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 [19~21강]김세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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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4.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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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 19강
영지주의-태초 인간의 신화,구원자 신화-에 호소하는 신학자, E.Brandenvurger가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주장하기를 ‘원래 아담기독론은 바울의 창작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가 그들의 영지주의적 배경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을 해 가지고 두 인간-Anthropic-에 대한 교리로 발전을 시켰는데 그래서 타락한 첫 인간과 우리가 연대해서 영혼이 육신속에 갇힌 상태로 살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마지막 인간-와 연대해서 우리가 이미 세례를 통해서 영혼이 이미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부활이 필요없다고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주장-두 인간의 교리-을 그리스도 사역을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해석하려고 하면서 그 틀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대해서 일부 교정을 가한 것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이 시발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것은 내 책에서 그렇지 않다고 굉장히 비판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에서 바울의 아담기독론이 나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아람어로 한 사람이란 뜻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고치면 ανηρωπος이고 이것을 다시 히브리 말로 바꾸면 םדא이다. 이래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에서 바울이 힌트를 얻어 가지고 예수를 아담이라고 부르고 최초의 아담과 비교 대조했다.
이런 것이 보수주의 학자들의 견해인데 이것도 별로 옳지 않다. 왜 그러냐면 이러한 증거도 없고 바울 서신에서도 증명하기도 어렵다. 또 종교사적으로 단7:13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창세기 아담과 관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별로 신통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해결책을 좀 다르게 찾아보자 해서 먼저 아담 기독론의 기원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고 더불어서 형상 기독론의 기원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상 기독론이 어디서 나왔느냐? 아담 기독론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그러면 아담 기독론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해결이 안되었다. 그래서 이 순서를 뒤집어 가지고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형상 기독론이 먼저 발생하고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으로 비교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형상 기독론이 먼저 성립이 되고 그것에 연이어서 아담 기독론이 성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가지고 형상기독론의 기원부터 규명을 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들을 관찰해 보아야 한다.
2.언어
1)형상(εικων)-Image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후4:4/골1:15)
여기에 εικων, μορφη 라는 말은 빌2:6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συνμορφη-form-이것은 image(형상)이라고 번역되는데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은 비슷한, 유사한 대표,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본질의 틀(form)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감추어진 본질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μορφη라는 말은 보통 form 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말도 본질의 외적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εικων과 μορφη는 뉘앙스에 있어서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경우 상호 교환용으로, 동의어로 쓰인다. 뉘앙스에 조금 다른 εικων은 모습을 겉으로 드러냄의 뜻이 조금 강하고 form은 본질의 외적 형태라는 뜻이 조금 강하고 εικων은 둘다 비슷함을 전제하고 있다.
εικων이 비슷하다는 뜻을 조금 강하게 나타낸다고 할 수있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기는 다른데 고대 문서에 보면 서로 상호 교환적으로 쓰이고 있고 바울의 편지에도 이 두 말이 보통 같이 한꺼번에 나온다. 가령 롬8:29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의 εικων에 συν μορφη 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하나님 아들-가 하나님 형상이다. 하나님 아들에 εικων(Image)에 συν μορφστα같은 μορφη가 되게 했다고 εικων과 μορφη를 항상 같이 쓴다. 그래서 이 말이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아주 유사하다.
그런데 μορφη라는 말과 εικων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 ʿο μοιομαι(εις)와 비슷하다. 또 μορφη와 같이 쓰이는 말이 σχημα-외적인 형태(form)-이다. 바울도 συν μορφη도 쓰고 συ σχημαται-롬12:2/고전11:13ff/빌3:21 등-라는 말을 쓴다. 이런 말들이 다 동의어들이다.
εικων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םלצ이다-이말을 보통 번역한다. 그러나 가끔 μορφη가지고 이 말을 번역할 때도 있다. 그런데 םלצ라는 말은 항상 תומד(비슷한)라는 말과 같이 쓴다. 어떤 때는 εικων이 보통 םלצ만 번역할 때도 있다. 그래서 μορφη과 εικων가 거의 동의어이듯이 םלצ와 תוםד는 항상 같이 쓰이는 말이다.
תומד는 사실은 비슷하다는 추상명사이고 םלצ은 드러난 모습-동상-을 말하고, 항상 비슷함을 전제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원래 비슷하다는 추상명사로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사실은 창 1:26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슷한 곧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두 단어가 같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자고 한다(창1:26/5:3).
그런데 εικων과 μορφη 두 언어는 헬라 종교에서도 중요하고 철학에서도 중요하고 특히 나중에 영지주의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특히 εικων이라는 말은 유대 랍비 문서에도 아예 헬라어로 빌린 말 זינוהיא로 히브리말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서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는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난 때에 인간이 실제로 모는 것-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זינוהיא을 본다. 헬라어 εικων을 이런 식-זינוהיא-으로 히브리말로 표현했다. 즉 빌려온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환상 가운데 볼때 하나님을 볼 수 가 없어서 하나님을 보는게 아니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זינוהיא를 본다는 식인 헬라 사고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때의 זינוהיא 는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지혜가 물체화하고 인격화했다고 했듯이 물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의 구체성을 띄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말-μορφη ,εικων 또는 이 말을 번역하는 히브리말들-이 중요함. 이런 말들과 또 같이 쓰는 말이 있다.
2)דובכ/δοξα(하나님의 영광)
דובכ와 δοξα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또는 같이 쓰는 말이다. 또는 하나님의 얼굴-פנה/προσωπον-도 늘 같이 쓰는 말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토론은 내 책에 다 있다. 이런 언어들-μορφη, εικων,δοξα-과 또는 동의어-ομοιομαι(σις)-들이 어떠한 상황속에서 주로 쓰이느냐 하면 주로 Epiphany 주로 Vision의 상황 속에서 많이 쓰인다Epiphany는 신적존재의 나타남을 말한다. 이것의 구체적인 것이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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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유대 묵시문학 또는 랍비문학들을 보면 하나님의 나타남 또는 다른 하늘이 존재가 나타남을 그릴 때 위에 말한 언어들이 주로 많이 쓰인다. 환상 가운데 체험되는 존재를 그리기 위해서 이런 말들이 많이 동원된다. 제일 쉽게 볼 수 있는 게 겔1:26이다.
‘사람의 모양 같더라’가 사실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의 나타남-הא רב-,같은(כ),또 한번 같은(תומד)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럴때 תומד라는 언어가 쓰인다. εικων , μορφη 라는 말에 히브리적 상대어인 תומד라든지 הארמ-εικων과 동의어-라는 뜻이 있다. 이런 말들이 하나님이 나타남을 그릴 때 이렇게 쓰인다.
