음을 선포할 꿈이 좌절되니까 가이사에게 상소를 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사를 보면 가이사에게 상소를 안했으면 Felix 가 풀어줄 수있었는데 로마 시민으로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로마의 최고 시민 가이사 앞에서 바울은 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그러면 왜 석방될 수 있었는데 바울이 쉽게 말하면 뇌물 몇푼 집어주었으면 석방될 수 있는 것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방은 안받고 가이사에게 상소하느냐? 그것은 가이사와의 재판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가이사는 이방인들의 왕으로서 세상의 주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주인 가이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재판의 과정을 통해서 증거하려고 한다. 그러면 가이사가 세상의 주,왕으로서 이방인들의 대표자, 즉 이방인의 대표 가이사에게 선포함으로 바울은 모든 이방인에게 선포한 셈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해서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가이사 콘스탄틴 대제 한 사람이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여서 로마제국 전체가 기독교화 한 것이다.

바울이 이와같이 represantative Universalism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면 아가야 지방 전체에 복음 선포한 것이다. 이런 식을 생각했을 것이다.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모든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로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들이 완악함이 풀리고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또 로마서 11:2절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 받아서 어떻게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선포를 수행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첫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모든 신학은 이와 같은 선교사업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늘 그의 바울신학의 선지자를 기억하여 공부해야 함.

*바울의 복음*

①계시와 전승으로서의 복음.

복음이란 말 자체가 아주 중요한 말이다. ευαγγελιον말 자체가 아주 신학적인 어휘이다.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소식이 복음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느냐? 이것이 최근에 많은 토론의 대상이다. 편리하게 좀 나이먹은 아티클이지만 G.Friederich의 EDNT사전에 나오는 ευαγγελιον이라는 아티클을 읽어보든가? 아니면 좀더 깊이연구하고 싶으면 P.Stahlmacher의 “Das Plan Evangelum”이라는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복음이라는 말이 생성되었는가? 이것은 어디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되냐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복음이라고 그런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O.TT. Betz가 우리에게 누차 강조했듯이 사52:7에 “거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자 또는 샬롬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도다” 하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그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냐면 너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사52:7)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심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가령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왜 하나님이 다스림이 기쁜 소식이냐면 그것이 곧 구원의 의미이다. 샬롬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단이 차지하고 곧 하나님의 주권,하나님 왕으로서 다스림을 사단이 찬탈 하여서 악과 고난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 사단의 주권을 하나님께서 쳐서 없애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인간이 들어오게 되니 곧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샬롬).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그게) 복음이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활동을 복음 선포라 할때 그것은 사42:7과 53장 등에서 왔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하나님 나라가 복음이다(예수에게 있어서) 그것으 이사야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 한다.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느냐?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연결하는 문제 이것이 신약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주제이다. 또는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마,막,눅,요)들은 아주 유대 문학적으로나 헬라 문학적으로나 독특한 장르(문체) 문학형식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어떻게 보면 전기같지만 전기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전기 같다(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기 같다). 그러나 그게 전기와 다른 것은 예수의 성육신과 가르침과 행적 이런 것을 그냥 무슨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듯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케리그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결단하는 요구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보통 전기와는 다르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의 이름을 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 이때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는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이런 여러 문제를 제시해 준다. 그래서 이 복음이라는 낱말 자체는 아주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는 복음을 히브리어로 הרושׁב라고 한다. 그리고 복음 선포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רשׁב이다(피엘형). 그래서 이러한데서 나오는 것에 근거해서 전혀 새로운 기독교적인 용어를 개발했는데 그게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그것을 공부하면 우리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새로움과 깊은 의미를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상당히 좋은 연구 과제이다.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가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복음을 어떻게 받았느냐?

1)바울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갈1:11,16)

갈1:11-12

자기는 이것(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받는다는 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히브리어의 לכק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승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한 랍비가 그의 스승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전문언어이다. 그렇게 자기는 복음을 한 랍비가 랍비의 선배,스승랍비로부터 전수받듯이 인간을 통해서 전수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자기에게 전수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왔다. 정반대이다. 전승을 전수받는 것이다. 이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전적으로 계시받아서 왔다고 말한다. 아마 갈라디아의 교회에서 그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아마 이렇게 주장한 것 같다. 바울은 원래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수 받았다. 이방인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율법과 할례등의 요구를 그 복음으로부터 떼어 내 버림으로서 그복음을 인간적인 복음으로 만들고 왜곡했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바울한테 받은 복음은 인간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기 위해서 인간들이 율법지키고 할례 받는 이 어려움을 완화한 싸구려 복음이다. 왜곡된 복음이다. 그러니까 그런 복음에 의한 신앙은 잘못된 것이고 그것으로서는 구원이 충분하지 못하니까 지금이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바울이 아예 원천적인 전제부터 부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무슨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은 일이 없다. 오로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므로 16절 그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를 통해서 내가 복음을 받은 것이지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인간들로부터 전수받았다고 나보고 그 복음을 왜곡했다고 내가 전수받은 일도 없다. 자기가 갈라디아서 선포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느니 복음을 자기가 누구한테 전수받아 가지고 그것을 왜곡해서 인간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고스란히 계시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주 그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전 15:1-11에까지 보면 갈 1:11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 나에 의해 선포된 복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배운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게시된 것이라고 아주 엄숙하게 선포했다. 고전 15:1도 똑같은 문장 형식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알게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복음은” 여기까지는 갈1:11과 똑같다. 다만 갈 1:11은 수동형에 의해 “나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이라고 했고 고전 15:1은 능동형으로 “내가 선포한 복음” 이것만 다르지 내용형식은 똑같다. 그 다음 완전히 180도 다르다. 나도 그것을 받은 것이고 여러분들이 받은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선 것이다. 그런데 구절에 “내가 받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가 복음을 받았다. 그 다음에 쓰는 말이 그 복음을 바울이 παραδιδοναν 전승했다. 이것은 παραλαμβνειν 전승받았다. 이것(παραδιδονανα)은 전승했다. 이 두개가 랍비 유대교에서 한 랍비가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승해주고 그 제자는 그 가르침을 전승받고 하는 전문언어이다. 바울은 고전 15:1-3에서는 이와 같은 랍비들간의 전수하고 전수 받는 전문언어를 동원해서 자기보다 먼저 된 사도들로부터 전승받았다고 그런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누구에게 그것은 똑같은 방식으로 전수했는가?고린도에 전수했고 그러니 큰 문제가 발생했다. 고전 15에서는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승 받았다. 그리고 복음을 고전 11:1-3까지에서 복음은 무엇인가? 전승이다. 갈1:11-12,15 등에 의하면 그것을 바울은 강력히 부인한다. 부인하면서 복음이 계시라고 그런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미국의 경망스런 J.T.Sanders라는 사람은 “바울이 둘 중의 한 곳은 거짓말하고 있다”고 그런다. 이와 갈라디아에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고 둘다 깊은 의미가 있다. 바울은 복음을 계시 받았다. 바울의 복음은 그래서 계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 봅시다. 내책 “Original For Gospel” pp67-70에서 토론을 했다. 그리고 Ladd의 신약신학 영어판 pp386-394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C.Backer의 “바울”이라는 책 pp109-136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Goppelt의 책 “신약신학” 제 28장 3항에도 토론이 되어 있다.

(해결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의 진리를 인간이 설득해서 설득해서 깨달았는가? 무슨 예루살렘 사도들한테 가서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얻은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곧 복음의 진의로 터득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받았다고 그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역사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즉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해석해서 기술함으로 선포되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역사 속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을 우리가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으로 서술함으로서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 복음은 전승의 대상이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죽고 부활했는가를 아는가?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예수의 죽음과 삶과 부활의 증인들) 즉 예수를 따라 다닌 사람들이 서술해주어야 우리가 아는 것이다.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예수의 옛 제자들로부터 전수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자기가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고전15:3-5까지 요약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설명하는 서술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은 고전 15:3-5까지의 요약대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서술함으로서만 선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전 15:3-5까지의 복음의 서술은 규범적인 것이다. 왜 그러냐면 바울이 11절에서 “모든 사도들이 다 똑같이 그 복음을 선포한다”고 그런다. 나나 저들이나 이렇게 선포하고 이렇게 너희들은 믿는다. 그러니까 모든 사도들이 공통으로 이와 같은 서술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 당도했을때(고전15:1)에 이 복음을 그대로 넘겨주었고 그 복음 안에 너희들이 지금 서 있다. 그 복음으로 너희들이 구원 받았다. 그래서 고전 15:3-5은 규범적인 복음 서술 형식이다. 이 형식을 바울이 전승으로 받았다는 말이다. 고전 15장의 바울의 관심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게 바울의 관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도가 모든 교회가 공통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형식을 상기시키는 것이 주요했던 것이다. 고전 15:2에 보면 번역이 좀 재미가 없다. “내가 어떠한 말투로(πινι λογω ευηγγελισαμην υμιν) 상기 시키겠노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자기가 선포하고 모든 사도들과 온 교회가 선포하고 믿는 복음의 문장 형식 하나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전승의 전문언어를 써서 상기키시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에서는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고 복음의 내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덧입을 수 있다고 복음이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유대주의자들은 복음보다 율법과 할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갈라디어서는 복음의 문자 형식이 중요한게 아니다. 즉 이것이 issue가 아니다. 이러한 문자 형식으로 전달되는 내용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해석하는 복음의 진리가 누구한테 전승받아서 왜곡한 것이 아니라 계시로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계시 이것은 곧 은혜,믿음으로만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래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받는게 아니고 믿음 더하기 율법이라는 복음을 받았는데 그 중에 율법을 떼어내버린 것이라고 유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구원의 사건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은혜 그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피상적으로 보면)보면 바울이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둘다 어울림이 있다. 그러니까계시 결론적으로 복음은 이면서 전승이다. 또는 전승이면서 계시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진리는 전승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승이 된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계시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문장 형식은 우리에게 전승된다. 그러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또는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항상 계시와 전승이다. 바울이 갈 1:15이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받은 3년 뒤에 예루살렘에 가서 게바를 알고 지내러 갔다고 한다.

갈 1:18에 “ιστορησαι κηφαν” 라고 나온다. 이 말을 요새 학자들은 게바에게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고 확대 해석을 한다. 그래서 게바와 두 주간 같이 지내면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베드로에게 전승받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기술하는 문장 형식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계시와 전승이다.

바울신학 제8강

지난 시간에 아마 갈1:11,12 그리고 15,16 등에서 바울이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는것을 주장하는 것과 고전 15;1-8까지에서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부터 전승으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대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난번에 설명을 한 것 같다 .

그래서 복음이 계시이면서 동시에 전승이라는 것. 예수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종말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이 복음인데 이것은 계시로 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구원의 사건이 역사적 예수,나사렛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나는 역사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은 동시에 전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사렛 예수의 사건(삶과 죽음과 부활)이 그냥 평범한 인간의 생애가 아니고 이것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확인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은 계시이면서 동시에 전승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왜 이 복음의 계시성을 강조하느냐면 자기가 받은 복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믿음으로만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자기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그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 바울이 자기가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받은 복음을 인간들에 의해 더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자기는 원래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이 복음 곧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파한 복음, 지금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공격하는 이 복음을 자기가 사도로 부름받은 때에 계시받은 복음이다.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의 복음의 계시성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고전 15장에서는 바울의 주안점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데 이 핵심을 온 세계 교회가 같이 고백하는 것이고 이 신앙고백 위에서 우리들이 다 장래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데 이 지금 고린도의 사람들이 부활을 부인함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전세계 교회의 공통된 신앙고백, 또 공통된 복은 자기가 고린도인들에게 선포한 복음 자기가 먼저 사도된 자들로부터 전승받은 복음을 상기시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할려고 부활의 신앙을 끝까지 견지해야 했다.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우리 개인들의 장래의 부활을 소망할 수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전승된 복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승받고 계시받았다. 곧 계시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그를 통해서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계시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사실(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를 위한 구원자다. 예수의 사건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등을 그런 뜻을 나타내는 신앙고백 이게 전승이다. 이 전승으로 또 바울에게 주어졌다. 그게 어떻게 되었느냐면?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등을 전승되었고 또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등으로 전승되었고 또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등으로 초대교회가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고 이러한 신앙고백을 선포의 형식(Kerygma)으로 삼았다.

복음 ꠆ꠏ계시

ꠌꠏ전승-신앙고백-예수=그리스도 ꠏꠈ

주 ꠐ⇨바울신학

하나님의 아들 ꠐ

죽고 부활함 ꠏꠎ

그래서 이런 것들이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의 형식이다. 복음에 에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이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형식이 이런 식으로 초대교회에서 되었다. 바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계시를 받고 그 복음을 초대 교회에서 이미 성립된 복음의 표현형식을 전승받아서 그것을 빌려서 그 형식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만 바울은 이것을 그냥 전승받아서 그대로 쓰기만 한게 아니고 자기의 신학적인 통찰력 특히 구약과 또 자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런 것의 빛 아래 더욱 풍부하게 그 의미를 함축시켜 가지고 이 초대교회가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예수가 주,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죽고 부활함 등으로 신앙고백할 때 또는 그런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에 뜻했던 것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큰 의미를 부과해서 다시 말해서 더 발전시켜서 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신학이다. 바울은 이러한 과정중에서 초대교회가 미처 쓰지 않는 복음선포 형식도 스스로 개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종의 기독론적인 표현형식이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예수가 마지막 아담이다. 이런 것들은 바울 신학에서만 나오는 예수에 대한 선포형식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부 초대교회(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의 복음의 표현형식을 빌려서 그것을 더 풍부하게 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고 선포하기도 하고 일부 자기가 직접 새로운 신학언어들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개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 사건됨을 선포한 것임. 이런 것들이 바울신학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신학 할때 이런 것들을 바울신학이라고 그러는데 바울신학의 독특성을 말한다면 이 초대교회의 공통된 케리그마를 바울과 신약에서 바울 외의 문서들(요한,마태,마가,누가,히브리서) 등과 비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어떤 점에서 바울이 요한,마태,마가,누가,히브리서 저자와 어떤 점에서 같이 또 어떤 점에서 좀더 색다르게 선포하는가 또는 이 ‘주’라는 칭호는 또 어떻게 바울과 신약에 있어서 바울이 아닌 다른 저자들과 어떻게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어떻게 좀 색다르게 사용하는가 하는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 바울신하이 독특성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것(예수=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죽고 부활함)은 완전히 바울신학의 독특성이다. 이런 것들을 이제 전부 가려서 생각을 해보면 바울신학의 전제를 그릴 수 있고 또 바울신학이 초대교회의 보편적인 신학과 공통신앙이 어떻게 일치하며 어떻게 독특한 점이 있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좀 해볼려고 한다.

바울은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하고 구원론적으로도 정의한다.

가령 기독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롬1:2-4/고전15:3-5/고전1:23/갈1:12,16/고후4:4 등 또 구원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롬1:16등. 그런데 기독론과 구원론은 두개이 상이한 서로 분리될 수있는 교리가 아니라 한 교리의 양면이나 우리가 편의상 이렇게 분리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론은 구원론의 근거이고 구원론은 기독론을 인간론적인 응용(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론은 무엇이냐면? 기독론을 우리 인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적용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파헤친 그것이 구원론이다. 그래서 기독론이 구원론의 근거이기 때문에 이 ‘바울신학’은 기독론 중심이라 할 수 있고 우리의 바울 연구에 있어서도 기독론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트만 학파에서는 그리고 실존주의 신학에서는 구원론 중심으로 바울신학을 전개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들은 인간론이 중심이다. 인간론이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 우선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은 옳지 않다. 이 옳지 않음을 가장 예리하게 지적한 사람이 전에 불트만의 제자였던 E.Kasemann이다. 그래서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는 인간론보다는 기독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을 인간에 적용한 것이 곧 그리스도의 인간을 위한 의미로 이제 해석할 때에 비로소 기독론이 구원론이 된다 하는 것을 밝혔다.