םדא הארמןכ תומד
사람 나타남 같은
단 7장도 마찬가지이다.
‘옛적부터 계신 이’ 여기에서 하나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나타나고 또 하나의 신적존재가 인자같이 나타난다.(שׁנא רבכ) 즉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 네번째 에스라 13:3에 보면 ‘인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여기서도 תובד라는 말을 쓴다. 또 계1:13ff를 보면 요한이 환상 가운데 ‘인자 같은 이’를 본다. ‘Ομοιν υιον ανθρωπος ομοιον ομοιομαι ομοιομαι(σις) 등의 εικων의 비슷한 말을 쓴다.
또 유대묵시문학의 the testament of Abraham(아브라함의 유언)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보면 영광된 아담이 ‘만유의 주재인 ομοιμαι모습으로 나타나고 아벨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모습-ομοιον υιον θεου-과 μορφη와 같이 동의어로 쓰인다. 그러니까 영광된 아담은 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벨은 바로 하나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삼상 28:13f에 있는 사울이 엔돌의 무당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 내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내어서 사무엘을 본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이 책 ‘안티쿠티스’에서 ‘사무엘이 하나님 같은 인간으로 나타난다’ 또는 하나님과 같은 form(μορφη)로 나타난다.
그가 하나님의 iamge(εικων)를 가지고 하나님의 몸체(σχμα)-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의 영이 무당에 의해서 이런 형태로 보여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형상-εικων-으로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결론)
①초월적인 존재를 환상 가운데 볼 때에 보는 자는 보통 보이지 않는 하나님,또는 하늘의 존재를 히브리 말로는 הארב, תובד로 본다. 헬라어로는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등을 본다.
②하늘의 초월적인 존재가 항상 지상의 유비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럴 때에 הארב, תובד, כ 이런 언어가 쓰이고 헬라어로는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언어가 쓰인다.
하늘의 실재는 그 위인데 지상의 유비를 들어서 그릴 때 하늘의 실재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등의 언어가 쓰인다.
③신적 존재가 나타날 때는 인간과 같은 형상 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반면에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Adam,Abel,Abrahm등-이 환상 가운데 나타날 때는 거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신적 존재가 나타날때는 인간(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아담,아벨,아브라함-이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모습 또는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럴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말이 되는가? 이것은 이른바 논리에서 토톨로지-영이 흙이다라는 말과 같다-와 같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타났는데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면 아브라함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영광스런 형체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유대 묵시문학이나 랍비 신비문학에서 초월적인 존재의 나타남을 그리는데 있어서 정규적으로 쓰이는 언어들이다. 지금 모습,형상,비슷함 등은 초월적인 존재들의 나타남을 환상 가운데 보여줄 때의 context에서 쓰인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에스겔 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아담(사람)의 겉모양 같은(השׁרב) 같은(תומד)모양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높임(영광)받은 인간이 나타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아들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언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겔1:16에 하나님이 사람의 הארב 또는 사람과 비슷함(תובד)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창세기 1:26은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םלצ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תומד로 만들어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구약학자 G.Von.Rad는 영국의 구약학자 J.Barr같은 사람은 주장하기를 ‘창세기의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자기의 모습대로 지었다 하는 위대한 신학적 천명은 에스겔서 1장에서 그려진 것과 같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모습)으로 체험한 계시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구약의 문서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창세기 이 부분-창1:26-도 제사장적 문서(P)로,에스겔서-겔1:26-도 물론 제사장적이었기 때문에 소위 P문서이다. 그래서 주로 하나님은 구약의-이사야 6장도 마찬가지-성전에 나타난다.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통 하늘에 계시나 지상에 계시면 성전에 계신다.
성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여 있다.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체험한다(사6장,겔1장). 이것이 이른바 제사장적 문서(P)라고 하는데 창1:26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창 1:26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는 환상 가운데 사람의 형상(모습)으로 보는 계시의 체험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곧 하나님과 인간에는 외적인 모습에 비슷함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다. 보인다면 우리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면 그 분은 우리 이성보다 작은 분이다. 그런 분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가 없고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이성보다 크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다. 그래서 우리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이성에 자기를 계시-보여줌-한다. 그러니까 더 크신 분으로서 우리 이성에게 자기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서 깨닫게 하느냐면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이것이 구약과 묵시문학에서의 언어이다.
그런데 지혜 문서-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장에서 그렇고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철학자 Philo의 글등-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 또는 하나님의 말씀-λογος-이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자 노릇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한다. 그런데 바로 이 계시의 중보자 노릇함이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실 때-Theophany-에 실제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지혜라는 거이다. 또는 λογος라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지혜와 λογος가 하나님의 εικων이기 때문에 실제로 Theophany할 때 인간이 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 지혜나 λογος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나 λογος를 보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또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지혜나 λογος가 하나님의 εικω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형상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지 안다.
지혜/λογος⇨하나님의 아들(딸)⇨하나님의 사자 노릇
⇩
창조,계시,구원
⇩
계시의 중보자
⇩
Theophany
이럴때-Philo나 지혜문서의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에는 이런 의미로 지혜나 λογος를 하나님 εικων, μορφη라고 할 때 지혜문서-묵시문학서와 마찬가지로-도 Theophany상황을 염두해 두고 이런 언어를 쓴다. Philo의 책 중에서 재미 있는 것이 있는데 ‘꿈에 관하여’-de Somnis-에서 제 1장 227절에서 241절까지 보면 ‘벧엘에서 야곱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다.’그런데 Philo는 이 사실은 야곱이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고 λογος-하나님의 천사,사자-를 보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느냐면 λογος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Philo나 지혜문서도 묵시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출현상황에서 본다. 그런데 지혜문서나 Philo에게서 중요한 것은 지혜나 λογος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εικων 이라고 한다. 이처럼 εικων(형상) 언어를 하나님의 나타남-Theophany 또는 Euiphany(출현)-의 현상에서 그릴 때에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의 가설을 쓸 수 있는데 바울도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면 εικων, μορφη 언어를 Eupihany 현상에서 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묵시문학-하나님이 나타나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러나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에서나 Philo도 하나님 아닌 하나님의 λογος 즉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니까 하나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염두해 두고 위의 가설을 좀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바울이 혹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서 하나님 영광 가운데 나타난 나사렛 예수-바울에게는 인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나타날 때에 그를 유대 묵시문학의 언어료 표현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인식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나타남을 체험한데서 나왔을 것이다는 가설을 성림시킬 수 있다.
그래서 바울도 유대의 묵시문학,지혜문학적 전통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아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높임받은 상태로 그의 영광의 광채에 나타났을 때에 그를 두고 ‘그가 하나님 같이 생겼다 하나님 비슷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다’하는 이런 언어를 썻을 것이다. 이런 가설을 가지고 그러면 바울의 서신에서 실제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지칭한 구절들을 해석해보면 다메섹 도상의 Christophany 현상을 지적하는 요소들이 있는가를 찾아 보아 가지고 그런 요소들이 있으면 위에서 말한 가설들이 확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언어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 15:47을 보면 첫 아담은 흙에 속한 자라고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첫 아담과 연대에 있어서 흙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었는데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 말할 때 마지막 아담을 하늘에 속한자라고 한다. 즉 ‘του επουρανιον’-하늘의 인간,하늘의 존재-의 형상을 입는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늘의 존재로 말하고 있다. 하늘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를 연상하게 한다. 왜 그러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을 하늘과 연결시켜서 보면 다메섹 도상에 체험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빌3:20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기의 영광된 형상(형체)-εικων, μορφη, μορφη의 동의어인 αχμα가 쓰임-으로 바꿀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 하늘에서 오는 분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하늘보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을 체험한 것은 하늘로부터 올-재림-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른바 성취-prolepsis-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하나님 영광 가운데 계시되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가 종말에 재림할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fk는 것을 빌 3:20-21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후 3:1-4:6이 이주 중요하다. 특히 3:16-18까지를 보면 18절에 ‘우리 모두가 얼굴에 씌운 것을 벗은 상태로 주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보냐면 거울에 반사된 것을 바라보듯이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서 그 형상으로-την αυτην εικνα-변화되어 간다.-μετα μορφουμεθα-모습이 변화한다는 말이다. μορφη가 변한다고 바울이 여기서 쓰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εικων으로 우리의 형태가 변화되어간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봄으로서 변화되어 간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주의 영광을 본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를 염두해 두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느냐면 고후 4:4,6까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광채를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하기도 하고(고후4:4) 그리고 고후 4:6에서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복음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선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함이 빛을 비춤이다. 이 말은 인식하게 하고 깨닫게 함이라는 뜻이다. 고후 4:4,6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이런 언어로 강력하게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context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보면 고후 3:18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일반화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체험-구원의 체험-을 18절에서 ‘주의 영광을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보며’ 거울에 들여다 보듯이 보면 주의 영광의 빛이 반사된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닮아간다. 사실 고후3:1-4:6까지는 장,절이 잘못되어 있다. 사실은 4:6까지는 3장에 같이 붙는 것이다. 고후 3:1-4:6까지는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 있어서 Christophany의 체험과 모세에게 주어진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출현-Theophany-을 비교 대조하는 것이다.
모세는 옛 언약의 사자로서 율법의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이 영광은 사라지는 영광이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까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수건은 율법에 가려짐을 상징하고 또 율법을 읽는 유대인들의 심장이 완악해짐-영적인 눈이 못뜨게 됨, 가려짐-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아무리 회당에서 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내산의 계시에 근거해서 회당에 모여서 예배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의거해서 그런다. 그런데 바울은 새언약의 사자이다. 복음을 계시받은 것에 근거해서 그렇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할 뿐만 아니라 쳐다보면 볼 수록 더욱 더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이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으로 우리가 변화된다는 대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대조를 하고 있느냐면 고린도 교회에 모세의 율법에 호소하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이 모세 율법을 존중하지 않은 것을 시비함으로 바울이 대조하면서 그렇게 하는 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것인데 모세가 벌써 속임수를 썼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는데 이것은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야 안에서 완성될 영광에 겨우 pointing하는 정도인데 그것을 절대화해 가지고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덮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후 4:1에서부터 읽어가면 바로 모세에게 호소하는 유대주의자들이야말로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속임수를 써서 주의 일은 한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이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복음의 내용으로 선포한 자이기 때문에 전혀 속임수를 쓸 필요가 없다(고후4:1-6).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들’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다. 모세가 감추었다(속임수를 썼다)는 말이다. 이들은 바울이 속임수를 쓴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거꾸로 말하고 있다. 내가 속임수 쓸 이유가 없다. ‘나는 하나님의 드러난 영광을 그대로 쓴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복음에 무슨 궤휼을 쓰고 숨기고 속임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바울의 복음은 가려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난 하나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재창조의 사건이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하는 것은 창조의 사건이다. 이 하나님이 다시 종말에 하나님의 얼굴에 자기 영광의 빛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창조의 사건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린도후서 3:1-4:6
유대인
그리스도인
Sinai Theophany
(모세)
옛언약의 사건
Torah
하나님의 영광
수건(가려짐)
Damacus Christophany
(바울)
새언약의 사자
Gospel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변화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이 변화되는 context에서 고후 4:4에서 그리고 고후 3:18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같이 쓰는 말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 바울 신학에만 이 용어가 나온다(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 것)
.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지칭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는 자들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이래서 형상 기독론과 형상 구원론이 발생을 했다.