자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또 주라는 칭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또 하나님의 형상,아담,이런 칭호들을 따져가면서 바울신학의 연구를 할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해결할 것이 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바울 전에 신학의 단계가 어느 정도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계시받고 사도로 부름받았을 때에 당시 교회의 신학이 어느정도 발달했나 곧 당시 교회가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었나? 아까 이야기하대로 바울은 당시 교회가 선포하고 있던 복음을 전승받아서 그 표현 작업으로 자기의 계시 받은 복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풍부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름받고 복음을 계시받을 그대 즈음에 그러니까 이게 시간적으로 말하면 AD32-34 이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것이 AD 30년 쯤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 죽고 부활하심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불과 2,3년 떨어진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직후 이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나타나고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는 복음 선포 양식들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울전에 얼마만큼 발달해서 바울이 이때부터 받은 복음의 계시를 어떻게 이들이 먼저 이룬 그 복음이 표현 방법들(이것이 전승이다)에 의해 표현되게 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첫째로 고전 15:3-5 여기에 보면(지난번에 고전 15:1-2은 살펴보았던 바울이 랍비들의 전문 개념인 전승받고, 전승하는 전문언어를 써서 복음을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자들로부터 전승받아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일 먼저 전승한 것이다.그 믿음 안에 이들이 서 있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3절부터 그 내용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었다. 성경의 예언대로 죽었다. 그 다음에 4절에 그가 장사되었다. 이게 다 ‘οτι’라는 절이다. 영어로는 that 절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또 ‘οτι’ 장사되었다. 그 다음 4절 후반부에 첫째로,둘째로,세째로 그 다음에 3일만에 부활되었다(일으킴을 받았다). 이것도 성경대로 그 다음에 게바에게 보여졌다(나타났다). 그러니까 부활해서 나타남 게바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났다. 12제자 12사도가 전문용어이다.여기까지가 ‘οτι’절로 되었었다(that절).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에 모든 형제들,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 다음에 6절에 500 여 형제들에게 나타났다. 게바에게 나타나고 12제자에게 나타나고 500 여 형제에게 나타나고 그리고 괄호속에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몇은 죽었어도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 이런 것은 괄호에 들어가는 것이다. 7절에 그 다음에 야고보에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 다음에 8절에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나타났다. 우리 성경에는 ‘유산된자’와 같은 자기에게 나타났다. 여기 이 두부분(7절,8절)은 ‘οτι’로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대개 학자들이 3-5절까지가 원래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초대교회가 선포했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이어 받았다. 지금 부활 나타남을 씨리즈로 말하고 있다.

세 씨리즈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부분(7-8절)은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왜 덧붙였냐면 지금 고전 1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활 나타남에 대한 정보를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왜 덧붙였냐면 지금 고전 15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활 나타남에 대한 정보를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에 있어서 그러니까 원래 여기 (3-6)까지 복음이다. 초대교회가 선포한 복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면 첫째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썼다. 예수가 메시야다라는 칭호를 썼다.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자다. 메시야다. 그러니까 예수가 성경예언을 성취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의 성경에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 사건이다.

둘째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의 그리스도됨. 즉 종말론적인 구원자 됨을 무슨 정치적인 해방으로 무슨 다윗과 같이 왕조를 재건하고 이방인들을 정복하는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리 죄를 속죄,죄문제를 해결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됨이다. 우리 죄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적인 행위는 죽고 부활한 것이다. 이 나타남은 부활의 확인이고 그래서 예수의 그리스도 사건은 예수의 그리스도로서의 행위는 구원의 행위는 종말 구원자의 행위는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대로이고. 그러니까 그것이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주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이런 식으로 바울 전에 이미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핵심이 있다고 보았고 그의 그리스도로서의 행위는 무슨 정치적인 군사적인 구원이 아니고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할 구원으로 보았다. 이렇게 바울 전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이게 οτι절로 되어 있다.

이제 하나하나가 사실은 이 순서를 가만히 보면은 우리가 마가복음의 순서와 많이 일치한다. 영국의 신약학자 C.H.Dodd는 ‘이 고전 15:3-5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전반부에서의 사도들이 설교에서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공통적인 내용과 순서를 기출해 냈다. 가령 “성경의 메시야에 대한 종말의 구원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할 때가 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게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덧입어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내용들을 초대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설교했다. 그래서 C.H.Dodd는 이런 것을 Kerygma라고 그랬다. 초대교회의 설교다. 그래서 초대교회 설교가 이와같은 공통적인 내용과 순서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마가복음도 막8:27-31 이것의 내용은 “베드로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 그리스도됨을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넘겨줌을 받아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여기서부터 죽음을 예고한다”이게 마가복음의 분수령이다. 그전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설명하는 서론에 해당한다. 여기서(막8:27-31)부터서 예수가 메시야이고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는데 어떻게 원수들에 의해 체포되고 어덯게 재판받고 수난받고 죽고 어떻게 부활했는가? 이게 예수의 수난사(Passion narrative)이다.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막은 예수의 수난사에 긴 서론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막 전체가) 사실은 막 8:27-31 안에서도 계속해서 예수의 죽음의 사건이 반영되어 있다.(예고되어 있다. 간접적으로). 그래서 막에서도 예수의 수난이 복음의 중심이다. 막 8:27-31에서도 보면 예수의 메시야됨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C.H.Dodd는 이런 것을 Kerygma라 불렀다(고전15:3-5 사도행전에서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 요약, 그리고 막에서 그 순서를 추출해서) 이런 것을 알려면 C.H.Dodd의 책을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이 책이 한때 영향력 있는 책이었다.

한말 더하고 넘어가면 요 말들이(고전15:3-5) 가령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 .그가 장사되었다. 이 하나하나가 한 문장 한문장이 사실은 예수의 수난사 전체에 대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고전15:3-5)서 한 문장 한 문장은 한 문단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령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 복음을 선포할 때에 사람들이 말하는 사영리식으로 했다(사영리→인간은 죄인이다-4개의 진리가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개할 때도 우리는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만 하는가? 왜 죄인이고 죄인이란 뜻을 설명한다. 둘째 번하고 또 설명한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 교인들도 이것을 복음으로 선포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그가 장사되었다. 그 말만 한 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며 어디서 났으며 무슨 일을 했으며 무엇을 가르쳤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어떻게 가르쳤고 제자들을 모아서 어떻게 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원수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해 가지고 그리스도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는 제목이다. 그다음에 예수의 장사된 것은 성경에 많다. 어떻게 여자들이 향료를 준비하고 또 아리마대 요셉이 어떻게 예수를 사랑해서 무슨 향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와 가지고 자기 집안의 무덤에 묻었다는 이런 이야기등이 있다. 이게 제목이다. 이것을 선포할 때는 예수가 어떻게 향료를 하고 어떻게 묻고 그런 것이다. 그 다음에 그가 삼일만에 성경대로 살아났다. 이것은 또 예수의 빈무덤 이야기 이런게 주욱 나온다. 예수의 나타남 게바에게 나타났다. 성경에 보면 제일 먼저 예수가 누구에게 나타났는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 왜 막달라 말리아가 나타났다는 말을 쏙 빼고 게바에게 나타났다고 했는가? 당시 여자들은 증인 자격이 없었다. 여자들이 증인서면 역효과가 난다. 그래서 빼버린 것이다. 그래서 게바가 제일 먼저 나온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복음의 공식적인 표현은 제일 먼저 게바에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에는 게바 전에 마리아가 예수를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가령 M.Hengel같은 사람은 그게 아주 우리 복음서의 성격과 역사성,신빙성에서 좋은 증인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복음서가 만약에 초대교회 신앙을 그냥 역사화 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면 -그것이 불트만 학파의 양식사학파들의 주장-복음서에 게바가 예수를 제일 먼저 본 것으로 되어 야 할 것이다. 마리아가 본 것은 삭 빼버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증언하면 역효과가 날 판에 왜 마리아가 제일 먼저 보았다고 하는가? 마리아가 게바 다음에 보았다고 해도 좀 어설픈데 게바보다 먼저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왜 그런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을 신실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서의 역사적 신실성을 말한다. 그래서 이제 게바에게 먼저 나타났다고 하지만은 아마 우리 복음서에 있는데로 선포한 사람들은 어덯게 여자들이 이제 향료를 준비해가지고 갔는데 마리아에게 나타났고 마리아가 어떻게 게바에게 가서 알려가지고 게바에게 준비했는데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고 이런 예수의 나타남의 이야기를 쭉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풀면 아까 이야기한데로 οτι절(That)들은 다 무엇이냐면 각각의 이야기들의 요약하는 제목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제목에 함축된 이야기를 다 풀면 무엇이 되느냐면 막 같은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서들 같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에서 복음서들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마가가 복음을 펼친 것을 뭐라고 말했느냐면 복음이다. ευαγγελιον이라 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은 고대 문학장르에서 아주 독특한 장르이다. 신약성경의 현상이다. 복음이라는 문학장르가 있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도 학자들이 복음이라는 문학장르를 고대 알렉산더 대왕같은 헬라 영웅의 전기와 비교해볼 수 있을까 아니면 모세에 대한 전기(유대 사람 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을까? 아니며 이게 무엇이냐? 이렇게 해서 문학장르를 새롭게 정의할려고 하는데 그런 전기와도 일부 공통점이 있지만 전기가 아니다. 헬라식으로 전기가 아니다. 복음서가 전기이기 위해서는 에수가 어떻게 자라고 교육받고 성격이 어떻고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게 하나도 안나타난다. 복음서에 보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예수이 공생애의 가르침과 선포와 그의 투쟁과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임을 깨닫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전기라기보다는 선포(Kerygma)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과 같은 양식사학파들은 복음은 전적으로 전기의 성격이 전혀 없고 선포의 성격만있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선포의 성격만 있다고 강조해서 양식사학파의 대전제의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복음이라는게 독특한 문학장르이지만 일부 당시의 전기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니까 당시의 전기,극작(드라마),헬라의 비극작품들과도 일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아주 독특한 문학장르이다. 그런 류는 바로 이와같은 복음의 선포에서 복음서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또 (바울전의 신앙고백)을 살펴볼 수 있는데 롬 1:3-4에서 바울은 롬1:1에 “예수의 종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성별되고 사도로 부름받고” 바울이 그 다음 7절에 로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 성도로 불림움 받는 자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되어 있다. 발신은 바울이고 수신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쓴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가 어떤 사도인가 설명하는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사도로 부름받았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받았다. 또는 분별되었다는 사도”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2절에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이냐를 또 길게 정의를 한다(2-4절까지).그래서 그 과정 중에 복음을 여러가지로 정의한다.

복음이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 복음이 저자가 하나님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의 신적 quality를 말한다. 복음이 인간적인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말한다. 그러니까 신적 quality로 되었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적인 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 다음 2절에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이냐면 성경들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무엇이냐면 성경에 있어서의 선지자들의 예언, 또는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성취이다. 성취가 복음이다. 이 복음을 이렇게 두번째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사적으로 복음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 사건이다.

세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3절에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이 복음의 내용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바울은 아주 자주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요약한다. 여기서도 복음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이 복음이다.

9절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아들의 복음. 그의 아들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섬긴다고 바울이 말한다.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복음의 내용으로 정의한다. 그 다음에 이제 3절과 4절에서 지금까지 복음이 정의였고 이제 그의 아들에 관한 정의를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3절에 그이 아들이 어떤 분인가? κατα σαρκα(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 그 다음에 4절에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만 번역은 잘못되어 있다. “성결의 영으로…”“능력으로”가 어순이 잘못되어있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하여여”이렇게 원인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또 시간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죽은자들로부터,부활할때부터)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사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εν δυναμις가 하나님의 아들(명사)를 수식하는 말이다. 동사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능력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사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거기_____ 이말이 임명되었다는 말도 되지만 등극했다는 말도 된다.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헬라어로 쓴 이유가 있다. κατα σαρκα(육신에 의거해서) 이말이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지금 σαρκα(육신)과 성령을 대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게 정확히 무슨 말이냐? 아니면 예수가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로 낳지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성육신한 자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이게 아주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걸 논할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대부분의 학자(바울 전의 교회의 특히 아람말을 쓰는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의 복음 또는 신앙고백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금방 나타난 것과 같이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는 표현은 이것은 완전히 셈족언어의 형식이다. 바울은 성령을 항상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ων 으로든가 το αγιων πνευμα 그러지 이런 식으로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로 쓰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히 셈족언어 스타일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유대셈족 말을(아람어를) 쓰는 유대 기독교가 정의한 복음 또는 신앙을 바울이 문자 그대로 직역했다는 말이다. 그런 흔적이 여기 남아 있다. 또 하나 κατα σαρκα와 κατα μνευμα를 대조시킨 것이 바울신학이기는 한데 그것이 대표적으로 롬 8장에 나온다. 그러나 바울은 σαρκα 와 πνευμα를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바울에 있어서 σαρξ는 육신은 항상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로서 인간을 말한다. 여기서는 그런 뜻이 있지 않다. 이것은 도리어 구약과 유대교적인 의미로 רשׁב 이다. 그냥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우리 몸을 가지고 물질적인 세계에 사는 존재 이정도 뜻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항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신이라는 말은 살덩어리라는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육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의미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이게 바울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런 것도 신앙고백이 바울 전의 기독교의 복음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롬 1장에서 복음을 또 한번 정의한 것이다. 롬 1:16에서 복음을 정의하는데 그전 (롬1:1-9)에 복음은 기독론적으로 정의하고 롬 1:16에서는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겠지만 이 두정의가 일핏 보기에는 이렇게 완전히 다르지만-하나는 구원론적이고 하나는 기독론적으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정의가 똑같은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게 ①κατα σαρκα②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바울전의 기독교 복음이다는 것이다.

아까 고전 15:3-5까지를 대강 분석함으로서 바울 전의 교회가 무엇을 복음을 보았으며 그 복음을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대충 살펴보았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이 복음 선포할 때 예수를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했다. 그런데 몰1:3-4은 삼하 7:12-16까지를 근거로 삼고 있다. 이른바 구약의 나단의 예언 또 나단의 신학이라고 하는 이 부분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 나단의 예언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 다윗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네 수가 다하면 그러니까 네 씨, 다윗의 아들 하나를 일으켜서 그를 네 왕 위에 앉히고 내가 너희 집을 세운다(너희 왕조를 세운다). 그를 나의 아들로 선언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 예수를 하나님을 대신해 통치하는 자라고 선언한다는 말이다(자기 아들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짓도록 하겠다. 성전을 짓게 하겠다. 이것이 나단의 예언의 내용이다.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약속이다. 그러니까 다윗의 씨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아서 다윗 왕위에 앉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솔로몬 때에 처음 약속이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솔로몬)을 일으켜서 그를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를 예수의 왕으로 세워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로 선언했다. 자기 아들로 선언한 의미는 자기 백성 예수 위에 자기(하나님) 대신 통치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말임.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그 뒤 이 약속에 근거해서 예수 왕으로 등극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 위에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자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시편의 등극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시2편,89편 등). 가령 2:7(예수의 세례 때 울려퍼진 소리)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이렇게 다윗의 왕위에 등극하는 다윗의 아들(예수 왕)을 하나님께서 자리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대신 통치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약에서 예시적으로 해석이 된다. 그게 이제 스룹바벨과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고 또 돌아오고 하는 다 이런 과정들도 있지만 선지자들 또는 시편의 기자들 나단의 예언을 계속 자기들을 실망시킨 다윗의 자손에서 그것이 실현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다윗과 솔로몬을 정점으로 다윗 왕조가 퍠역한 타락의 길로 간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취될 것으로 못본다. 또 나중에 바벨로니아에서 돌아온 다윗 왕가의 마지막 왕자인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취되리라고 굉장히 기대를 했는데 그것도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점점 이 예언을 종말에 성취될 예언으로 본다. 그래서 이 예언이 바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의 뿌리가 된다. 그래서 메시야의 칭호들이 전부 다윗의 씨,다윗의 아들,다윗의 가지,하나님의 아들 등이 메시야의 칭호들이 된 것이다. 다 여기서 나온 것이다.

예수의 사건,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예수가 이 예언을 성취한 것이다. 복음이 선지자를 통한 약속의 성취이다. 예수가 바로 이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 왜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켰다.(부활로 4절 εξ αναστα…그를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이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하나님의 아들로 왕위에 등극하게 했다. 그러니까 다윗의 아들로 예수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다. 육신의 삶에서도 그는 다윗의 아들로 메시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부활 전에와 부활 후에가 완전히 다르다. 부활 전에는 감추어진 아들이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들만 그를 이해할 수있고 믿음 있는 자들만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능을 덧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들만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세로 치유함을 받고 용서함을 받는 그런 권능을 덧입었다. 그러나 그게 대게는 감추어 졌다는 것이다. 이제 부활로 말미암아 만유의 주로 등극했다. 어떤 권세를 행사하는 주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이제 감추어진 것이 싹 벗겨졌다. 빌2:9-11과같이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우편에 올리셔서 온 우주로 하여금 그를 주로 고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바울 전에 이미 예수의 사건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사건으로서의 유대메시야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분이라는 것,그가 다윗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그가 만유의 주로 이제 능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이제 사단의 권세의 영역에서 인간들을 해방시켜서 자기의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권세(주권)의 영역으로 들여오는 주권자라는 것(골1:13) 등의 의미를 바울 전에 이미 예수에게 신앙고백한 것이다.

또 하나 많은 학자들은 롬 3:24-25에서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의 신앙고백의 모습을 볼 수있다고 한다. 불트만 학파는 헬라 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본다(3:25f) 아주 어려운 것인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를 통한 ιλαστηριον으로 세웠다(25절)”“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ενδειξιν 하기 위해서이다. εις ενδειξιν της δικαιοσωνης αυτου(=Θεου)이다. 그 다음에 δια την παρεσιν των προγεγονοτων αμαρτηματων 이렇게 되어 있다. 26절 εν τη αρχη του Θεου προς την ενδειξιν της…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은혜로 의롭다’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됨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느냐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ιλαστηριον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크게 두 해석의 주류가 있다.

하나는 전통적 해석 방법. 이것이 무엇이냐면 ιλαστηριον이라는 말이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영어로는 propitiation이다.내용상으로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래서 우리 대신 벌받는 대속물을 바침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풀어버린다. 이것을 ιλαστηριον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해서 노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벌 주시고자 한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 대신 벌을 받아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것이라는 것을 ιλαστηριον이라고 하고 propitiation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사건이다. 우리 대신 벌을 받으시므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풀어 버린 사건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증명했다. ‘하나님의 의’가 증명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과거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서 간과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 해석 방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오래동안 인류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그냥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오래 참았다. 그러니까 인류는 계속 죄를 쌓아가지고 역사 속에 의로운 하나님이 인류를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있나 없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문제 삼기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을 벌주어야 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벌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사랑의 하나님이라 그래서 인간들에게 내릴 벌을 자기 아들 그리스도에게 내림으로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벌을 받도록 함으로써 이 공의를 만족시켜서 (만족시킨다는 교리가 여기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더 이상 진노하지 않도록 그의 노를 풀어 버렸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 의롭다고 선언할 수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의로우신 분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게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근거해서 왜? 대속의 죽음은 ιλαστηριον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대신 받아서 그의 노를 풀어버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진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를 더 이상 그 진노의 상태에서 해방시켰고 의롭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해석은 이른바 penal substition theory 라고 그런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나? 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의롭다 하시는가? penal 그러면 형법적인 벌주시는 대치이론이라는 말이다. 우리 대신 그리스도가 대신했다(substitution) . 그래서 벌을 받았다. 이런 이론이다. 이것은 그래서 atonement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의롭다고 했느냐에 atonement 이론 중 중요한 penal tubstitution theory라 이것을 형법적인 카테고리로 설명을 하는 것이고 벌주는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벌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벌 받음에서 자유롭게(의롭게) 되었단 말이다. 이런 것을 penal substitution theory 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복음주의 구원론의 기초이다. 이 때의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υνη)’라는 것은 어떤 놓음,규범에 맞지 않으면 벌주는 법적 개념으로서 ‘의’라 즉 forensic(법적 재판적 개념)의 ‘의’이다. 이때의 δικαιοσυνη의 ‘의’를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의인 되었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이냐면 재판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그말이다.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노함의 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의인’되었다는 소리이다. 칭의라는 말이다. 이게 하나의 해석의 system이다.

그러나 최근에 독일에서부터 강력히 일어나는 해석방법은 이것(위엣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 penal substitution theory는 하나님을 너무나 헬라적인 벌주기를 좋아하고 또 무슨 제사 바치면 화를 풀어버리는 이런 우상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을 격하시킨 것이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고 그의 백성이 설령 언약에 신실치 못하고 죄를 지어도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지 벌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을 그냥 인간적인 편협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또 ‘의’라는 개념은 이것은 재판적 개념으로는 로마(헬라)적 개념이다. 구약적인 개념으로 ‘의’는 법적인 개념이 아니고 관계론적 개념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하는 것을 ‘의’라고 한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הקדצ에는관계론적 개념으로서 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할 때 그 ‘의’라고 한다. 가령 부자간의 관계에서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사랑할 의무가 주어진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 대해서 의무를 다할 때 아버지는 의롭다. 아들은 이 관계에서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할 때 아들은 의롭다. 이웃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관계에서 나오는 이웃에 대한 의무이다. 이 의무를 다할 때 이웃이 의롭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언약으로 의무를 진 것이다. 언약의 관계가 하나님게 지우는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 스스로 이 언약의 관계로 이스라엘을 부름으로서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는 의무를 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관계에서 나온 의무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의무를 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느때 의로운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할 때 의롭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언약을 지키지 못한다. 언약의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불의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안지키고 하나님 노릇 안해주면 하나님도 불의하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불의하지만 하나님 만은 그 언약에서 나온 의무를 신실히 지킨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는 이런 법정의 개념이 아니라-잘못하는 자를 벌주는 개념이 아니라-그의 언약의 신실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 곧 그의 언약에 신실함은 항상 이스라엘 대한 구원의 형태로 나타나다. 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함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또는 구원의 힘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이 과정에서 애굽의 군사들을 다 홍해에 수장시켜 버렸다. 그것을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냈다고 그런다. 법정개념으로 어떻게 사람을 작뜩 죽인 것이 의로운가? 또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차지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싹쓸이를 해버렸다. 헬라적인 ‘의’개념으로는 객관화되고 추상화된 ‘의’의 개념으로는 불의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냈다고 그런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내서 이방민족들 다 정복하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을 주리라고 한다. 헬라적인 의미로 이방민족을 다 죽인 것이 무슨 ‘의’인가? 그런데 왜 ‘의’라고 그러는가? 이것이 이스라엘(선택한 백성)에게 하나님 노릇해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짓밟는 이방인들을 싹쓸어야 구원할 수있다는 말이다. 즉 언약의 관계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의’라는 것이다. 이 일부의 독일 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학자들은 롬 3:25-26의 결정적인 말씀을 바로 이 카테고리(구약적인 ‘의’-관계론적)로 해석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의 ‘의’가 나타났다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사건이다. 이 소리는 에수가 우리 대신 벌 받았다는 소리가 아니다. 무엇을 전제하냐면 언약의 관계를 인간이 지키지를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불의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언약에 충실해서 우리에게 이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이 ιλαστηριον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즉 언약을 회복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ιλαστηριον을 성전에 있었던 시은석으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시은석은 언약궤 뚜껑 위에 하나님게서 앉아 계셨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좌가 언약궤 뚜껑에 놓였다고 보았다. 이 언약궤 뚜껑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헤가 베풀어졋다고 보았다. 언약궤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파괴해 버려서 하나님과 관계가 절단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해서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한다는 말임. 그래서 언약궤의 뚜껑이 하나님의 어좌로서 이것이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것이다 . 그래서 시은석을 우리 죄를 덮어 버려서(expation)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인간들과 하나님을 다시 한번 회해시킨 사건이다. 그래서 현대의 독일식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의 언약에 신실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와 화해의 수단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의’를 드러냈다. 자기 의는 바로 언약의 신실함 즉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지켜서 우리를 다시한번 그의 은혜의 관계 속으로 회복되게 한 우리를 자기에게 화해시킨 사건이다. 이런 식을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 두 해석 하나는 penal substitution theory해석과 현대 독일 신학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바울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두 요소가 다 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진노함이 계시되었다고 그런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열심히 말한다. 진노를 벌 주는 개념이다. 또 바울은 열심히 최후의 심판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살전 1:10에서 우리가 그의 아들을 하늘로부터 기다린다 그의 아들이 우리를 그의 진노함으로부터 건져낼 것이란 말을 한다. 그러니까 ‘의롭다함’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무죄 석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penal conseat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에게 있어서 관계론적인 개념도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의’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 부분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울 신학이 구원론에 있어서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칭의론이 핵심이다. 그래서 옛날에 조직신학을 한 사람들은 penal substitution theory가 전부인줄 알고 안주해 버렸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penal substitution theory는 부도덕한 걸로 본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 아닌 사람을 죄인 대신에 벌 주느냐? 이것은 부도덕하다고 본다. 특히 영국사람들이 그런다. K.Barth는 영국은 지금까지 펠라기우스 전통이 살아있어 가지고 도덕적 개인주의(개인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책임짐) 때문에 이것은 부도덕하다고 본다. 이런 것은 현대적인 해석에 별 의미가 없다할 망정 이 바울 신학에 자세히 보면 두가지가 다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게 아직도 석연치 않아가지고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의’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어서 책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통정리가 덜 되었다. 그래서 내 책에 두 가지 해석을 다 써놓고 나는 결정못하겠다고 했다. 이 말은 둘다 옳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해석도 옳고 최근에 새로운 통찰력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토론하기 위해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 아니고 많은 학자들은 특히 후자 쪽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롬3:25-26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자기 의를 나타내고 우리 죄를 대속해서 자기와의 화해관계로 환언시킨 의미로 그의 피흘림이 제사이고 그런 의미로 구원의 사건이라는 신앙고백이 많은 학자들은 바울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롬3:25-26은 고전 15:3-5/또 롬1:3-5과는 좀 달리 아까 고전 15:3-5/롬1:3-5은 독선적으로 바울 서신에 있는 모든 것이 바울이 썼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바울 전에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고전 15:3-5에서는 바울이 자신이 인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두곳은 바울 전의 것이라고 다 인정한다. 그런데 롬 3:25-26은 지금도 상당히 많은 소수의 학자들이 바울이 직접 쓴 것이라고 본다. 다수 학자들은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 성경롼에 아무 관계 없는 것이고 차리라 바울 전의 것이라면 보수 신학자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다. 보수 신학자들은 현대 신학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무조건 이단자가 발견했다고 해서 의심하고 들어가는데 바울 전에 교회가 발견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AD32-33년에 되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엄청난 신학이 바울 전에 이루어졌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 직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엄청난 신학적 통찰력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됨을 증명해 준다. 이것이 만약에 바울 전의 것이라면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 보수신학의 이해관계로 따진다면 이것이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더 유익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 멍텅구리들은 이런 소리 하면 이단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불러주고 바울이 썼으니가 바울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울이 써야 했는데 무슨 소리냐? 바울 전에 교회가 하는 것을 바울이 인용했다고 그러면 영감이 좀 떨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바울 전에 교회가 영감받아서 이렇게 신앙고백 했으면 이것이 더 귀중하다.

바울신학 제9강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첫째로 바울이 서신들의 예수에 예수의 가르침을 거의 인용하지 않고 있다. 예수이 말씀이 인용됨직한 곳에도 예수의 말씀들이 거의 인용이 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이 바울 서신에 거의 전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에수의 가르침의 중심 개념 즉 하나님 나라라든지 또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든지 이런 가르침들이 바울 서신에는 거의 안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에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래서 바울과 예수의 관계는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큰 테두리 내에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많은사람들은 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이어받지 않고 인용하지 않느냐? 그래서 극단적으로 Bultmann은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 또는 예수의 역사는 예수가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서 낳았고 살았으며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뿐 역사적 예수의 다른 점들=그의 가르침이라는 그의 행적=가령 하나님 나라 선포라든가 또는 치유,이적이라든지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또 예수이 역사-예수가 어떻게 체포되었고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혔고 또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돕고 어떻게 병자를 치유하고-이런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그래서 Bultmann의 용어로 하면 예수가 살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 그것에만 바울은 관심이 있었다.

이것만으로 바울신학이 충분하다는 것이다.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was)?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에수가 유대인으로 살고 또 율법아래 살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만 바울신학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해서 이것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바울이 무시해버린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Bultmann의 신약신학 책을 보면 처음 에수에 관한 것이 30page밖에 안된다.

그의 책 신약신학이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신약신학의 전제이지 신약신학의 내용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600-700page 되는 그의 신약 신학 책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서는 불과 30여 page로 요약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바울 신학에 있어서 예수가 살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전제로서 이것만 중요하지 예수가 어떤 분이었느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전혀 보고를 하지 않고 반영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전혀 인용하지 않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다. 그래서 이것이 상당히 문제이다.

그러면 바울의 Kerygma가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바울의 케리그마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확보하는가? 바울의 복음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그의 하나님의 죽음의 빛 아래 비춰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유래하지 않으면 이 바울의 복음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불트만에 의해서 바울의 케리그마라는 것이 주로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역사화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고 부활했다는 등등이 다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적용을 해서 역사화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케리그마적 신학이라고 한다. 즉 케리그마를 강조하는 신학을 말한다. 이런 케리그마적 신학이 오늘 한국에서까지 유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 삶의 정황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우리의 문제를 규정을 한다. 그래서 가령 남미에서의 필요는 정치적,경제적 해방이다 라고 규정한다. 그러면 예수는 구원자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need는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고로 예수는 해방자이다. 이런 식으로 신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예수가 우리 죄를 속하는 속죄제사는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여서 죄의 용서를 가져오고 우리와 하나님과 올바른관계를 가져오고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되게 하고 이런 우리의 성경적 카테고리는 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당시 바울의 정황에서는 그런 것이 의미가 있고 communication 하고 다 중요했는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의 삶으 정황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need는 해방이다. 그러면 예수는 구원자이므로 고로 예수는 해방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신학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토착화신학이 다 이렇다. 삶의 정황(context)에서 먼저 문제를 정의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예수는 구원자이다. 고로 예수는 해방자다라는 것이다. 1976년 제네바의 W.C.C. Eccumenical institute에서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자들의 토론이 열렸는데 하루는 거기서 가나 출신 W.C.C. 상당히 높은 고관이 말하기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구원자 이것은 아주 무의미하다’ 는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선교사들이 이런 신학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주입시켜 가지고 아프리카 교회가 그런 무의미한 신앙고백을 자주 되풀이 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사람드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기독론은 어떻게 펼쳐지느냐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민족 해방을 하고 인종 차별 주의자들로부터 해방을 하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과 지금 살아 있는 후손들과 중계하고 또 가물고 기근이 들때에 비르 내리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통적으로 아프리카에서는 종족의 추장이 그런 역할들을 했다고 본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기독론은 예수가 추장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가 추장으로서 무엇을 하느냐? 가물때 비를 가져오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의 영혼과 살아 있는 후손과 중계하고 종족의 삷을 위협하는 제국주의자들과 싸워서 종족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추장이라고 고백을 해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서 그들의 구원의 의미를 미리 정하고 예수가 구원자이므로 고로 예수가 바로 그런 구원자 즉 추장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인도 사람이 일어서 가지고 긴 강연을 한답시고 복잡하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로 강연을 해대는데 그 중에 자신이 아는 소리 몇마디는 이런 것이다. ‘인도 사람들도 죄를 용서하고 초월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고 의롭게 하고 하는 것으로 무의미하다. 인도의 힌두교 즉 범신론에 세뇌되고 이것 밖에 모르는 이들에게 올바른 기독론과 구원론은 예수가 krishna(인도 힌두교의 범신의 환생의 한 형태를 가리킴) 라고해야 한다. 그래서 우주와 합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논지는 인도에서 기독론은 krishnalogy로 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인도의 방갈로에 유명한 에큐메니칼 신학교인 U.T.C라고 있는데 이 학교의 교문 정문에는 십자가에 힌두교의 krishna가 못박혀 있다. 이게 이른바 토착화신학이다. 이것도 kerygma 신학이다. 예수가 추장이다. 예수가 krishna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예수가 민중이다. 남미에서는 예수가 해방자이다. 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적용시킨다. 그래서 70년대 한동안 토착화 신학에 이름하여 유행했던 것이 WCC 써클에서 하는 수련회나 학회 가면 항상 매번 주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의 질문을 이런 식으로 이용한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주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했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니까 너희의 삶의 정황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엘리야,세례요한 이라고 답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식으로 그리고 서양신학(교회의 신학)에서 이 사람들이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라고 고백해 왔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면 가이사랴 빌립보 사람들이 당신을 엘리야라고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네 말로 해보아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중입니다. 추장입니다. 해방자입니다. krishan입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토착화 신앙고백이고 이 세대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신앙고백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예수가 뭐, 뭐다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아무런 근거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런 신앙고백은 미신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를 우리가 믿는 아무런 실제(reality)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들이 신학을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느냐면 신약성경에 특히 바울을 보면 어디 역사적 예수에 근거하냐? 바울 서신에 보아도 하나님 나라는 몇번 나오느냐? 그리고 예수가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한번도 안나온다. 또 예수가 열심히 병자를 치유하고 그러는데 그런게 어디가 있느냐? 바울도 그리스도는 주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몰라가지고 지금까지 이런 칭호들도 헬라 세계에서 온 창조들로 보았다. 그러니까 자기의 이방 선교 지역에서 필요에 따라 그 문화에서 얻은 칭호들을 가지고 예수에게 신앙고백하고 죽을 때에 케리그마로 선포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못할 것 뭐있냐?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왔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를 중요시 다루어야 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들은 예수를 선포했는가? 어덯게 선포자가 선포이 대상이 되었느냐?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사도들은 예수를 선포했다.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하나님이 아버지되심).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이런 것을 규명하는 것이 신약신학 제 1권 촛점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하고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보았을 때 어떻게 사도들의 선포로 다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가? 어떻게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나? 왜 사도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에 집중하게 만드나 하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것이 신약신학 제 1이다. 이중에 혹시 강의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89년도판 가을호 신학지남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관한 논문이 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여기 다룬 문제의 핵심들을 깨달을 수 있다.