형상 기독론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남의 체험을 두고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두 단계로 논증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는 형상이라는 말이 종교사적으로 어떤 context에서 쓰이는가? 그래서 여기서 가설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신전 존재의 나타남의 visions을 그릴 때 형상이라는 말이 쓰인다. 그러니까 바울도 신약성경에서 독특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vision체험과 형상 기독론이 연결되었다는 가설을 얻은 뒤에 실제로 바울을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부르는 본문들을 관찰함으로서 거기에 vision의 체험의 요소들이 있느냐를 보니까 ‘하늘’‘영광’‘그리스도 얼굴에 반사한 영광’ 하는 것들은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 나타남,영과의 광채로 덮혀 나타난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우리에게 연상케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한번도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고후3:18/고후4:4-6까지 또 빌3:20,21/고전15:49 등을 보면 자연히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을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세번이나 그로진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이 다메섹에 당도하기 전에 ‘하늘에 엄청난 빛이, 하나님 영광의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쬐서 바울이 거꾸러지는 장면이다’그래서 그리스도-높임받은 주-를 본다. 그래서 누가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서 그리는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Christophany현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빛의 현상이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다. 그래서 바울은 한번도 사도행전적으로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 Christophany현상을 그리지 않지만 반면에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신학적으로는 설명하다. 그 언어들-하늘,영광,빛,εικων-이 우리로 하여금 사도행전에서 그리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현상을 완벽하게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러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깨달음을 알았다. 신학자 바울에게도 이 인식-다메섹 도상-이 무엇을 생각하게 했는가? 우리 성경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창1:26). 그런데 아담이 계속 하나님 형상으로 머물렀느냐? 유대 랍비들에 의하면 두가지 사상이 있다. 하나는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문장은 유대문서에 안나온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우리는 많이 쓰는데 유대인들은 이런 말을 않는다. 왜냐하면 G.Von Rad나 J.Barr같은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창 1:26에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다는 신학적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주해함에 있어서 많은 학자들이 도대체 인간의 어떤 면이 하나님의 형상이냐?’를 가지고 많이 토론해왔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학자만이 아니라 랍비들도 엄청나게 토론했다. 또 영지주의자들도 엄청나게 토론했다총집합적인 책이 C.Westermann ‘창세기 주석’Biblical commentary 시리즈 주석. 역대 의견들이 집대성 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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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조직신학에서는 주로 관계론적-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할 수있다는 관계,fellowship 으로서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상당히 추상화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G.Von Rad나 J.Barr같은 사람은 형상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쓰이고 어느 상황에서 쓰이고 하는 것을 감안해서 이런 깊이까지도 형상이 의미를 하겠지만 적어도 하나님 형상이라는 개념 한 단면은 외형적인 모습이 비슷함이다. 지금가지 전통신학에서 이면을 무시해 왔는데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 전승에 의해서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 내적 본질은 중요하고 외적 형상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고정관념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형상도 없는 분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무슨 외적인 모습은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존재론적인 본질적인 무엇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추상적인 의미로만 생각하게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전체를 두고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 중에 적어도 한 면은 외적인 모습에 비슷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초월자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할 때에 인간의 이성에 알 수 있게 계시한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난다.
이럴때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외형적인 모습의 비슷함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의 한 요소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랍비들은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면 아담이 원래 사람 모습이었는데 범죄한 뒤 벌레같이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원래 사람이었는데 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아담이 범죄한 후 6가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①얼굴의 광채-하나님 영광을 반사하는 자-을 잃어버려서 추남이 되었다. 하나님과 굉장히 비슷했는데 이제 조금 비슷해졌다.
②키가 줄어 들었다. 키가 엄청난게 장대여서 사방을 덮고 남을 정도로 키가 컸는데 이제는 조그만 해졌다.
③땅의 열매를 잃어버렸다. 땅의 소산이 풍부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아무 결핍이 없이 살았는데 이제는 피땀흘려 농사해도 겨우 굶어죽을지 먹고 살지 모르는 상황이다.
④나무 열매를 잃어버렸다. 포도 한송이가 그때는 장정 열대명이 들어도 못들었는데 이제는 조그만해졌다. 그래서 배고프게 되었다.
⑤하늘의 별(광채)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암흑과 혼돈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 빛을 잃어버렸다. 무질서와 암흑과 혼돈이 되어 버렸다.
⑥영생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잃어버렸다. 여섯가지를 잃어버렸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간이 하나님 형상됨을 말한다. 가령 창5:3-범죄 이후-에도 아담과 그의 자손 셋의 하나님됨을 천명한다. 유대 랍비들은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에 인간의 존엄성(dignity)-가치-을 근거하고 도덕을 근거했다. 그래서 인간이 서로에게 상해-죽이다,살인-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 형상을 헤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계속해서 하나님 형상임을 천명했다. 이것에 근거해서 인간의 가치와 도덕성을 천명했다. 이 두가지 사실이 바울에게도 그래도 나타난다.
가령 고전11장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아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그래서 랍비들도 마찬가지로 바울도 인간이 계속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롬3:21 ‘범죄해서 하나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하나님 영광은 하나님 형상과 거의 동의어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 영광이고 얼굴의 광채이고 키가 줄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M.Smith-유대 신학자-는 ‘정확히 말하면-유대 랍비들의 견해-아담이 범죄하므로 하나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형상이 굉장히 줄어든 상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형상됨이 완전히 부정되지-인간이 하나님 형상 됨이 완전히 부정되버리면 하나님과 fellowship도 못한다-않지만 그 관계가 굉장히 약화되고-아담의 하나님 형상됨이 약화되고-줄어들었다고 보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여섯가지 잃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랍비들이 말한대로 아담이 하나님의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했듯이 바울도 우리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하지 형상(전체)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 신학에서 Endzeit-종말,구원의 시대-는 태초의 회복-Urzeit-이다라는 역사관에 있어서 기본원칙-유대 신학에서는 항상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구원의 체험-에 따라 항상 태초의 완전한 상태와 견주어서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 신학에 있어서 구원의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때의 Exdus라는 말은 애굽에서 도망해서 홍해 건너는데 까지만 아니고 가나안의 정착까지 전체의 사건을 출애굽사건이라고 한다. 그때에 Sinai 광야에서 모세가 하ㅏ님의 영광을 보았다. 시내광야에서 율법이 계시되고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또 그때 시내에서 만나를 먹고 영적인 물-브리바의 바위에서-을 공급받았다.
이럼 체험들을 태초에 아담의 낙원회복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재창조로 보았다. 출애굽의 구원의 체험을 태초에 아담의 창조와 견주어서 재창조라는 범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 나타난 하나님 영광이 창조 때의 하나님의 빛이 나타남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암흑과 혼돈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빛을 비췬다. 그때 먹었던 만나가 아담의 타락으로 궁핍해진다. 또 그때 마셨던 물-생명수-생명력을 샘솟게 한다. 그래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생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출애굽해서 이런 것을 체험한 이들이 금 송아지를 섬겼다. 그래서 아담과 똑같은 짓을 했다.
그래가지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종말에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에 근거-로 제2의 출애굽을 한다. 이것이 종말의 구원이다. 그러니까 종말의 첫 구원은 출애굽과 같고 그것은 그러므로 출애굽 당시에 모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이고 만나와 물을 다시 회복하고 이것은 즉 태초의 풍요로움을 회복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계시되는 것으로 유대신학에서는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자-모세-는 자연히 아담과 비교,대죠된다. 그러면 이 때 메시야도 자연히 모세와 비교,대조되고 그렇게 하여 아담과 비교 대조된다. 그래서 람비문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한 랍비가 하루는 아담과 모세의 무덤에 갔다. 그랬더니 둘이 열심히 논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위대하냐? 아담이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내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모세가 말하기를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 형상에 머무르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 내가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둘이 싸웠다”
이 이야기는 위와 같은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즉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영광,하나님 형상을 모세가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모세 세대-금송아지 섬김-가 또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야가 다시 나와서 구원의 삶을 삶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역사관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첫 구원의 사건을 높이 평가하면 평가할수록 아담에 의해서 잃어버린 것을 더 나쁘게 평가해버릴 것이다. 종말에 구원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면 할 수록 태초 아담의 상실을 더 나쁘게 말할 것이다. 이러한 context에서 간혹 유대 신학에서는 차마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못하나 이런 context-당신 보다 내가 더 위대하다. 왜? 당신은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나는 그것을 회복했다-에서는 거의 이런 말을 할 정도가 된다. 마찬가지로 종말에 구원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아담을 더 나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담이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리고 형상도 거의 잃어버렸다. 그래서 종말에 메시야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난다.
바울이 이와 같은 신학의 후예이다. 이러한 역사관,구원관,종말관을 가진 바울에게-고후4:6/고후3:18-반영된 체험-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남-을 했다. 이러한 신학적인 배경에서 바울은 예수가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광과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고 예수의 마지막 아담의 역할을 대초에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대조하기도 한다. 여기서 비교는 인류의 조상이다. 아담은 첫 창조에서 인류의 조상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재창조에서 인류의 조상이다. 둘다 하나님 형상이다. 그리고 둘다 조상으로서 Stamvater-후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는 가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둥지이다. 이런 점에서 아담과 예수가 비교되고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대조되는 아담을 하나님 형상(영광)을 불순종으로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후손들을 불순종-범죄함-에 동참케 해서 그들을 죄와 죽임의 권세 아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그의 순종으로 아담의 죄를 속죄해서 그와 연합하는 자들을 구속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다. 이것이 롬5:12ff에 아담이 마지막 아담의 비교,대조이다. 또 고전 15장에 나오는 아담과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의 비교,대조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으로 체험하고 이 체험은 곧 바울에게 창1:26에 비추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비교, 대조하게 하고 이와 같은 유대교의 종말론,역사 이해에 비추어서 아담 기독론,아담구원론을 이루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에게서만 형상 기독론,형상구원론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혜기독론의 일부 또한 여기에서 나온다. 지혜 문학에서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다. 그래서 지혜기독론은 일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아담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을 주로 확인한다. 지혜기독론은 예수의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자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로 천명한다.
바울신학 제20강
지난 시간까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I=εικων του θεου-는 인식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얻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인식은 훈련받은 신학자 바울로 하여금 즉각 두가지를 예수와 더불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이다’왜 그러냐면 지혜문서에 가령 wisdom of solomon 7:26에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Philo의 책 여러 곳에도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는 말이다. 지난번에 ‘하나님 아들’을 볼때 지혜가 하나님의 속성인데 점차 독립적인 개체로 인격화한다고 했다. 이것의 논리 구조와 이러한 신학적인 의도를 지난번에 설명했다. 그래서 지혜가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의 수단인데 그중에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고 말할 때에 지혜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학적 전통에 익숙한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남,본질의 계시상태-을 그 얼굴에 반사하는 자로 나타나므로 예수를 구약신학이 유대신학이 제공하는 언어로 예수의 의미를 설명할 때 ‘예수가 곧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공부한 고후4:4-8까지는 주로 지혜신학의 반영이다. 또 골 1:15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 보여주는 이가 지혜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지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사 속에서 또는 조직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 계시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그려진 것이 사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나 보인다.
완성된 계시에 의해서 볼때 예수의 활동을 불안전한(예비적)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활동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혜의 케테고리를 예수께 적용했을 때에 유의할 것은 예수가 지혜라 할때에 예수와 지혜를 완전히 identification했다기 보다는 이제 완성된 계시에서 터득한 진리가 과거에 하나님의 구원사에거 지혜의 활동-창조,계시 구원의 중보자 노릇하는 이로서의 지혜활동-이라는 것이 사실은 성육신 전에 예수의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육신 전의 예수의 활동을 과거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아직 완성된 계시가 없기 때문에 부분적인 불완전한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활동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혜신학-예수를 하나님의 지혜-에서 이렇게 부르게 되는 데는 ①εικων이 중요한 요인이다.②지난번에 하나님 아들과 관계에서 본 바와 같이 Sir24같으데서는 모세 율법이 지혜를 담는 체현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지혜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얻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이런 지혜문서에서는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 율법을 공부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율법을 공부함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율법에 담겨 있다. 또는 율법이 지혜를 담아서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깨닫고 지혜가 불충분(불완전) 하게 담겨 있던 율법을 예수가 능가하는 분이므로 예수가 바로 지혜의 완전한 표현이다고 해서 예수를 지혜로 말한다. ③예수의 지혜 가르침이다. 이것이 앙식사가들은 공관복음-마11장 23장 그리고 이것의 누가복음 병행절(Q자료)-에서 보면 ‘예수께서 지혜의 사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③은 바울이 나중에 알았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터득한 진리로서 예수를 지혜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의 지혜 가르침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를 지혜로 설명하게 하는데 역사적인 뒷받침을 해준 것이다.
(지혜기독론)
그래서 지혜 기독론이 발생을 했다. 지혜기독론의 중요한 관심이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골1:15/고후2:4-6까지가 지혜기독론의 표현이다.