지금 이 문제가 큰 문제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하나의 변형으로 또는 한 조각으로 바로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토론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그게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절실하게 토론이 도어야할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데로 바울 서신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그의 가르침이 거의 인용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를 먼저 제기했다. 먼저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복음은 바울전 교회를 중계자로 해서 그들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사역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앞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계시에 근거해서 초대교회의 기독론적 그리고 구원론적 신앙고백과 케리그마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그의 가르침과 행적으로 보았을 때 발생한 것이다.

첫째로 바울의 복음은 초대교회를 매체로 해서 역사적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의 계시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어덯게 일어났는가? 예수의죽음과 부활의 빝 아래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서 발생한것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에서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유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바울은 가령 갈 1:18 같은데서 암시하기를 “베드로와 예수를 직접 알고 예수의 가르침 직접 받고 예수의 목격자인 사도들로부터 예수의 전승을 이어받았음을 암시한다” 갈 1:18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후 3년만에 예루살렘에 갔다. 간 이유는 갈 1:18에 베드로를 방문하기 위해서 갔다고 되어 있다. 거기에 쓰인 동사가 헬라어로 ιστορησαι ετερον 되어 있는데 이 동사는 ‘베드로 알고 지내기 위해서’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베드로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걸 강조하기 위해서 Oxford에서 가르쳤던 신약학자 G.D.Kilpatrick은 다음 주장을 한다. 헬라어로 ιστορησαι κηφαν이 G.D.Kilpatrick에 의하면 ‘심방하기 위해서’‘알고 지내기 위해서’‘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근거에 의하면 바울은 베드로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고 볼 수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가서 주로 무슨 정보를 얻었겠는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Bultmann 은 이 이야기 한데로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으로 살았다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가 어떤 가르침과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불트만과 쌍벽을 이루는 금세기 위대한 신약학자 C.H.Dodd는 말하기를 갈 1:18에 바울은 2주간 동안 베드로를 심방했다. 고 말한다.

그래서 갈 1:18은 바울이 예수의 목격자인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상당히 받았을 것을 암시한다. 특히 베드로의 전승을 받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이다. 마침 마가복음이 신학이 바울 신학과 상당히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암시를 받을 수있는데 베드로와 같은사도를 통해서 바울이 예수의 전승을 받았을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고전 15:3-5을 바울은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전수 받고 또 이말은 랍비들이 그의 선생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한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전수(전승)받고 자기 제자에 그대로 전수(전승)할 때 쓰이는 전문언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랍비용어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바울이 복음을 랍비 언어를 동원해서 전수받고 전승했다고 그러는데 그렇다면 복음의 요약자체가 랍비식의 요약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쓸수가 있다.

그러면 랍비식의 요약은 무엇인가?

이것은 ןמס이라고 한다. 이것은 암기가 중요한 문화 속에는 암기술이 발달한다. 그런데 랍비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암기해야 그대로 전승할 수 있는 것이다(그 당시에는 책이 흔하지 않고 전부 머리 속에 있다) 또 그 당시의 가르침은 그대로 암기시키는데 있었다. 우리 한국 교육인 서당 교육이 그대로 암기시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암기시킨 교육이 아루어져 시험내면 암기한 것ㅁ나 쓴다. 조금 생각하게 해서 쓰는 것은 잘못쓴다. 이런 암기식의 교욱이었을 때는 암기술이 발달을 한다. 그러니까 전체 내용을 줄이고 또 줄이고 줄여서 암기하게 한다. 그래서 내용을 한마디로 간추리는 제목이거나 아니면 이 내용중에 두드러진 개념 하나 딱 말하면 일사처리로 거기에 관련된 것이 다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ןמס이라고 한다. 제목이든지 또는 한 사상을 기술하는 것에 중심 개념이든지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연상력을 빨리 발휘하도록 하는 그런 개념이든지 이런 것을 자주 개발하도록 해서 암기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랍비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 받아가지고 ןמס식으로 암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전 15:3-5에 보면 ①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성경대로 죽었다②그리스도가 장사되었다③사흘만에 성경대로 부활했다④게바와 12제자에게 나타났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 οτι라는 절로 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첫째로 고전 15:1-2에서 “여러분들이 제일 처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선포한 복음을 상기키시겠다”고 그런다. 어떤 말투로 내가 그것을 선포했는가를 상기시키겠다고 그런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가 고린도에서 선포한 복음을 어떤 말투로 선포했는가를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대로 지금 바울이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선포한답시고 이렇게만 하고 끝났겠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 장사되었다.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 그리고 게바에게 나타나고 12제자에게 나타났다고만 하고 말아버렸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그리스도가 어던 분이며 무슨 일을 했기에 또 무슨 가르침을 했기에 어떻게 원수들한테 체포되어서 어떻게 로마사람들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되었는가?

즉 예수의 수난사를 다 말했을 것이다. 이것의 요약이 ןמס이다.

또 어떻게 집 한칸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이분을 그이 추종자들이 장사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아리마대 요셉이 무덤을 빌려주어 가지고 또 어떻게 향유와 모든 장례 재료들을 다 가지고 와서 절차를 밟고 어디 무덤에 묻혔는가 그러니까 고전 15:1-5까지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것을 많이 알았음을 암시한다. 사실은 마가복음 자체가 예수의 수난사를 이루고 있다. 어던 학자가 말하기를 “마가복음은 긴 서론이 붙은 예수의 수난사”라고 한다.

막8:27부터서는 계속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 뿐이다. 예수가 어떻게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고 어떻게 예루살렘 입성해서 성전에서 소란피우고 체포되고 재판받고 처형되었는가가 긴 수난사이다. 그 앞에 것은 서론이다. 왜 예수와 그의 원수들과 conflict가 일어났는가? 수난사 중심으로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말한 복음도 수난사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가 수난받음을 이해될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신 서론이 붙을 수 밖에 없다. 예수가 무슨 가르침을 하고 무엇을 했기에 체포가 되고 죽게 되었는가? 그래서 바울은 복음은 마침 고전 15:1-2에서 랍비식으로 전수받고 전승된 것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고전 15:3-5은 한마디 한마디가 랍비식의 ןמס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 15:3-5의 한마디 한마디는 복음서에 볼 수있는 수난사라든지 장사,부활,나타난 이야기를 더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곧 바울이 편지에는 역사적인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안 썼지만 이런 걸로 살펴보건데 첫째로 적어도 바울 스스로 역사적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해 많이 알았고 둘째 교회 개척하는 상황에서 복음 선포할 때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자세히 설했을 것이다.

둘째로 고후 5:16

불투만은 그의 모든 바울 신학을 바로 이 본문에 근거했다. 불트만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바울이 뭐라고 그러느냐? “보라 우리가 과거에는 육체대로의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를 그렇게 알지 않는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바울이 여기서 부인하는 것은 육신적 그리스도 곧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뒷받침할려고 하는 것은 신앙 없는 짓이다. 선포를 그냥 무조건 믿어야 그것이 신앙이지 그 선포의 역사적 근거를 찾으려는 행위는 믿음없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인 증거가 우리의 신앙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역사적 뒷받침으로 증거하겠는가? 이것은 신앙에 대한 오해이며 왜곡이다. 방루 스스로 여기서 육신적 그리스도,곧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배격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불트만은 자기의 케리그마에만 집중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시를 고후 5:16말로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면 불투만이 구절을 잘 이해했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아주 쉬운 헬라어이다. 불트만은 아주 유명한 헬라어도 능통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못읽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헬라어에 대해서는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대 헬라 고전 작품에도 아주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헬라어를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왜 오해했느냐면 자기 신학적인 전제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자기 신학에 이 성경을 두드려 맞추려다가 미련한 짓을 한 것이다. 문제는 ‘육신대로 κατα σαρκα’ 가 두번 나온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απο του νυν’ ‘우리가 아무도 육신대로 알지 않는다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 ‘전에 그리스도도 육신대로 알았으나 κατα σαρκα εικαι εγνωκαμεν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 ‘이제는 αλλα νυν’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는다 ουκετι γινωσκομεν’ 여기에서 불트만은 κατα σαρκα를 위에 ουδενα와 Χριστον 하고 같이 가는 말로 보았다. 그래서 육신적 그리스도,육신적 그리스도를 알지 않는 걸로 해석했다. 그런데 실제로 κατα σαρκα는 명사형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아니고 동사οιδαμεν εγνωκαμεν를 수식하는 부사구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도 육신적인 방법으로 알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육신적으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안다’는 말을 수식하는 부사구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문장 구조로 그렇지만 의미로도 그렇다.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에 상응하는 말이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 이다. 불트만식으로 한다면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를 육신적 그리스도 그래서 역사적 예수로 해석하고 싶으면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도 역사적인 존재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아무도 육신적인 존재는 우리는 알지 않는다. 말이 되는가? 의미로도 헬라어 문장구조로도 말이 안된다. 우리는 육신이다. 그러니까 κατα σαρκα는 둘다 ‘안다’는 동사에 걸리는 부사로 보아야 한다. 무슨 뜻이냐면 역사적 예수,또는 육신적 예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바울이 여기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적인 척도로, 또는 육신적인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신적인 평가,척도,시각,관점에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육신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부자이면 상적인 척도이면 존경해야 하는 것이고 학위가 많아도 종경한다. 이랬던 것이 다 육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것이다. 부,약식,미모,권력 등 다 육신에 속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육신적인 평가방법,육신적인 가치관,시간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잘났다고 종경하고 어떤 사람은 못났다고 무시하고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뒤부터는 그렇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자로 곧 성령을 받아서 영적인 존재가 된 뒤부터는 영적인 가치관, 시각에서 사람을 평가하지 이 세상 육신적인 평가 방법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심지어 그리스도도 육신적인 세상적인 관점에서 육신적인 가치관으로 척도를 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바울이 여기서 배격하는 그리스도를 육신적인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평가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자기가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 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 전에 ‘자기가 유대교에서 가졌던 메시야 사상,그리스도 사상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앎이다’

이렇게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야를 민족적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로서 이방인들을 다 정복하고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영광을 자유를 번영을 줄 분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이러한 유대교적 메시야관을 육신적으로 그리스도를 앎이라고 지칭히는 것이다. 이것을 배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트만이 고후 5:16에서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근거할려고 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안병욱 교수의 글을 읽으면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안 가지고 배격했다고 고후 5:16을 불트만 식으로 해석하고 인용하면서 그러기에 바울은 민중을 위해 산 예수를 왜곡했다고 바울을 열심히 욕한다. 그런데 불트만이 이렇게 기초적인 헬라어를 몰라가지고 딴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데 그사람들이 몰라서가 아니고 자기들의 신학적인 이해를 위해서 그런다. 그래서 하나님 진리를 왜곡하고 난리를 펴서 한동안 교계를 어지럽히고 오도하고 그런다.

세째로 바울 서신 안에 역사적 예수의 전승이 아나도 없느냐? 얼마 없고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 이 빈약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상과 비교를 해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설교문의 요약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바울의 편지는 곧 설교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편지들의 케리그카 성격과 비슿한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설교를 분석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행전에는 역사적 에수의 가르침이 많이 나오는가? 많이 인용되는가? 사도행전에 있는 설교문에도 안되어 있다.

또 바울 외의 신약의 서신을 베드로 전후서라든지 히브리서라든지 요한 서신등을 보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인용되어 있느냐? 여기에도 안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연설문에 있어서는 상당히 심각하다. 왜? 사도행전을 틀림없이 제 3 복음서의 저자가 썼다. 즉 제 3복음서 저자 누가가 썼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 복음을 저술한 분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철두철미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을 쓰면서 설교문에는 자기가 누가복음에서 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혀 반영하지 않느냐 말이다. 또 마찬가지로 요한일서에도 전혀 반영이 안되어 있다. 또 AD 2세기 중반의 설교인 제2서신 Clement의 저자 D.Clement는 복음서 전승의 내용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 편지인 제 2클레민트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 지금가지 우리가 똑같은 현상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 서신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인용이 안되었다고 해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몰랐다든가 또는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하게 성격이 똑같은데 비록 context가 다르지만 그러니까 1960년대 70년대에는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비판학자들이 그냥 난도질을 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역사성이 없는 1세기 말의 작품으로서 교회의 신앙과 경건성을 북돋으려는 책이고 구원사의 책이지 이것이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의 살교들을 요약하고 초대교회의 성장과정,선교과저을 요약한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으 독일의 Conzelmann, E.Henchen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 이유를 무엇으로 대했냐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바울의 설교라고 요약된 부분이 여러 곳에 있는데 그게 바울의 신학과 다르다. 또 바울의 가르침을 전혀 반영치 않고 있다. 바울의 중심개념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에서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설교의 동행자였다면 바울이 언제 어떤 편지를 썼는가를 기록할 뿐 아니라 그 편지들에 담긴 바울의 가르침도 바울의 설교에서 반영을 해야 될텐데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서신에 대해 일체 언급도 없고 또 바울 서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일체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을 몰랐고 바울 서신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이런 식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데 지금 사도행전의 저자가 분명히 누가복음의 저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의 전승이 안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련의 사실들에서 우리가 사도행전의 기독은 예수의 말씀이 반영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의 전스을 몰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전승을 몰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전승을 많이 써 놓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전승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거나 관심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논리로 사도행전에 바울서신이 인용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 서신을 몰랐거나 바울 서신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바울이 앞에서 이야기한 첫번째 이유 즉 베드로를 알고 지내고 정보를 얻으러 가서 보름 동안 날씨만 이야기하고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베드로로부터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었고 또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하는 것을 보면 당시 랍비 학교의 전승과정을 염두해 두면 바울이 역사적인 예수에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복음 선포할 대 그것들을 많이 인용했을 것이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에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 그 이유는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 바울이 몰라서가 아니고 아마 편지라는 문학장프에 gattung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한 제2의 Clement에 그는 분명히 복음서를 많이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에는 구가가 복음서의 내용을 다 알면서도 설교에는 별고 안스고 있다. 바울서신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흔히 나오지 않는 이유는 편지라는 문제(gattung)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이미 자기가 복음 선포해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앞에 이야기한 고전 15장을 우리가 분석해 보건데 바울이 처음 복음 선포할 때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많이 전수했다. 그 뒤 그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들에게 신학적인 원칙을 적용해서 조언을 한다.

편지가 바로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편지들에는 예수이 가르침과 행적이 많이 인용이 안되었을 것이다는 말이다.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불렀다. 그런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들에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하겠다는 그 약속을 성취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초대장을 발부한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드림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제의(제사의식)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십자가의 대속적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드림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의 성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다. 그래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은 곧 죄인들을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만듦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의 성취이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자연히 설교와 관심이 어디에 집중하겠는가? 약속에 집중하겠는가? 아니면 약속의 성취에 집중하겠는가? 당연히 약속의 성취에 집중할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 나라 선포했다는 것은 쏙 들어가고 그의 죽음이 대속의 새언약 세우는 죽음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 되게 했다. 우리 죄를 속하고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해서 일어날 구원을 향해서 갔다. 그러면 그 구워을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약속을 했다. 초대 교회는 이 약속의 성취를 뒤돌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 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의 성취를 뒤돌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과 새언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그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렇게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더이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데 집중했다. 이것이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 되게함 그리하여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되게 하고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영생을 얻도록 한 사건으로 거기에 집중을 한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으로 필요했지 이것은 계속 되풀이되는게 아니다. 바로 이와같은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에서 우리는 바울이 왜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가르침(하나님 나라)을 더이상 많이 인용하지 앟는가를 설명할 수있다.

둘째로 그러나 구원론이나 기독론 말로 윤리적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주 예수의 가르침으로 주의 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으로 재천명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예수의 가르침이 사실은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재천명이구나 하고 왜 우리가 빨리 감지하지 못하냐면 여기에도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전의 예수의 상황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후 특히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상황과의 차이점에서 똑같은 예수의 가르침의 원칙이 조금 변형되어서 바울 서신에 적용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서신에서 곧장 예수의 가르침을 인식하지 못하나 표면을 조금 열고 자시히 분석하면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주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 예로 롬12:7/살전5:15/벧전3:9 등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오는데 이 세곳(두속의 바울 서신과 한 곳의 베드로 서신)에 서는 같은 형태로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눅6:27/마5:44의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는 같으나 약간 변형되어 나온다. 그러니까 롬,살전,벧전에서 바울과 같은 형태로 나온다. 그러나 이 세곳 모두 예수의 산상수훈과 약간 변형되어서 나오다. 왜 이 변형이 이루어지는가? 복음서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가 회개하라는종말론적인 부름이 표현으로 나타나다. 그러나 서신들에 있어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윤리적 가르침은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종말의 상황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상황 속에서는 아직 종말의 구원이 일어나지 않았다(십자가의 죽음 전). 그래서 이 죄인들에게 종말의 구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나 바울의 상황속에서는 종말의 구원을 덧입은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로 상황이 변하므로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인용하는데 약간 변형해서 인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혼문제도 그렇다. 고전 7:10에 예수의 이론에 관한 가르침이 직접 인용이 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직접 인용된 것은 참으로 드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마 5장,19장에 이혼을 무조건 금했다. 매태의 소위 예외규정에서 간음을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마태의 예외 규정이다. 원래 이혼을 금했다. 그런데 고전 7:10에서 바울은 마태복음이 이혼을 금하는 말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약간 변형해서 적용하느냐? 이혼 안하는 것이 좋은데 만약에 상대방이 불신자라거 이혼하자고 끝까지 주장하면 이혼해도 무방하다고 변형해서 적용한 것이다. 왜? 바울은 지금 헬라적(이방인의 상황) 상황에서 복음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유대인의 공동체 (모세 율법하에 있는 공동체)에서 이혼을 전면 금지한 주님의 가르침의 상황과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헬라 공동체에서 바울이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섞여 사는 사회에서 에수이 이혼의 가르침을 원칙을 적용하되 그 상황의 특수성에 의해서 약간 변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바울 서신들에서 이와 같이 약간 변형된 모양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참 좋은 연구이다. 최근에 이런 연구가 상당히 많다. 이 연구들은 윤리적인 가르침에서 굉장한 많은 성공을 기약한다. 그러나 바울의 중심개념에 있어서 가령 튀빙겐 대학의 조직신학자 E. Jungel의 박사 학위 논문인 ‘바울과 예수’라는 책에서 ‘바울의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의 언어가 전적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해석학적 연속이다’고 본다. 약간 변형된 모습으로 그러나 그 가르침은 신실하게 선포한 것으로 본다. 사실 그렇다. 그래서 바울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알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정신을 아주 신실하게 누구보다도 더 이어받은 분이다.

그래서 A.Schlatter라는 아주 경건한 신약학자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바울이 아니라(바울과 예수가 자꾸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다음 결론 바울이 기독교 창시자라고 한다) 바울이 스스로 주장하듯이 Der Bote Jesus 예수의 심부름 꾼 이었다. 예수의 사도, 예수의 사자, 그래서 예수의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했다. 우리가 바울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정신을 신실하게 전승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신학 제10강

지난 시간에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를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바울의 배경을 살폈고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됐으며 사도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의 사도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에 바울의 복음을 토론하기 시작해서 계시와 전승으로서의 복음을 토론했다. 그것과 관련해서 왜 바울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거의 전혀 인용이 안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점에서 출발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예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울의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바울 신학의 독특한 면들을 살펴 보려고 한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적으로 말하면 독특한 점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형상 기독론이라고 하는데 고후 4:4-6/골1:15/고후3:16-18 등에 나오는 εικουν(image)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라는 아담 기독론과 하나님의 지혜라 하는 지혜 기독론이 나온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과 지혜 기독론을 포함하는 형상 기독론이 바울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보겠지만 형상 기독론과 아담 기독론과 더불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론도 바울의 독특한 신학이다.

이것은 아담 기독론과 관계 있다. 그러니까 기독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독특한 점이 형상 기독론이다. 그러나 가령 지혜 기독론은 바울에게도 나오지만 신약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나온다. 특히 요한복음에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도 조금 강조되어 있다. 또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공유하면서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더 심화된 신학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들 기독론이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더욱 심화됐다.

그래서 아들 기독론에서도 바울 신학의 독특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요한복음과 비슷하다.

또 구원론적으로 바울 신학의 독특성을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의”에 나타남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의 카테고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는 이것이 또한 바울 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다. 신약의 다른 저자에게서 별로 볼수 없는 바울 신학의 독특한 점들이다.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 구원론, 인간론,교회론 등을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주로 바울신학의 독특점을 특히 강조해서 살펴 보겠다 그러나 바울 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만 국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신약의 저자들과 공유하는 점 가운데 이러 독특한 점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둘다 다 살펴보겠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서 토론하고자 한다

. 그런데 지난 학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일부 겹치는 데가 있다. 그러면 ‘바울 기독론’ 해가지고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형상 이런 순서로 전개해 나가겠다.

*바울의 기독론

1.서론

바울은 그의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기독론적으로 정의하는 성경구절은 롬1:2-4/고전1:23/15:3-5/갈1:12-16/고후4:4 등등 이런 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한다. 또 롬1:16에서는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기독론과 구원론은 두개의 분리된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리이다. 기독론은 구원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구원론은 기독론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적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은 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기독론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 구원론이다.

최근에 불트만이나 또 그보다도 더 과격한 H.Braun같은 자는 바울의 진정한 관심은 인간론이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상수이고 기독론은 변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인간론과 인간의 구원을 논하는 구원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은 인간론이 어떻게 설정되고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이 어덯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가변적인 것으로 변수라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화의 이름 하에 또는 토착화의 이름 하에 이런 식의 신학이 많이 전개된다.

그래서 가령 1970년 방콕에서 열릴 WCC 회의에서 “Salvaioin Today”라는 주제로 회의가 열렸다. “오늘 구원이 무엇이냐”를 설정한다. 오늘 인간들이 구하는 구원이 무엇이냐?그리고는 바로 이런 구원을 가져온 분이다 하고 그리스도를 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자유주의 써클레서 전개된다. 가령 남이에서 남미인들이 희구하는 구원이 무엇이냐? 정치적,경제적 해방이다. 이것이 오늘날 남니인들이 희구하는 구원이다. 먼저 남미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을 정의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이러한 구원을 가져오는 분이다고 그리스도를 정의하다. 즉 남미에서는 해방자로 정의한다. 정치적 해방자로 이렇게 구원을 설정한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해방신학이 이른바 민중신학 형태로 나타나는데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무엇이냐? 민중 신학자들에 의하면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자들 집권층,재벌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구원인데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민중의 상징으로서 민중의 해방을 가져오는 분이다. 이런 식으로 기독론이 전개된다. 1976년 WCC Ecumeical intitut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토론이 열렸을 때에 아프리카 WCC대표는 ‘아프리카에서는 그리스도를 추장이라고 고백해야 의미가 있다며 추장 기독론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추장이다고 해야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은 전통적으로 종족인 추장이 구원을 가져왔다. 가물때 비를 오게 하고 병도 고치고 백인의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싸워서 종족을 보존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전통적으로 추장이 하는 것으로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며 바로 그리스도가 그런 추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추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인도의 대표자는 인도의 상황속에서는 그리스도를 Krishan 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한다. Krishan 기독론을 해야 한다고 신학을 전개했다.

이것이 왜 틀렸느냐면 인간론,구원론을 우선하고 보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 신약전체에서 그리고 바울 신학에서 기독론이 중심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의 규명이 우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추궁할 대 비로소 구원론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어떤 인간으로서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게 된다. 그래서 신약 전체 특히 바울 사상에 있어서 기독론이 우선이고 기독론이 중심이다. 그리고 인간론, 구원론은 기독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앞에 이야기한 옳지 않은 신학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그리고 바울 신학에서 신학이 거의 기독론 중심이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들은 전부 기독론적 신앙고백이다.(고전15:3-5/롬1:3-4/3:25-26/4:25/빌2:6-11/골1;15-20 등 등) 무수히 나오는 초대 교회 신앙고백들은 전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즉 그의 인격과 하신 일에 관한 것인데 그것에 인간론적인 적용이 구원론이다 .원래 초대교회 신앙고백은 기독론 중심이다. 그러다가 점차 신앙고백이 두 부분으로 발달한다. 원래는 한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이제 이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으로 발전한다. 가령 고전 8:6 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두분으로 되어 있다. 전치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으며 그를 목표로 존재한다(εκ εις)” 그리스도, 그를 통해서(δια) 만물이 빚어졌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그리스도가 창조의 수단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수단으로 점차 두 member로 발달한다. 그 다음 삼위일체를 즉 성령을 덧붙여서 세 member로 특히 예배언어에 발달한다. 그래서 우리가 축도로 쓰는 고후 13장 끝부분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기독론적인 신앙고백,그 다음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 다음에 성령을 덧붙이는 삼위일체론적으로 발달한다. 이런 것을 보아도 초대교회 그리고 바울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 중심-예수가 그리스도다,예수가 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이라는 신앙고백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했다 등의 기독론 중심에 우선에 그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되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기독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의 인간론적 응용 또는 적용이 구원론이고 기독론에 근거해서 신론,성령론,교회론,종말론이 펼쳐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바울 신학 전체의 기독론 우선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트만이나 H.Braun의 인간론,구원론 우선의 신학이 잘못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신학자들이 현대의 Kerygma 신학과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신학이 많이 틀렸다.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바울은 부활하시고 높임받으신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통해 그의 복음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신학 형성에 있어서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하나의 본질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기독론과 구원론을 공부함에 있어서도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계시의 체험 부활하고 높임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펼쳐가는가를 추구하면 우리는 그의 기독론,구원론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바울은 주로 구약과 유대교, 2차적으로 헬라 종교사가 제공하는 해석의 카테고리들 그리고 언어 수단들을 동원해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계시를 해석해서 나온 것이 바울의 신학이다. 바울의 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이 다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어떻게 구약과 유대교에서 제공하는 해석의 범주들로 해석해가고 펼쳐가는가를 살펴보면 바울 신학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순서를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 체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울 스스로가 주장한다(갈1:12/16). 그러나 그것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보는 신학 전체를 한꺼번에 터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 신학은 점차 발달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구약과 유대교의 해석의 범주들과 언어 수단에 의해서 다메섹 도상의 계시를 해석해감에 따라 점차 발달했고 또 선교의 현장에서-고린도 교회에서 갈라디아 교회-부딪히는 문제 그리고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토론 등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때 받은 복음의 빛 아래 해결해 감에 따라 그의 신학이 발달을 하고 그이 신학이 예리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울 신학의 발달 과정에 있어서 물론 지난번에 우리가 계시로서의 복음과 전승으로서의 바울의 복음을 살펴보았다. 초대교회의 전승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초대교회의 전승을 물려받고 또 선교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사고함에 있어서 바울에게 항상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복음의 계시였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모든 신학은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의 체험에 물들여져 계시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모든 구약과 예수의 전승과 선교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모든 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복음의 계시의 빛 아래 보고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때 한꺼번에 다 나왔다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그의 신학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항상 다메섹 도상의 체험의 빛 아래 보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바울 신학의 모든 요소들이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연결되었다는 의미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게 볼 수 있는 그런 신학이 어느 때쯤 완성되었을 것인가? 대개 연대를 잡아 볼 수 없을 것인가? 아마 예루살렘 사도회의 또는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때 까지는 지금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바울신학의 면모가 확실히 형성되었을 것이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M.Hengel 교수의 중요한 논문중에 “기독론과 신약의 연대”라는 논문이 있다. 원래 독일말로 쓰였는데 최근에 Hengel의 여러 논문에서 묶어 나온 영어판이 있다.

1960년 불트만의 영향으로 신약에 있어서 신앙고백의 발전을 불트만은 두 단계로 보았다. 원래 그의 선생 Muller,W.Bousset 영향으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 이 두단계를 거쳐서 바울과 요한의 신학이 발전했다고 보았다. 유대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다시 올 인자로 그 사람의 아들로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주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헬라 기독교에 와서 헬라인들이 자기들이 종교사에서 나오는 신화들 또는 개념들 또는 카테고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등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영생에 참여한다는 등 또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등 성만찬의 신학은 다 헬라 기독교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들이 다 헬라 기독교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과 요한이 받아서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의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여기 한 단계를 더 넣어가지고 삼 단계로 본다.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 그리고 헬라 유대 기독교 그 다음 헬라 이방인들 기독교 이렇게 3단계를 통해서 신약의 바울과 요한 신학이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F.Hahn, R.H.Huller 등 이들은 이런 식으로 주장했다. 그래 가지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독론적,구원론적 신앙고백의 처음 칭호들,사상들을 헬라 기독교에서 나왔다고 그런다.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는 예수를 다시 오신 인자로만 기다렸다고 그런다. 그러니까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고 그와 연합해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그런 것들은 다 헬라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헬라유대교이다. 그래서 매 단계를 거쳐 가면서 기독교가 완전히 변모해 버렸다. 그렇다면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또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의 근본을 이루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우리 전통 교회의 신앙고백이 주로 바울과 요한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진정한 창시자는 누가 되어버렸느냐? 예수가 아니고 바울이 되어 버렸다. 이 따위 신학이 흥행하던 때에 M.Hengel 교수가 말하기를 “신학적으로 삼 단계로 발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느냐?” 우리가 역사가로서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보고자 해서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생각한다.

①바울이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예수가 AD 30년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면 바울은 32-34년 여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바울이라는 사람이 아주 훈련된 신학자가 초대교회 초창기부터 참여한 것이다. 연대를 정신 바짝 차리고 살펴보자.

②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편지가 다수 의견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전서라고 한다. AD49년 쯤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F.F. Bruce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의견에 의하면 갈라디아서가 제일 먼서 쓰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AD 48년 쯤 기록되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49년도에 열렸다. 그런데 48년 쯤에 세계 전도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48년쯤에 부터 바울 신학을 확실히 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서와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 벌싸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들어 있는 기독론,구원론이 다 들어 있다. 그러니까 바울 신학이 48-49년 쯤 즉 그의 세계 전도 여행 시작 무렵까지는 바울 신학이 거의 지금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30년대에서 48년까지는 18-19년 차이이다. 이 사이에 언제 기독교가 3단계를 거쳐서 발전할 단계가 있어 시간적으로 게다가 처음에 고려한 것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훈련을 받은 신학자로서 아주 초창기부터 했다. 그러면 총창기 기독교 형상이 있어서 바울은 무엇하고 있었느냐? 아라비아에서 묵상만 하고 있었냐? 묵상했어도 신학을 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당에서의 체험 직후부터 형성되어서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까지는 오늘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신학이 거의 다 완성,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나중에 선교의 장에서 문제들 특히 유대주의자들이나 고린도의 성령받았다고 하는 광란주의자들,자유주자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신학이 더욱 예리하게 되고 확실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늦어도 선교 여행 무렵 대개 48-49년 쯤 신학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2.본론

1)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 이런 칭호들은 다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했던 칭호들이다. 진정한 의미로 바울 전의 칭호들이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그리스도를 주로,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핍박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높임 받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선포가 옳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그들의 예수에 대한 칭호-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들을 수용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미,예수의 우리를 위한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서 바울의 특별한 신학적 공헌이 무엇인가? 이것을 살펴보면 유익할 것이다.

W.Kramer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세 칭호들이 신약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느냐? 어떤 구문속에서 쓰이느냐? 어떤 뜻을 나태내도록 쓰이느냐?를 연구한다. 그래서 바울 전 소위 바울전의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쓰이고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이어받아 더 심화시키고 발전시키고 그랬느냐를 따지는 것이 W.Kramer의 “Christ Lord Son of God” 이라는 책이다.