1)그러므로 지혜기독론은 결국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예수가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이다.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소리에는 본질보다 못한 모조품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 그대로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시하는 분이다. 그래서 지혜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2)아담 창1:26⇨ 새아담(마지막 아담)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깨달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으로 보게 됨으로 자연히 바울은 예수를 창 1:26의 아담과 비교 대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랍비들은 아담이 타락하면서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거의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 영광-דובכ 곧 δοξα는 εικων과 거의 동의어(고후4:6/고후3:18)-을 잃어버렸다고는 말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도 롬 3:21에 ‘우리가 다 범죄해서 하나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 즉 하나님 영광의 결핍상태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나님 본질에 참여 못함,신성에 참여하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도 라비들과 똑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고전11장)한다. 그래서 고전 11장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지만 하여간 남자가 계속 하나님 형상이라고 바울을 불러 줌으로서 랍비들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비슷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완전히 하나님 형상을 일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랍비들이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느냐면 아마 외적인 모양하고 관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라 할때 적어도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외모의 비슷함인데 아담이 범죄해서 외모가 달라졌다. 유대인들은 아담이 범죄후 여섯가지를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형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형상이 많이 달라져 조금 남았다. 굉장히 소외되고 질적,양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러한 언어 사용에 충실해서 우리가 범죄하므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아담이 잃어버린 얼굴의 광채-을 되찾음은 고후 4:6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반짝인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유대 신학에서 아담이 범죄하므로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으로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발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새 아듬으로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영광을 회복하고 아담에게 축소되고 악화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비슷한 점이 옛 인류의 조상-죄와 죽음 아래에 있는 조상-과 새 인류의 조상이다. 이때에 바울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역사관은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났다면 그것은 태초의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회복한 종말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태초의 아담에 상응하는 예수가 종말의 아담이다. 그래서 바울은 새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종말) 아담이라고 부른다. 아담이 첫 인류-옛 인류-의 조상인 것같이 Endzeit(종말)은 Urzeti(태초)와 같다. 종말은 태초와 같다는 역사관에 의해서 마지막 아담은 종말의 인류-새 인류의 조상-의 조상이다. 아담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잃어버렸는가?불순종으로 잃어버렸다. 예수는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마지막 아담이 되었다. 그래서 첫 아담은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다. 그래서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Stammvater이다.
첫 아담의 후손들은 전부 그의 불순종으로 연루시켜서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는데 마지막 아담도 종말에 인류의 stammvater이다. 그래서 그의 순종에 참여-믿음으로 참여-하게 해서 그들을 의와 생명을 얻게 했다. 이렇게 아담 기독론을 대조시키고 있다. 마지막 아담에서 구원론이 나온다. 앞에서 말판 지혜기독론에 따른 구원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하나님을 알게 됨-을 얻음이다. 그런데 아담 기독론에서 나오는 구원론은 우리가 옛 아담의 형상을 입었던 것과 같이 이제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전15:49). 또는 옛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옛 아담과의 연합(solidarity)에서 벗어나서 마지막 아담과 연합해서 그의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하게 됨을 롬8:29에서는 마지막 아담의 형상에 같은 형상이 된다(μοροφουσθαι).하나님 아들의 εικων에 συμ(같은) μορφη(형상)이 된다. 또 고후3:18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의 εικων에로 μεταμορφουσθαι(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 그래서 앞에서 본 빌 3:21-συμμοροφουσθαι, μεταπορφουσθαι, συσχημασθαι(그의 틀)-도 마찬가지로 같은 틀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한 하나님의 형상을 덧 입는 회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전개한다.
앞에서 말한 εικων에서 나오는 지혜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천명하는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형상기독론에서 나오는 아담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천명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칼세돈 이래로의 교회 신학자들이 신약의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의 양성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줄곧 토론해왔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존재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εικων 이라는 카테고리로 설명할 때에 가장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소리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같이 천명되는 신학언어이다. 칼빈신학교 교수인 A.Hoekma가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아담 기독론이 바울의 구원론에 scafolding(버팀목) 즉 틀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요 대신이라고 고백하고 그를 믿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συν χριστω) 해서 그리스도 안에(εν χριστω) 있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 그리고 그가 어떤 일을 했는가?(What Christ has done)-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우리의 한 일이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짐 곧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대표로 계심으로 말마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서 그의 의인됨이 우리의 의인됨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들됨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되고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 됨이 우리의 하나님 형상됨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함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대신 벌받음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벌받아 버림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음이 우리의 높임 받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음-이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내포시킨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Stammvater 안에 내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그가 어떤 분이었는가?)-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What Christ has done?-가 우리의 하신 일로 하나님이 간주하신다.
믿음-그리스도의 대표성,대신성- ꠏ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함ꠏꠎꀲ
(υπερ ημων) What Christ was
What Christ has done
↓
의, 올바른——→우리
위의 표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됨의 전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죄인으로서 첫 아담이 우리의 Stammvater로서 우리는 첫 아담이 가지들로서 아담이 어떤 분이었는가가 우리의 어떤 분이고 아담이 한 일이 우리가 한 일이다.
아담과의 solidarity 속에서 아담에 내포되어서, 아담과 연대해서 우리가 죄와 죽음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마지막 아담-를 믿음- 우리가 새 인류의 대표로서, 대신으로서,죽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우리가 이 상태-옛 아담-에서 마지막 아담상태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우리의 하신 일이 되어서 우리가 그의 의와 하나님 형상과 영광, 그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 구원론의 틀이데 결국 아담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옛 아담과 solidarity(연대) 속에서 벗어나서 새 아담의 solidarity(연대)에 들어가므로 새 아담의 운명-자격-에 동참함이 곧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은 스코틀랜드의 M.Black 교수가 잘 표현했듯이 ‘바울의 구원론을 가능케 하는 틀(기본)’이다. 이른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이 사상이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 운명-함께 죽고 부활해서 생명을 얻음-에 동참이다. 다른 말로는 아담기독론의 구원론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주제는 ‘인간론’리델보스,Bultmann ‘신약신학’의 인간론-실존주의적으로 쓰여짐-이것에 대해 교정을 시도한 것이 R.H.Gundry “the Soma Biblical Theology” 주로 바울을 다루는 것이다. 불트만은 몸을 총체론적인 관점에서 인간 전체를 몸이라고 한다. 인간이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몸이다. Gundry가 이것에 대해서 중요한 교정을 시도한다. C.U.P에서 나오는 S.N.T.S.M.S 세계 신약학회에서 나오는 단행본 씨리즈에 나왔다.
σομα문제를 다루면 바울의 교회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독특한 개념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옴’이라고 하는 그림이 어디에서 나왔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다루게 된다. 또 바울신학에 다룰 주제는 ‘종말론’이다.
질문:창1:26에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에 있어서 도대체 인간이 어떤 면이 하나님 형상이냐? 하나님 형상이라는게 도대체 인간의 무엇을 지칭하는 말이냐?
답:C.Westmann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수십가지 이론이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대권자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통치하려는 왕적 권위를 두고 영광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이론이다. 또 요새 인기 있는 이론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C.Westmann의 창세기 주석을 보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이론이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할때에 이모든 의미를 다 함축할 가능성이 많다.