바울 전 단계의 사상은 어디서 어떻게 아느냐? 주로 바울 서신들에 남아 있는 바울이 인용한다고 보는 신앙 고백들을 살펴봄으로 안다. 가령 대부분의 학자들은 빌 2:6-11까지를 바울전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이어받았다고 그래서 인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안본다. 또 롬 1:3-4에 확실히 바울전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롬3:24-26까지도 바울 전의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것들을 살펴봄으로서 바울 전단계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고백되었고 그것을 바울이 이어받아서 어떻게 더 발전시키고 심화시켰는가? 또 M.Hengel의 좋은 연구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와 더불어 우리가 특기할만한 것은 바울 전 단계에서 벌써 소위 interpretatio christiana(그리스도적 해석)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야임이 드러나자 예수의 유대 추종자들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들을 예수에게 다 적용했느냐? 많은 사람들은 다 적용한 것으로 말한다. 그래가지고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니까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했다면 그들은 예수에게 구약과 유대교의 다양한 메시야 사상을 다 예수에게 적용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니냐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신약성경에 그려진 예수 그리고 신약성경의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메시야 예수가 당시 묵시문학의 메시야 사상과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당시 민속 메시야 사상은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 아주 다양한 소위 연결되지 않는 복잡한 메시야 사상이 있었는데 그래도 주된 메시야 사상이 민속 메시야 사상(frek medio iunism) 이다. 삼하7:12-16에서 나오는 나단의 예언에서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아들인 다윗 왕조를 재건할 군사적 정복자요, 정치적 왕을 메시야로 보았다. 이것이 주된 메시야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 신약성경에 예수를 메시야라고 초대교회에서 주장을 하나 예수를 전혀 그런 식으로 그리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 W.Wrede 그후 Bultmann 같은 사람도 신약성경에 있어서 공관복음에 있어서 예수는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는 다르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고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붉구하고 교회는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던 역사적 진실과 그를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역사적 사실과 신앙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가가 이른바 복음이라는 것을 써서 예수가 메시야였다. 그래서 그의 메시야 됨이 초자연적인 존재들에게는 다 이해되고 악령들도 이해했고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도 대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됨을 비밀로 소문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마가가 이야기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소설이다. fiction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였나? 그럼데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야됨이 안 알려지고 비밀에 쌓여 있었나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른바 메시야 비밀이라는 이론이 W.Wrede에 의해 처음 나온 것이고 마가복음이 이 메시야 비밀을 중심으로 하는 소설이고 다른 복음서도 이어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불트만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것이 다 어디서 시작하느냐면 예수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또 신약성경에 선포된 예수의 사상이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무슨 전제인가? 예수가 메시야라면 예수에게 구약과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이 완전히 전가되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게 아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구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그래서 우리 신약신학 1에서 그것을 쭉 살펴보았다. 어떻게 예수가 유대교의 당시 주된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을 이렇게 정치적 군사적 왕으로서가 아니고 이사야 42장부터 53장까지 예언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성취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다니엘 7장에서 예언된 인자,그 사람의 아들 역할을 감당함으로 성취하는가? 이렇게 예수는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의 text를 당시 유대교 묵시문학의 해석과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과 흔적은 처음부터 끝가지 그의 메시야됨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당시 구약의 메시야 text를 예수와 달리 해석한 유대교 사상에 찌들은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 그러나 예수가 정치적 왕으로 주장하는 자로 곧 가이사에게 맞선 반역한 자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다가 예수가 부활했다 . 이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한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예수의 주장, 가르침이 옳다고 확인된 것이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유대교에서 해석한대로의 메시야는 아니지만 은근히 메시야라고 주장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가 옳다고 인정하셨다. 그의 메시야 주장만 옳은게 아니고 그의 구약의 메시야 text에 대한 해석이 옳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메시야의 행위가 유대교에서 기다리는 정치적 군사적 정복과 혁명과 다윗 왕조의 재건함이 아니고 대속의 제사로 스스로를 바쳐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이사어 42장에서 53장에 의거해서 메시야적인 과업으로 보았다. 바로 그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옳았고 예수가 그 메시야적 임무를 감당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예수가 자신이 어떤 메시야인가를 가르쳤다. 이사야 42장 53장의 보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함으로서 그리고 다니엘 7장의 예언을 감당함으로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로 가르쳤다.-과 가르침이 긴가민가 했다. 왜?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유다 같은 배신자가 나타났고 결국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가버렸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하심으로 예수가 메시야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는 무슨 깨달음이 왔느냐? 그것은 예수가 메시야이다. 그런데 유대 메시야 사상은 틀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메시야 사상을 옳다고 인정했으니까 그래서 초대 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했다. 헬라말로 하면 χριστος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에 있어서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더이상 유대교적인 사상을 내용으로 채운 것이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과 하신 일로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의 내용을 채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What Jesus was(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 그리고 “What Jesus did(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 가 예수가 메시야라 그리스도라 할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야가 뭐라고 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inter pretatio christiana(그리스도적 해석)이라고 그러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선포할 때 그 메시야 사상이 일부 유대교 메시야 사상과 겹친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초대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할 때 그 내용을 예수가 어떤 분이었으며 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 그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메시야됨의 내용이다. 예수의 메시야적 과업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할 때 무슨 일을 감당한 자로 말하는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므로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로 메시야는 구원자이다. 즉 정치적 해방을 가져오는 분이 아니고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분이다. 어덯게 해서 이러한 새로운 메시야 사상이 나왔느냐면 바로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왔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메시야 사상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예수가 어떤 분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가 예수의 메시야됨의 내용이다. 이런 것을 inter pretatio christiana라고 한다.

이건 아주 기초신학적인 ABC에 해당하는데 신학을 몇십년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몰라 가지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지난번 살펴본 고린도 후서 5:16같은 ‘위대한 천명’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민족적 해방자로 정치적 왕으로 알았다. 그것을 바울이 육신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한 메시야 사상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깨달았으냐면 그런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가 하신 일이 진짜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이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것이고 바로 예수가 그런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분이기에 그분이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것을 좀 정리하면 “에수는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일 제사로 바치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단7:13에 인자로서 그리고 삼하 7:12 나단의 예언에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메시야 과업으로 보았다. 그러한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되자 초대교회는 그의 추종자들은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가 정의한 그의 메시야적 과업을 감당한 사건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가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을 스스로를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로 바친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자기의 메시야로서의 과업이다. 다윗의 아들로서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인 과업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자 부활의 빛 아래 봤을 때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그러한 메시야의 과업을 감당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바로 메시야다. 예수가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분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초대교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라는 선포는 그러므로 예수 안에 또는 그의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 바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은 항상 그의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과 부활로 정의한다. 그래서 이른바 πιστις-formula(믿음의 형식)이 형성된 것이다. to believe that christ did(혹은 was juised) for us(our sins)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복음이다. 이때 항상 쓰는 칭호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분,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쓰인다. 그것이 메시야적 그리스도적 행위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이 복음이다.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킴 받은 분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구원을 담당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 믿음과 선포의 내용이다. 그래서 πιστις-formula의 양식이 뭐냐면 to believe in Christ 그리스도를 믿는다. 또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바울이 고전 1:18에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냐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전체 약자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기술한 약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음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십자가에 스스로를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바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소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이것은 유대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메시야 사상하고 판이하다. 그러나 오묘하게도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적 행위의 빛 아래 구약의 예언들을 다시 보면 예수의 구약 해석이 훨씬 더 옳았다. 구약의 메시야적 사상을 진정으로 성취한 것이다.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에서 유대묵시문학적 메시야 사상이 나오고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나오는데 다르다. 그러나 뿌리는 같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리스도의 행위를 체험하고 보았더니 에수의 가르침이 옳았다.

바울신학 제11강

전 시간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살펴 보았다. 바로 이와 같은 interpretatio Christian 에다가 초대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를 항상 예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썼다.

사실은 εστιν(be 동사)가 Ιησους와 χριστος 사이에 생략되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썼다.

어떤 예수를 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가 정의한 대로 그리스도를 말한다. 이 신앙고백이 또는 이렇게 되는 하나님이 이름이 되어 버렸다.

특히 메시야란 말을 헬라 문자 그대로 원어에 의하면 Χριστος라는 말이 Χριω라는 ‘기름 부음을 받는다’ 동사에서 나온 말로써 헬라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구약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종으로 위임한다’는 표시로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그런 구약적인 종교사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 χριω 로부터 나온 Χριστος란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점차 헬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란 말이 예수의 두번재 이름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원래 칭호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씩 그리스도와 예수의 제2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면서도 칭호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또 하나의 칭호가 같이 오는 법이 없다. 주라는 칭호와 주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같이 오지 않는다. 항상 다른 기독론적 칭호와 그리스도의 칭호를 쓰려면 그 가운데 예수란 이름이 함께 온다. 또는 우리를 낀다. 그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라든가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주이다’ 항상 ‘우리’란 말씀,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또 하나의 기독론적 칭호들과 같이 막바로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면 서로 정립이 안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우리 주라는 말이다. 그래서 χριστος 우리 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두개의 칭호를 한꺼번에 겹쳐 쓰지 않고 그렇게 해서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이름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칭호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칭호와 다른 기독론적 칭호들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N.T.에 예수의 칭호가 여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예:인자,말씀,문,왕….) 영국의 신학자 V.Taylor “N.T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들”이란 책을 썼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어디서 사용되느냐 하면 믿음이 형식 쓰인다. 그래서 믿음과 선포라는 말이 늘 같이 나온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관계해서 쓰고 있다. 앞으로 생각해보겠지만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고 말하며 또는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혹은 메시야적 사건.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서 그리스도라 칭호가 쓰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선포를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항상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고 믿는다는 말과 선포한다는 동사는 그리스도라는 함께 쓰였는데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다른 칭호가 무엇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가장 기본된 칭호이고 곧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고 그리하여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사를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가 가장 기본된 칭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자이라는 뜻이고 구약과 연관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구약의 구원사와 연관된 칭호이다. 다른 기독론적 칭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됨의 다양한 면들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칭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기독론적 칭호-즉 하나님의 아들,인자,아담,지혜 등-들을 예수의 그리스도 됨의 여러 측면들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론 칭호들 중 그리스도가 가장 기본이다. 다른 기독론 칭호의 기능은 예수의 그리스도됨의 여러 면들을 부각시키는 칭호라는 말이다

*예수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 어떻게 발생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고도서 O.Cullman “신약의 기독론”-‘주’칭호 부분

H.Marshall “Origiens of N.T Christis the”

page 97-110까지 The Origins of New Testament Christalogy

W.Kramer 영문판 page 65-107,152-182 “Christ,Lord,Son of God”

W.Bousset “Ktruos Christos”

F.Hahn “Christologishe Hoheistitel”

1.배경

1)헬라 사상 속에서 κυριος의 의미

헬라의 세속적 언어에서 κυριος말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또는 재산을 많이 가졌거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부름이 형식이었다. 영어식으로 한다면 Sir master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종교적 사용법에서 신들에 대해서도 쓰였는데 이집트나 시리아나 소아시아에 퍼졌던 신비종교들의 신들에게 썼다. serapis osiris mithra,isis 이런 여신들과 남신들에게 쓰였는데 여신들에게는 그것의 여성형인 κυρια로 썼다. 남신들에게는 κυριος로 부르고 이런 신들을 숭배하는 신봉하는 자신들을 δουλος δουλοσια(종) 이라고 사용했다.

정치적인 사용법에 있어서 통치자를 κυριος라고 불렀고 특별히 로마 제국의 동반구에서는 벌써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사상이 벌써 1세기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신들로서의 로마 황제들을 κυριος라고 썼다.

유대교적인 배경으로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된 M.T 구약성경의 הוהי를 유대인들이 거룩한 이름을 죄악스런 입술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에 나올때마다 הוהי발음하지 않고 נדא(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주’라는 뜻이다. 이런 관습에 따라서 LXX가 번역되었는데 הוהי를 항상 κυριος로 번역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LXX의 관례에 따라 야훼라는 말이 나오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항상 κυριος로 번역했다. 이런 증거들을 우리가 볼 때 신약시대에 헬라어를 보는 diaspora유대인이 הוהי 하나님을 κυριος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배경에서 ארמ가 헬라어의 κυριος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말이었다. 원래 세속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언어인데 선생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에게 쓰는 경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의 호격이 ירמ ‘나의 주’아도나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ארמ라는 말이 하나님을 부를때로 썼고 지체높은 인간을 부를 때도 사용되었다. 지체 높은 사람을 부를 때는 영어의 Sir ,master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 사해문서 11Qtg(11번째 쿰란에서 나온 표제의 아람어 사본) 욥 24:5-7에 보면 ירמ 절대형으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헬라어 κυριος와 마찬가지고 아도나이의 절대형인 히브리어로 ןידא과 아람어 רמ(마라,마레)로 쓰인다. 원래 일반적으로 높은 사람은 경칭언어로 쓰여서 점차 신에게도 썼던 말이다. 결국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말로 쓰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릴 수있다. 지금까지는 언어적 배경을 말했다.

2.예수가 주라는 칭호

신약신학 1 ‘간접 기독론’에서 무엇을 다루느냐면 ‘예수의 절대적 권위 주장(독어로는Vollmachtsanspruch,영어로는 claim to Authority’이다.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행적,가르침을 통해서 예수가 간접적으로 자기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이것을 공관복음서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가령 예수의 독특한 말 버릇 두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①아멘이다. 우리는 보통 아멘을 맨 끝에 쓴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 끝에, 기도 끝에, 하나님의 찬양 끝에 사용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요 진실이다. 신실하다고 발음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의지의 표시임을 나타내면서 아멘 했다. 그런데 유대인도 우리와 같이 썼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 후에 기도후에 찬양 끝에 ‘아멘’하고 응답하는 것이었다. ]

그런데 예수는 그와 정반대로 사용했다. 항상 ‘아멘’을 쓰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하고 중요한 말씀을 선포할 때 이렇게 아멘을 거꾸로 썼다. 이것이 이런 용법은 예수의 전에도 없었고 당시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이렇게 말버릇을 정확히 고찰하면 예수가 어떤 자기 이해를 나타냈는가를 헤아릴 수가 있다. 이런 독특한 예수의 말버릇을 또는 가르침,행적을 독특한 것으로 살펴보아서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하고 ‘예수의 권위 주장’하는 것을 간접 기독론이라고 한다. 우선 아멘의 사용법을 알기 위해서는 형식면에서는 비슷한 선지자들의 선포형식,구약에서 선포형식이 어떻게 되는가? 구약에서 선지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 ‘여호와가 말씀하신다’‘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했다’고 말하는데 선지자의 이런 서문은 무슨 의도로 말하고 있는가?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인 권위,자기 말이 아니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청중들의 관심을 인간인 자기에게 돌려서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기 위해 자기가 선포하는 선지자적 메시지의 신적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도 중요한 말씀이 서문을 다셨다. 그런데 서문을 다는 그 점에 있어선 비슷한데 그 의도는 정반대이다. 선지자는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하나니께 돌리고 하나님이 자기 말씀에 진지됨을 보장하게 하신 것이지만 예수는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셨다. 누가 말하냐면 하나님이 말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로 말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됨을 아멘성을 말하지만 예수는 누가 증명하는가? 내가! 예수는 자기가 선포한 말씀에 아멘해요. 우리 나라 번역에 진실로 내가 말하노니 진실로란 말이 원래는 아멘이에요. 헬라어로 쓰여진 우리 신약성경에 히브리말 아멘이 그냥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번역하면 안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예수가 어떠한 자기이해를 나타내느냐면 우선 선지자와 비교할때 선지자를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선지자가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자라고 하며 자기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자란 말이다.

자기 말의 진리성, 권위 있음을 자기 자신이 아멘 함으로 자기가 보장한다. 아멘이란 이와 같은 용법에는 예수의 신적 자기 이해, 권위를 포함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자라고 권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격이다. 쉴리어란 신학자가 킷텔 사전에 썼다. 이 신약학자는 아멘이란 한 마디에 신약 기독론 전체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멘이란 이 한 마디에 우리의 예수에 대한 모든 신앙고백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아멘은 예수의 신적인 자기 권위 주장이다.

또하나의 예수의 독특한 말씨는 아빠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아빠라 하지 않았다.

②언약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언약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구약의 중요한 사상이다. 출4:22 이하에서부터 줄곧 나오는 중요한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아비가 아들을 돌보듯이 돌본다는 사상이 구약성경에 들어 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문서에서 특히 하나님에 대한 칭호들을 많이 발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예가 기도문서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아빠란 말은 원래 집에서 어린 아이가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우리 나라 아빠와 같다. 다만 다르다면 조금 확대해서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친구나 아주 친근한 선생님에게 도 사용했다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라고도 불렀다. 아빠란 말의 원래 의미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친근감,경외심,신뢰심,전적으로 의뢰함 그리고 순종심을 다포함해서 나타내는 말이 아빠였다. 아빠란 말을 감히 하나님께 쓴다는 것은 경망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란 언약사상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수께선 하나님을 아빠라 불렀다. 기도 가운데도 항상 아빠라 불렀다. 그러니까 아빠란 말속에도 독특한 의미가 있었다. (아멘이란 말처럼)

아멘이란 말속에 독특한 자기이해가 숨어 있듯이 아빠란 말도 그렇다. 그런데 예수 자신만 이 말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서도 아빠로 시작한다. 그래서 이게 예수의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심지어 바울도 헬라 말을 쓰는 로마 그리스도인,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때 하나님을 아빠 하고 그 옆에 아버지 하고 번역을 한다. (롬8:16/갈4:6). 이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 귀중한 가르침, 심지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헬라말을 쓰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하나님의 자녀 되어 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이시기에 심지어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사용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독특한 점은 또한 자기와 제자들을 구분했다. 하나님 우리 아빠라 하지 않고 아빠란 말 사용하는데 하나님 나의 아빠 너희들의 아빠라고 구분했다. 자기와 제자들을 아빠란 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구분했다.