지금까지 책들이 인간이 실존에 있어서 독특성-동물들과 피조물들-을 전부 하나님 형상과 빗대어 생각해볼려고 했다. 이것은 사실 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의미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항상 간과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외모의 비슷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항상 간과되었는데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이 헬라적 이원론으로 생각을 해서 본질과 형상은 달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현상은 값없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추상화된 것-왕권,하나님을 아는 지식,또는 하나님과 fellowship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지 외모에 있어서의 비슷함은 생각안할려고 했다. 그것은 항상 값없는 것으로 낮추었기 때문이다. G.Von Rad 나 J.Barr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언어가 도대체 어떤 context에서 쓰이냐면 ‘하나님이 나타나는 환상을 보는’ context에서 쓰인다. 이것은 분명히 외모를 두고 한 말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제시한 것과 같이 ‘하나님 형상에 있어서 외모도 한 요소이다’ 이것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의미(significance)를 설파(해설)한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이 제공하는 언어와 범주를 사용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배경을 구약-하나님의 말씀-계시로 보았다.
그러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계시가 제공하는 개념과 범주들로 자기가 새롭게 받은 계시들을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라는 개념 또는 범주와 아담이라는 개념 또는 범주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예수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significance를 해설한 것이다. 이것이 한편 지혜기독론이고 아담기독론이라는 것이다. 지혜기독론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중요성을 들춰내는 것이니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신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아담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을 천명하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니까 하나나님의 형상에 들어 있는 다른 의미-왕적 권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혜 기독론이나 아담기독론에는 이런 의미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왕적권위가 아담기독로에 있는지 모르다. 왜 그러냐면 롬8:19‘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의 계시를 간절히 기다린다’ 다시 말해 학수 고대한다. γαρ αποκαραδοκιακαρε라는 말은 목,δοκια는 늘어 뺀다.
좌우 다 제외하고 목을 길게 늘어 빼서 멀찍이에서 오는 물체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이다. 좌우 안쳐다본다는 말이 여기에서는 없는데 απο라는 말이 여기서 그 기능을 한다. 오로지 목표만 향한다.
이 명사는 신약성겨에 두번 밖에 안나온다(롬8:19/빌1:20). 여기에서 αποκαραδοκια 는 바울이 피조물에 간절히 바램에 의해 쓴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석받되는 것이 빌리보 교인들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롬8:19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들에 계시됨을 기다린다’ 우리들이 하나님 아들로서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종말론적인 개념-의 사건을 간절히 기다린다. 왜 그러냐면 그 때 자신들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피조물의 대표(왕)로서 범죄하므로 피조물이 같이 그 타락에 참여해서 같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도 새 아담-새 인류,하나님 아들들-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 형상인 인간과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이 다스리게 된 창조와의 solidarity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εικων이라는 말에 이런 뜻도 있는지 모른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마지막 아담에 solidatity 해서 하나님 아들로 그의 형상에 참여한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인간들과 피조물의 연대성을 살펴볼 때에 형상기독론에도 이것이 내포되어 있다.
질문:어떤 책에 보니까 ‘하나님의 전 경륜과 내면 속에서 장차 그리스도가 성육신할 그 형상을 아담이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답:이것은 좋은 착안이다. 그런데 성육신할 형상을 아담이 본 받았다가 아니다. 이것은 불트만과 칼 바르트 간에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대 논쟁-롬5:12-24 가지의 주석을 가지고-을 벌였다.
K.Barth는 여기에 대한 주석을 ‘Christus und Adam’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Bultmann은 ‘Adam und Christus’를 썼다. 여기에서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이고 아담은 그리스도-하나님 형상-의 모조품-Abid-이다.’ 그러니까 바르트에 의하면 ‘바울신학에서 그리스도는 Urbild-하나님 형상-인데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형상됨의 Ur(원형)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원형인 그리스도에 Abild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들로 Abid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늦게 오는 아담 뒤에 왔지만 사실은 영원한 perspective에 보면 그리스도가 원형이고 아담은 그리스도의 abild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불트만은 아담이 먼저이고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인데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대 논쟁을 벌였다. ‘아담을 첫 아담’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이렇게 놓고 보면 불트만이 맞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것을 영원한 경륜 속에서 보면 바르트가 맞다. 그래서 시간 내에서의 먼저 오고 뒤에 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제2위의 하나님 아들-이 Urbild로서 아담이 abild 였는데 이것에 아담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함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에게 Urbild가 되셔가지고 우리에게 Vorbild가 되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Urbild로서 abild 가 나오게 하는 Vorbild라는 말이다. 우리말로나 영어로는 나타내기 힘든 말이다.
Urbild-원형
Vorbild-선형(Vor-먼저) Abild의 원본이라는 말이다.
Urbild(원래 원본) 와는 조금 다르다. Urbild가 Abild의 Vorbild 노릇한다. 왜냐하면 Abild가 Urbild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모방할 때 Urbild가 Vorbild가 되는 것이다.
. 질문의 내용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비록 시간적으로 아담 뒤에 오지만 (고전15:45) 예수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이것의 Abild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제2위이 하나님 아들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이것을 지혜신학에서는 지혜라고 한다. 이것의 모조품이 아담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것에 충실하지 못했다 .예수가 성육신해서 다시 우리에게 자기의 Urbild됨을 보여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Vorbild로 해서 그이 Abild가 되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앞서서 말한 구원론적인 언어들이다. 우리가 그의 형상에 같은 모양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
김세윤 박사 ‘바울 복음의 기원’pp266 συμ note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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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다음과 같은 metaphors(그림)을 동원한다.
Ⅰ.Justification(의인됨)
Ⅱ.Reconciliation(하나님과 화해함)
Ⅲ.Sonship(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됨)
Ⅳ.New creation(새로운 피조물)-하나님의 형상,영광을 얻음.
이와 같은 그림을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할 때 주로 쓴다. 이 그림들이 전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가 있다. 특히 이 그림-의인됨,화해함-은 바울만 쓴다. 신약성경에 ‘믿음으로 의인됨’은 다른 데는 없다. 물론 다른데 ‘의’에 대한 개념들이 나오지만 이런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됨’이라는 카테고리로 전개하는 것은 아주 바울적인 것이다. 또 하나님과 화해됨 이것은 죄인을 하나님의 원수-εξθρος-로 지칭한다. 롬5장 같은데서는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상호 적대관계-원수의 관계,죄를 하나님께 적대한 행위-로 설명을 하고 그것에 관해서 구원을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는 관계로 그린 것은 καταλλαγη-동사로 καταλλασσω-언어는 바울에게만 나오는 것이다(롬5장/고전5장 골1:15-20).