더불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하면 이러한 세가지의 현상을 관찰하는데 아빠란 말과 예수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추종자들에게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됨,곧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있는 특권을 마련해 주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했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는 자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또 예수의 권위주장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예수의 죄를 사해주는 권위를 주장하는데 나타난다. 가령 막2:1-12까지 보면 예수가 중풍병 든자에게 “소자여 네 죄가 사하여 졌다” 거기에 앉아 있는 신학자들이 참람하다. 즉 하나님을 신성모독했다.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 용서는 하나님의 독특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죄 용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심판관이며 하나님만이 창조주이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그의 피조물이 그의 창조의 뜻에 옳게 살았나 옳게 살지 않았나 하나님만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기에 그만이 궁극적인 심판관이고 그가 궁극적인 심판관이기 때문에 그만이 죄를 용서해주실 수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예수가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를 주장한다. 물론 유대의 유대종교의 틀안에서는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회개와 속죄의 제사에 근거해서 그런 제사를 받친 자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선언했다. 그런데 예수는 대제사장도 아니고 성전의 무슨 제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아무 그런 것과 관계 없이 죄용서를 선언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하나님의 대권을 침범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 했냐면 막2:10에 인자가 땅위에서 죄사함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인자로서 권위를 어디서 받느냐면 단7:14에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 곧 인자에게 하나님께서 권세와 영광과 왕권을 위임한다. 인자가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한다. (죄용서 하는 권위다) 곧 신적 권위위 주장을 한다.

또 어디서 예수의 권위 주장이 나타나냐면 모세율법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데 산상 수훈의 반대 어법.

마5:17,19,21 읽어보면 거기에 “너희가 옛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무시하고 욕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로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너희가 옛사람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의 마음에 이미 간음ㅎ나 것이다.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반대 어법이다. 실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십계명이다. 모세 율법의 총정리가 십계명이다. 그런데 예수가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는 행위,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행위,이것은 행위의 최소한을 규제하는 계명이다. 형제의 목을 치거나 간음행위 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수의 법은 행위이전의 마음의 상태,심장에서의 동기를 규제하는 것이다. 이것을 동기의 최대한 행위의 최소한 그러니까 자기가 이러한 말투로서 모세와 예수 자신을 비교 대조 시킨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그 내용으로 예수가 모세를 능가하는 행위의 최소한 만을 규제하는 모세의 법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동시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완전한 법을 선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세를 능가하는 것을 나타내고 이제는 아멘의 말버릇에서 선지자를 능가하는 여기서 모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법에 계시자라. 그러니까 모세보다 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법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계시하는 자라. 자기 이해를 나타낸다.

내가 모세보다 잘났다고 직설법으로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모세보다 훨씬 잘낫다 이말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틀 안에서 모세보다 더 능가하는 자가 없다. 모세 다음은 하나님이다(유대교 안에서).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의 밑에 있다. 모든 선지자들과 랍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메시야도. 왜냐하면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 모세가 품꾼이다. 신18:25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 탈굼 사53장의 탈굼판에 보면 메시야가 모세 율법을 잘 가르쳐서 백성으로 하여금 의롭게 하는 자이다. 모세 율법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러니까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그런데 예수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예수가 모세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자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오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기와의 관계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못들어가고 하는 걸로 표시한다.그러니까 예수가 인긴의 운명의 결정자라고 스스로를 지금 자기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오는 분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킨 분으로 인간이 그와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혹은 못들어가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엄청난 권위 주장을 했다. 그를 믿고 이런 엄청난 권위 주장을 하는 예수를 제자들이 따라 다니면서 그 주장에 걸맞게 부르려면 어떻게 불러야 겠어요? 주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것과 동의어인 랍비란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래서 주여란 뜻도 되고 선생이라고 제자들이 보통 불렀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3개의 예수의 말씀 가운데 ‘주’라는 칭호가 지금 보통 아람아로 사람들의 지체높은 자에게 권위있는 사람들에게 썼던 랍비 이상으로 더 의미 있게 쓰여진 경우가 다음과 같은 3개가 있다.

①막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가 입성할 때에 그 제자들에게 가서 당나귀 하나를 붙들어 오라고 하는데 그 사람에게 가서 어디 가면 당나귀가 메어 있느냐? 당나귀를 풀어 오라. 누가 말을 하면 왜 그것을 풀어가느냐 하면 “주께서 쓰기겠다 하라” 이것이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성경마다 구구절절 기적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여기도 기적으로 보고 예수가 어디에 나귀가 묶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와 당나귀 주인과의 비밀이 약속이 되어 있다. 어느 곳에 나귀를 만들어 놓고 예수가 제자들을 보내어 주면 왜 가져가느냐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예수가 보낸 것으로 비밀리에 이루어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루어졌다. 예수가 아주 위험한 상황속에 입성하고 있다. 모든 일은 비밀리에 예수의 최후의 만찬고 비밀리에 예약되어 있다. 그런 상황이다. 여기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이 주라 말은아마 ‘마리ירמ’보다 좀더 깊은 의미가 있지 않느냐?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 스가랴 9장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은 그러니까 적어도 메시야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②막12:35-37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시비이다. 왜 서기관들이 유대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왜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나단의 예언(삼하7:12) 나오는 메시야 전승에 의하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다. 예수가 거기에 시비를 건다. 왜 메시야가 하나님의 이들이라고 하느냐? 시110:1절에 다윗이 메시야를 무엇이라고 부르냐면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보다 낮은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고 시편 110;1절을 들어서 당시 주된 메시야 사상을 예수가 시비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이라고 아직도 주석가들의 논란이 많다. 여기서 예수가 당시 메시야 사상을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윗의 아들됨을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윗의 아들됨이 부족하다는 것이냐? 메시야를 그는 인간적인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과 같은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과 같이 이방인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태평성대를 가져올 분, 그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힘받은 자로서 만유의 주제,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시비하는 것이냐?여러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하여간 여기서 시 110:1절을 인용해서 다윗의 아들에 대한 대칭해서 ‘주’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다윗보다 권위 있는 하나님보다 더 높임 받은 인자로서 그의 ‘주’됨을 나타낸다. 은근히 예수가 다윗왕쪽보다 더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 받은(시110:1) 주 되심을 은근히 말한다.

③눅6:46을 읽어보라

제자들이 예수를 랍비,마리라고 이렇게 불렀다. 그러면서도 시편 110:1절의 말은 숭종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왜 주여 주여 하면서 내가 가르치는 것을 듣지 않느냐?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제자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의 ‘주’도 인간적인 스승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간접 기독론을 통해서 ‘주’라는 칭호의 의미있는 사용으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을 최소한대로 예수를 마리 또는 랍비 나의 주여 정도로 최소한도로 그 정도로 밖에 표시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정도로는 표시해야 했다. 그래서 그에게 완전한 순종을 했었다.

그러면 예수가 κυριος라는 신앙고백을 어떻게 발생했느냐?

W.Bousset가 그의 책 ‘크리스토스 큐리오사’란 책에서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지금 온 우주를 통치하는 ‘주’라는 신앙고백을 제일 처음 안디옥에서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예 종교에 간섭대로 예수를 예배하는 체험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원래 팔레스틴의 유대교에는 예수를 재림하는 인자로 기다리는 것을 그들의 신앙의 내용으로 삼았으나 안디옥에서 헬라 기독교인들이 비로서 예수를 예배하게 되고 예배 대상으로서 신격화된 예수에게 자기들의 옛 종교를 이시스 등의 신비종교애서 신을 κυριος라 했듯이 이제 기독교에서 예수에게 예배하면서 예수를 κυριος라고 부르면서 그가 지금 주권을 행사하는 자라 믿고 고백하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은 현대 20세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신약 기독론 이해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됐다. 불트만에 의해서 완전히 수용이 되었고 크라머 한은 계속해서 부셑의 이론을 약간씩 변형해서 계속 개진하고 있다. 바로 이점을 명백한 오류로 지적하고 길게 설명하는 것이 오스카 쿨만의 신약기독론에 잘 서술되어 있다.

이 헬라 사람들이 κυριος란 말을 신에게 적용하고 헬라 유대인들이 구약의 야웨를 κυριος로 번역하여 부른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κυριος로의 신앙고백의 언어적인 면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언어적으로 헬라인들이 신을 κυριος라고 부르고 헬라 유대인들이 야웨를 κυριος라고 부른 것이 신약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κυριος라고 고백함이 언어적으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헬라 기독교에서 예수를 κυριος라 지칭하는게 점점 더 많아졌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주’라는 사실은 부셑이 말한대로 헬라인들에 의해서 안디옥에서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에서 아람 말을 쓰는 예수의 유대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의 부활 직후 발생한 것이다. 그걸 이제 좀 증명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에 대한 예배가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이 된 것이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예수의 부활 직후에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을 쿨란의 책에서 잘 보여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자 제자들이 흩어지고 예수가 부활하여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그들을 다시 모았다.(그날이 안식일 다음날). 그날 그들은 예수의 최후이 만찬을 기념하여 떡을 뗐다. 그때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여 있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시고 높임받은 ‘주’로 스스로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렇게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부활에서 나타난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그날 모여서 ‘주’로 최후의 만찬을 되풀이 함으로서 최후의 만찬으로 말미암아 절정에 달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fellowship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에 대한 에배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그 예배에서 안식일 다음날 주의 날에 그들에게 항상 잔치를 베풀었던 최후의 만찬에 절정에 이르렀던 잔치를 베풀었던 부활하신 영적으로 자기들과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서 부활하신 영광 받으신 분으로 나타나서 그들과 새롭게 교제를 하는 주와 더불어 만찬을 하는 그 체험에서 초대교회가 안식일 다음 주일날 바로 부활해서 나타난 주를 기념해서 (그가 실제가 되게 그들의 체험속에 실제가 되어 나타나게 하는 그런 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부활이 나타난 날 또 그날을 기념하는 날 주의 날이라고 하고 그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예배하는 날로 정하고 그때에 나누는 최후의 만찬을 주의 만찬이라 그래서 첫째로 예수에 대한 예배중 κυριος라는 칭호는 부활과 예배와 관계된 것이 사실ㅇ니데 예배가 안디옥에서 헬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고 헬라 종교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예수의 부호라에서 그들에게 높임 받은 자로 나타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헬라 종교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제의,만찬과 더불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의해서 절정에 이르렀던 그의 제자들과의 fellowship이 부활한 예수와 더불어 새로와짐에 의해서 생겼다는 것이다.

둘째로 고전 16:22 “μαραναθα” 라는 말이 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μαραναθα라는 아람어로 썼는데 아주 중요한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어디에서 끊느냐가 중요하다. 그 정신을 존중해서 우리 신약성경에도 그렇게 써야 하는데 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번역했다. 그것은 틀렸다.

μαραν/α/θα

① ②

①서술어:주께서 오셨다(한글개역)

또는 주께서 오신다. 이렇게 되면 신앙고백이 된다.

②기독형식으로 ‘주여! 오소서’ 라는 기도가 된다.

그러면 어떤 것이 맞는가?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μαρανα/θα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주여! 오소서’라고 읽어야 한다. 그의 증거는 요한계시록에 ‘아멘 주여! 오소서’라고 끝난다. 그리고 또한 디다케라는 책 10장에 성만찬에 바로 “마라나타” 기도로 나온다. 그래서 요한계시록과 디다케에서 ‘주여 오소서’라는 기도가 초대교회의 중요한 기도였다.

사실을 알며 주의 재림,성령으로 예배에 오심을 부르는 한편으로 종말론적 기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반론적으로 우리 신약 성경에서 신앙고백을 ‘주’로 번역이 되었다. 대개 예수가 우리 주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였다는 번역이 되었다. 그러나 기도문이나 예배의식의 말은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되었다. 아빠도 기도때에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마라나타’가 기도문이기 때문에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를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종말이 오는 심판 주로 보았으며 예배시에 주로 오셔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으로 인식하였다. 영국의 A.J.Rawlinson 사람이 바로 ‘마라나타’가 W.Bousset의 이론을 반박하는 아킬레스건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느냐하면 원래 예수의 생전에 그의 절대적 권위 주장에 상응해서 그를 mare 또는 rabbi라고 불렀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하시고 높힘 받은 형체로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내심을 보고 그를 한 차원 높게 더 심오한 의미로 그를 ‘주’라고 부르며 떡을 떼는 fellowship을 중심하는 예배에서 부활하셔서 나타난 ‘주 예수’ 그의 현재적 주권의 행사를 체험하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가 절대적 의미로 신적 의미로 κυριος라는 신앙고백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Bousset나 Bultmann의 이론이 정면으로 반박되고 ‘예수가 주다’ 는 신앙고백은 생전의 예수의 절대주장과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곧장 팔레스틴 그리스도인에게서 생긴 사건이다.

바울신학 12강

지금까지 ‘예수가 주다’는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살핌.

이 신앙고백의 의미 살핌 אר אנרמ 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기도이다. 주여 오셔서 빨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소서.

동시에 이 기도는 Didache 10:6(1세기의 책,12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에서 예배 특히 성만찬을 중심으로 한 예배에서의 기도이다. 마18:20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약속(유대인에게 하나의 회당이 하나의 예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남자 10명이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집단의 최소단위 두세 사람이면 예배공동체가 됨.)

그 약속에 근거해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에게 특히 주의 만찬에서 fellowship을 기념하는 그 모임에 부활하셔서 나타나셔서 그 교제를 갱신하셨듯이 지금 우리 가운데 주로 오셔서 만찬 테이블에 주석을 차지하소서. 그래서 계 3:20에 쓰여진 그 말씀을 체험하게 하소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배 때에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주와 더불어 나누는 만찬을 성만찬이라 주의 만찬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중요한 의미 하나를 발견케 된다. 예배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교제, 잔치의 현재적 실현이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현재적 선취.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잔치라고 즐겨 표현,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 종말에 참여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미리 체험되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때 오시는 주는 종말에 재림할 주의 또는 종말에 주로서 재림함의 선취이다. 즉 예배때 주의 오심은 종말의 현재적 선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파루시아 하시는데 지금 벌써 현재 예배때 파루시아 한다. 우리와 함께 임한다. 이래서 우리 주 예수의 주권을 지금 예배 통해 체험할 수 있는데 예배 통해 체험하는 그의 주권이 오실 주에 대한 기다림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볼때 마라나타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①주라는 칭호는 부활하시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이다.

②이 주라는 칭호가 쓰는 두가지 context 상황은 예배와 종말론적인 소망이다. 이제 보겠지만 하나 더 있는데 예수의 현재적인 통치. ‘예수가 주이다’는 신앙고백의 의미 두번째.

(2)이 신앙고백과 더불어 시110:1의 중요성

신약성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성경말씀이다. (롬8:34/고전15:25/골3:1/엡1:20/히1:3/8:1/10:21/벧전 3:22/행2:34/5:31/7:55/계3:21/마22:44,46 등)

그런데 예수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인용했나? 메시야가 왜 다윗의 아들이냐?

다윗이 스스로 그 시에서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메시야가 다윗보다 더 높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 주되심. 시110:1 ‘주께서(처음 주-여호화) 야웨 하나님께서 나의 주 메시야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를 나의발 앞에 굴복시킬 때가지 나의 우편에 앉으라’

대권자가 되라.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대권을 휘두르는 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말함.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바로 이와같은 에수의 시110:1의 사용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높이심을 이 구절의 성취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자기 우편에 앉게 하셔서(대권을 위임하는 행위사건)-그리하여 그가 주가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의 부활에서 그의 제자들은 그가 절대적 신적 권위 주장했음이 하나님에 의해 옳다고 인정되었음을 보고 또 그들의 רמ 마레,주가 영광 가운데 높임받은 것을 보고 시 110:1을 예수께 적용하여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하나님의 대권 위임받은 자로,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행사 하는 자로 높임받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예수가 주라는 칭호는 시110:1의 의미를 띠게 된다. 주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이다.(부활해서)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분이라는 의미로 빌2:9/딤전3:16같은 신앙고백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빌2:6-11의 그리스도 찬송시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즉 하나님의 이름 야웨(הוהי-ינרא,κυριος 라고 부름)를 예수에게 주었다. 자기 우편에 앉혀 대권 위임했으니까 이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나 온 우주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했다. 고백하게 했다. 그래서 예수가 만유 위에 군림하는 주가 되었다. 심지어 야웨의 이름을 갖는 분이 되었다. 딤전 3:16도 비슷한 뜻.

이래서 초대 교회 교인들은 구약성경의 야웨에 대한 구절을 예수에게 적용했다. 신약성경에서. 그래서 구약성경의 야웨에 대한 구절들을 신약성경에서 인용할 때 거의 예수에 대한 말씀으로 인용한다(예외-몇번 하나님 아버지를 두고 말할 때). 그래서 예수가 심지어 하나님에게만 드려져야할 예배를 받는 분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만유가 그에게 무릅을 꿇고 모든 사람들의 입술이 그를 주로 고백하게 했다.

(3)예수의 주권의 기간

예수의 주권은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시작하고 즉 그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로의 높임으로 시작하고 그의 재림으로 더불어 끝난다. 고전 15:24에 바울은 그의 재림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모든 힘을 다 때려 부수고 그리고 나서 즉 이 세상의 하나님의 통치에 반발하는 세력을 다 평정하고 하나님께 그의 왕권을 아버지께 돌려준다. 이리하여 하나님이 만유 위에 군림하시는 분이 되게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마땅히 이 세상의 통치자, 주이시다. 그런데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한 사단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일군으로 써서 사단의 통치를 완전히 없애고 뒤집어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회복하는 자로 모든 사단의 권세를 쳐부수고 언제? 그의 재림 때,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결정적 승리를 했고 그리고 그의 재림과 더불어 그 나머지 잔여 세력, 최후 발악하는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고(이 그림=사단의 세력을 자기 발등상으로 만듬. 발로 딛고 서는 상으로 만듬,완전히 발아래 굴복시킴) 그러면 이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대한 반란 끝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만유 위에 군림하시도록 통치권을 돌려드리면 최초의 샬롬이 회복된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이 이제 만유 위에 통치하게 된다.

예수님의 주권은 그의 부활과 승천에서 시작하여 그가 이 세상의 모든 반란세력을 다 집압해서 하나님께 왕권을 돌릴 때까지의 기간이다. 그러니가 예수의 주권기간은 현재부터 그의 재림때까지이고 그의 재림 이후 기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의 그 사역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대권을 대신 행사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파루시아 때에 세상의 반란 세력이 다 진압되어서 하나님께 왕권이 돌려짐.그 때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하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그래서 예수의 통치,주권 기간은 그의 승천과 그의 재림 사이의 현재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전 15:24,25. 신약성경에서 시 110:1을 인용할 대 우리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벌써와 아직도’의 종말론적 긴장을 항상 엿볼 수 있다. 시 110:1을 예수의 승천에 적용할 때 예수의 주권에 적용할 때 예수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벌써 이 모든 사단의 세력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벌써 그의 주권을 행사한다.그러나 아직도 이들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악과 고난이 흉흉하고 예수의 주권이 아직도 거스려진다. 그의 파루시아 재림 때에 그가 드디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킬 것이다.

그래서 벌써 dimension을 παρουσια 때 완성될 정복과 연결해서 말하고자 할 때에는 사단을 꽁꽁 묶었다든지 등뼈를 분질렀다든지 등의 그림을 쓸 수밖에 없다.

이 그리스도의 주권의 기간 즉 그의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바로 교회의 기간이다. 또 그 기간은 성령의 역사의 기간이다. 성령이 구원의 첫 열매 απαρχη 롬8:24, 보증금αρραβυν 고후 1:23/5:5엡1:13 곧 성령이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열매이고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된다고 하는 보증금 역할을 함으로써 벌써와 아직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1)그리스도의 두 주권의 영역

이것은 두개의 동심원으로 나타낼 수있다.

빌2:9-11 까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벌써 시110:1의 성취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만유 위에 주로 군림한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한다. 벌써 온 세상 위에 주로 군림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 세상에서는 사단이 주 행세를 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골4:3) 예수의 주되심을 모르고 그를 주로 고백하지 않고 도리어 마치 사단이 주인인양 사단의 주권 아래서 산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으로 예수의 주되심을 깨닫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사단이 진짜 주가 아니라 예수가 진짜 주임을 깨닫고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으로 넘어온 자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됨, 곧 구원받음은 주권의 바뀜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곧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 흑암으로 다스리는 흑암의 주권,권세의 영역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주권의 영역으로 옮겼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세례 곧 세상의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 ,교회로 들어오는 의식인 세례의식이 사단을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사단을 주로 고백하던 옛자아가 죽어버리고 장사됨을 상징해서 물로 빠지고 예수의 주권으로 새롭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상징해서 물에서 씻긴 몸으로 나오는 극을 한 것이다. 롬10:8 “너희가 입술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으면 구원 얻는다” 이것이 세례의식. 세례때 고백하는 믿음이다. 그 세례 때 바로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 그 고백 전에 사단을 부인하는 의식이 있다.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서 악과 고난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영역에서 의와 사랑으로 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에의 영역으로 transference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다르냐? 둘다 예수님의 주권아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이고 세상은 예수가 진짜 주이나 그의 주권을 모르거나 부인하고 대신 사단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사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주권은 교회를 중심으로 행사되며 교회에서 더 강도 높게 나타난다. 왜? 교회들이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니까. 이 세상에서는 항상 변증법적으로 행사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예수의 주권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주권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 만유의 주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주권에 거스리고 사단의 주권에 순종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나 예수가 불순종을 이용해서라도 자기 주권자적인 뜻을 성취해 나가는 영역이 세상이다. 변증법적으로는 그러나 교회에서는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의 주권이 더 강도있게 행사된다. 더 분명하게 행사된다.

그러니까 교회의 멤버들은 벌써 에수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므로써 그의 주권의 축복을 누리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주권을 무시하거나 무지하거나 불순종하는데 사단을 도리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순종하는데 예수가 사단을 이긴 주이기 때문에 사단에 대한 순종 곧 불순종을 예수가 이용해서라도 자기의 주권자의 뜻을 이룬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에 의식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뜻에 반해서 순종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주권의 축복을 직접 누리지 못한다. 이런 세상과 교회의 관계 예수의 주권의 영역 세상과 교회가 이렇게 다르다. 그러나 교회도 세상 장으로 말하면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시간적으로 말하면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 속에 있다. 그래서 교회자체도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 있다. 그래서 교회 자체도 예수의 주권을 알고 그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지만 그래서 예수의 주권이 벌써 행사되고 나타나고 그의 주권의 축복,구원이 벌서 나타나지만 아직도 완성이 안된 상태에서 그래서 교회에서도 아직도 예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없고 그의 구원의 축복이 완전히 체험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세상과 교회가 비슷한 점이 있다. 교회의 예수 주권에 대한 변증법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럼 정확히 교회와 세상의 다른 점을 어떻게 나타내야 되느냐? 정도의 차이냐? ①알고 모름-예수의 주권에 대한②예수 주권에 대한 의식적 순종,무의식적 순종. 그렇기에③예수 주권의 축복을 누림,못누림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자체도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면에서는 세상과 별 차이가 없게 된다. 그래서 최근 신학에서는 교회가 세상 차이를 자꾸 약화시키는 그런 운동이 자꾸 벌어진다. 특히 카톨릭 신학에서 K.Rahner, 한스 퀀 같은 사람들의 신학적인 마더를 써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주적인 그리스도,그리스도가 교회의 그리스도,주만이 아니고 온 세상의 구원자이고 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시고 주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만 그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벌서 세상은 그의 주권 아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도 벌써 그의 주권 아래 있다는 의미로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개념을 발달시킨다. 그래서 교회밖 타종교의 사람들도 우주의 주로 이미 군림하시는 예수의 주권 아래 있는 자들로서 벌써 그의 심판과 그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로 보아야 한다 .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도 모르지만 그들은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면 그것은 그들의 종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는 모르지만 그들은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와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면 그것은 그들의 종교를 통해 역사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진정시켜 불교들에게는 불교를 통해서 흰두교도들에게는 흰두교를 통해서 이 예수의 주권이 행사되고 그 주권에 대한 순종이 일어나고 그런 것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 종교간의 대화이다. 그래서 대화의 신학이 발달한 것 dialogue 기독교, 불교, 흰두교도들이 다 같이 앉아서 어떻게 흰두교도들은 흰두교의 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고 그것에 순종하는가?를 봐야 된다 해서 대화의 신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이론들이 어디서 틀렸냐하면 예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이 세상이 예수의 주권 아래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주권 아래 놓였다) 에 거부하고 사단의 주권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순종하고 그의 불순종을 이용해서라도 자기의 주권을 성취하는 그런 의미로만 예수가 그들의 뜻에 반해서 그의 주권에 순종케 한다는 그 사실을 그러니까 변증법적 긴장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함. 그래서 사단의 세력의 실제를 부인하고 무시하는 그런 결과를 갖는다. 그래서 이런 신학을 그리스도 일원론식의 신학이라 한다. 마치 이 세상에 작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권만 작용하는 것처럼. 사실 사단의 세력도 막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사단의 주권아래 있다. 사실은 예수와 사단이 서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자기 주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각축을 벌이는 장이 이 세상이고 세상의 각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하고 마치 그리스도만 주로 군림하는 것같이 한다. παρουσια 때 그럴 것이지만 지금 but not yet의 상태 속에서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와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고 그래서 세상 사람의 예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은 변증법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사단을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의 결단,그리고 그러한 결단이 세례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인 교회의 성원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익명의 그리스도인 있을 수 없다. 성립 안된다. 이런 개념이 있으면 선교가 개종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종교 내에서 이미 벌써 다 그리스도인이다. 불교도는 불교에서 흰두교는 흰두교에서 선교는 오직 대화로만 존재한다. 대화로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종교의 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가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만 존재하다가 이런 선교신학이 한 세대를 풍미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 신약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결단,회개와 사단을 부인하는 일 이제까지 사단을 순종했던 삶을 청산하는 일, 거기서 돌이켜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 신앙고백이 있고 그것에 근거한 세례라는 극화를 통해서 세상에서 교회에 들어오는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주권의 변화가 일어나는 일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을 개종이라고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민족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에로 부른다. 롬1:5 바울이 모든 이방인들을,모든 민족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불러오도록 명령받았다고 사도직을 받았다고 했다.

(5)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롬10:9/빌2:9/고전12:3/롬10:9 “네가 네입술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또 고전 12:3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면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고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하면서 예수가 저주받으 자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곧 그리스도인,구원받은 자이다.

오순절신학 영향,방언,환상등 난리해야 성령받았다 한다. 신비한 이상한 체험 해야 한다고 하나 성령받은 증거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에 있다. 예수가 저주받은 자이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신21:23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거짓 선지자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사형감. 그래서 ‘네가 그리스도가 저주받았다고 해라’ 강요했던 것 같다. 바울 스스로 핍박자로서 행할 때에 예수가 저주받은자라고 선언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했던 것 같다. 또 헬라로마 관원들은 그리스도교들이 붙잡혀오면 예수가 저주받은자이다. 로마 황제에게 대항한 죄인이었기에 총독 빌라도가 십자가에 사형 집행한 자라고 인정하면 무죄 석방해주마고, 예수가 저주받은 자라고 강요했던 것 같다. 그런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주라고 신앙고백해야 된다. 그런데 아마 항상 어느 시대에서나 있듯이 이런 극단의 핍박의 상황에서 그 핍박을 모면하기 위해서 예수가 저주받을 자이다라고 순순히 핍박자의 요구를 들어주어 놓고는 나중에 핍박이 지나간 후에 교회에 모여서 아 그때 성령의 인도함으로 살짝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있었던 모양. 바울이 성령에 의해서는 그런말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령이 그 순간 그렇게 말하게 해서 내가 말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가 주이다고 말하게 한다.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으로 들어가서 구원받고서 한 고백이고 교회의 멤버가 된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이것이 핍박의 상황에서 test가 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군림한 예수에게 스스로를 종으로 그에게 속하고 매인바됨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그에게 그의 주권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서약한 행위이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주 에수와 종된 우리의 법적인 관계를 성립시키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주로 예배와 윤리의 상황에 적용된다. 바울은 원래 핍박자로 시작했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높임받은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그의 종으로 인정하는 체험의 극적인 성격 때문에 자신을 주에 대해서 말할 때 상당히 독특한 강도를 갖고 말한다. 가령 빌3:12에 보면 바울,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징집되었다(우리말:붙잡힌 바 되었다). 그래서 그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δουλος 종이 되었다.

롬1:1/고후4:5/갈1:10/빌1:1 등 특히 빌3:8의 언어를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장 고상한 가치를 두고 있다. 바울이 보통 편지에서 ‘우리’라고 자기를 두고 말할때는 문체적인 복수를 쓴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나’란 말이 자주 나온다.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면서 자기 신앙의 절실해진 상황에서 그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절실함을 잘 나타낸 말이다. ‘나의 주’독특한 개인적인 dimenson 은 잘 나타낸다.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 아주 personal 한 주 예수와의 관계의 강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6)주라는 칭호는 윤리적인 가르침에 많이 쓰인다.

예수가 주라고 신앙고백은 우리와 주종의 관계를 법적인 관계로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주권에 완전히 순종해야 되는 종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윤리적인 context에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바울은 주라는 칭호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또는 교회 내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 가장 많이 쓴다. 이 맥락에서 우리들은 바울이 흔히 쓰는 ‘주 안에서’라는 문장 형식을 이해해야 된다.

가령 빌 4:2 유두게하고 순두게가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열렬한 집사였던 것 같다. 이들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조금 분열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안에서’이런 윤리적인 가르침,그리고 또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주라는 칭호를 쓰는데 그때 쓰는 문장형식이 주안에서이다. 이 말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는 그의 주권의 영역에 든 사람들로서 살라는 말이다 그들이 왜 다투냐? 자기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둘다 예수의 주권 아래 있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주권의 영역 속에 그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순종해햐 하는 종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그들이 자기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 위에 같은 주이신 예수의 주권자적인 뜻을 추구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주 안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그의 주권의 영역에 있는 그의 종들로서 한 마음을 품으라. 그러니까 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결정과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분이고 그분의 주권자적인 뜻에 따라 행동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인 가르침의 상황에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의 가르침 상황에 주라는 칭호를 가장 많이 쓴다. (자세히 알려면 W.Kramer의 책 참조.자세히 쓰여 있음)

(7)주라는 칭호는 그러나 확신과 위로를 줄때 쓰이는 칭호이다.

교회와 교회의 성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의 세력을 꺽고 승리하신 주 예수 에게 속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다만 확신을 갖고 기쁨을 갖어야 한다. 그래서 주는 우리에게 순종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하고 안위하고 승리케하고 구원하시는 분이다. 이런 context 속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라는 말을 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시는 분 사단의 세력을 꺽고 승리하신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란는 뜻을 나타낼 때는 ‘주안에서’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빌 4:4 “주안에서 기뻐하라” 이 세상안에서는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다 .빌리보 교인들도 바울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어쩌면 사형선교 받을 가능성이 많은 상태이다. 빌리보 교인들은 가난에 찌들은 상태에서 외부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다. 내부적 분열이 있고 그런데 주안에 기뻐하라. 주가 어째서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이 모든 악과 고난을 갖다주는 사단의 세력을 꺽고 이기어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줄 그런 능력 사랑을 가지신 분을 우리가 주로 모시고 있다. 그 주의 권세 아래서 우리의 십자가 우리의 구원이 확신이므로 우리가 위안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주 안에서’라는 문장형식이 한편으로는 윤리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의 주권에 순종한 자들이라는 말, 또 한편은 사단의 세력을 꺾고 이기신 주에 속한 자들로서 그의 주의 승리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라는 말. 그의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로서라는 말. 이렇게 두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덧입은 자들로서(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쓰임) 그 죽음과 부활에 구원의 사건을 덧입은 자로서라는 말이다.

(8)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의 신성을 함축하고 있다.

빌2:9-11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혀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 야웨 이름 주셨다. 그래서 예수, 야웨,주라는 이름 가졌다. 그러니까 예수가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에 주 모든 무릎을 꿇게 했다는 것은 시 45:23의 인용이다. 사 45:23을 보면 야웨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에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것.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전통적으로 예배하는 자세가 무릎 꿇는 것) 야웨외에 어떤 신에게도 그런데 이 구절을 이제 예수에게 적용한다. 왜? 예수가 야웨란 이름을 받았으므로 예수가 사 45:23. 야웸나 배타적 예배를 받을 수있는 분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예수의 신성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함축한다. 이렇게 해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에 높임받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높임받았음을 함축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이름을 주시고 자기의 대권을 위임하셨다는 확신 가운데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서 야웨에 관한 말씀들을 다 예수에게로 적용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가 히1:10 이하에 나타난다. 주로 이 우주의 창조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 분명한 구분을 초대교인들은 잊지 않았다. 고전 8:6 에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아버지-εκ 만물이 그로부터 났고 그가 창조의 기원,창조주

-εις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해서 존재.

만물의 존재목표가 그에게 영광돌림이다.

그 다음에 I-‘주’-δια 만물이 그를 통해서 났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origin goal 이고 ㅇ예수는 하나님 아버지가 쓰는 수단 일꾼이다. 이렇게 구분했다. 하나님의 아버지와 주를 그러면서 동시에 여기서 예수님의 선재를 천명한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되도록 창조되었은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되도록 창조되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일군 노릇을 했다. 창조의 수단 노릇,그러니까 창조전에 있었다 .선재설. 예수가 주이다는 신앙고백은 그가 선재함을 내포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함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정확히 구분하는 이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원래 기독론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고백에서 이럴 때 이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이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으로 발달한다.

하나님의 이름인 주가 예수에게 적용됨으로 말미암이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에 관한 다른 칭호들이 예수에게 다 적용된다. ‘주’라는 이름과 더불어. 그래서 가령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 왕,그런데 예수가 이스라엘의 목자, 왕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의 목자이고 왕ㅇ시다. 하나만 빼놓고는 ‘아버지’! 자. 에수가 주라고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했고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 보았다.
[출처] 바울신학 7~12강 – 김세윤 교수|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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