이것이 엡 2장에서는 교회론적으로 확대되어 가지고 그리스도 몸-교회-안에서 이방인들과 서로 상호 원수 되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해서 하나됨-하나님과 인간이 화해,인류를 갈랐던 두 종류 인간이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확대되어서 해석되어지는 아주 중요한 그림인데 이것이 바울의 편지에만 나오는 개념이다.
물론 화해의 그림을 나타낼려고 하는 실제를 나타내는 사상은 다른 신약 책들에도 있다. 특히 예수이 비유 중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난다. 또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그 행위에 잘 나타난다. 죄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께 화해되어서 그 화해의 잔치 베품은 탕자의 비유라든지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적 행위에 바울의 화해라는 개념의 실제가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론적으로 개념화 한 것은 바울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기를 왜 바울이 이와 같은-화해-그림을 개발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그림을 설명했을까?
이것은 분명히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 있다. 왜 그러냐면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고 뒤돌아 보아서 깨달은 것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고 자기와의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화해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해의 말을 선포하는 사도적 직분까지 주었다는 것이 고후 5장의 자기 변론이다(고후5:11-21). 이것이 바울의 사도적 자기 변호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정통 유대교 출신임을 내세운다. 그래서 족보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니까 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덕을 볼려면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것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들의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를 자랑하면서 곧 사도들의 추천장을 내보이면서 자랑을 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장이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원수 노릇했던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보았다고 갑자기 사도가 되었다고 까불고 다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말한다.
또 무엇을 자랑했느냐면 성령의 엄청난 체험(고후10-13장)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환상을 보고 이적을 행하고 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권위주의적으로 행사했다. 이런 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잘 먹혀 들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바울이 자기들 하고 같이 있을 때는 아굴라 집에서 겨우 천막이나 짓고 했던 사람이 우리에게 감히 헌금으로 부양해달라고 말도 못했는데 에베소로 간 뒤에는 밑에 있는 자들을 시켜서 자꾸 돈 내라고 한다. 이제 보니까 바울이 우리 앞에 권위행사하지 못한 게 정식 추천장이 없어서 그랬구나! 우리 있을때는 말도 제대로 못한 친구가 저리로 가서는 편지로 아주 묵직하게 쓴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변호하는 것이다(고후10-13장).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도 모자라는 게 하나도 없다. 족보로 말하면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냠민 지파요 할례로 말하면 나도 팔일만에 할례 받았다. 또 성령의 체험으로 말하면 너희는 하늘의 일층도 못갔지만 나는 삼층까지 갔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또 사도의 표징들-기사,이적,권능-도 너희 못지 않게 나도 다 행사했다고 한다. 치유의 능력:치유를 암, 앉은뱅이만 고치는 것이 이 치유가 아니고 인간의 모든 아픔을 다 치유하는 것이 치유이다. 인간의 갈등,허무,낙담,못된 버릇, 등에서 변화되는 것을 치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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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도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자세로 일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섬기기만 했는데 그것이 되어서 미안하다고 나 용서해 달라고 아주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이 ‘내가 매를 들러 오랴’ 그런데 그 중에 추천장 문제로 말하면(고후3장) ‘내가 왜 추천장이 필요하냐’ 여러분들이 나의 추천장이 아닌가 말이다. 나의 복음 선포-사도적 행사-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것이 나의 사도직의 바름 그리고 나의 복음의 바름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명이지 무슨 종이에 쓴 추천장이 필요하냐고 바울이 말한다. 이 추천장을 이야기하는 그들은 꼭 유대인들이다. 왜 그러냐면 문자주의자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모세 율법이 돌판에 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자주의만 주장하는데 그것은 문자는 죽이고 영이 살린다. 내가 복음 선포 했는데 그 복음 선포를 성령이 너희에게 강하게 역사해서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그 영의 역사가 진짜 추천장이고 그것이 새 언약-영적인 언약-에 합당한 복음 선포이고 사도직의 행사이다. 모세 율법은 사라져가는 영광이라고 한다(고후3장). 그래서 모세가 사라져 가는 영광을 감추기 위해서 수건을 썼다. 그래서 돌판에 수건이 끼워져 있어 가지고 너희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 마음 속에도 수건이 끼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예언할 때 그 언약을 돌판에 새기지 않고 ‘마음 속에 새긴다’고 했다. 이렇게 지금 바울이 공박에 대해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과거에 핍박자였다는 공박에 대해서는 바울은 고후 5장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사실 핍박자였다. 왜 핍박자였는가?(고후5:16).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육신대로 안다’는 소리는 역사적 예수를 안 알겠다는 그 소리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육신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에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핍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진짜 메시야임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뒤에는 더 이상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꾸 유대 족보,율법을 주장하고 하는 자들은 지금 육신적인 관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핍박자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주셔서 그를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대속의 죽음에 완전히 녹아버려서 내가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라고 나오는 것은 바울의 문제의 특징으로 ‘자기’를 두고 한 소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죄인이 그의 대속의 죽음에 힘입어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옛 것은 다 지나가 버렸다. 더 이상 내 과거를 묻지 말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요 원수된 나를 용서해주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은 그 사랑으로 나를 녹인 하나님이 이제 나를 자기에게 화해시킬 뿐 아니라 화해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직까지 주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전권대사(사도)로 하나님 대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원수노릇하지 말고-내가 옛날 바리새 시대에 그랬듯이-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 되어가고 호소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후5:11-21은 구구절절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카테고리가 화해라는 것이다.
바울신학 제 21강
지난 시간에는 바울의 구원론 중에서 그리스도-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가 하는 것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점이 의인됨이다. 오늘은 주로 이것을 보도록 하겠다. 다른 그림들-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한다. 또는 그의 속죄의 제사와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백성 곧 하나님 자녀들이 된다. 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형상에 같아짐으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 영광에 참여한다-을 많이 썼다. 이런 것들이 대개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중심 카테고리인 의인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선 바울이 설명하는 의인됨을 보겠다.
롬3:21-26까지 살펴보겠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됨의 가장 중요한 논지가 집중적으로 천명이 되어 있다. 사상적으로도 주석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부분이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증거된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관계 없이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인데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또는 율법을 잘 행하는 자들이나 그들에게 아무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를 져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이 본문이 바울 구원론에 가장 중심이 되는 본문으로서 중요한 개념들이 다 나온다. 그런데 문법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주석하기가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부분이 24절과 25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απολυτρωσεως-으로 통하여 그의 은혜-αυτου χαριτι-로, 선물-σωρεαι-로 -은혜성을 강조한 말로서 δωρεαν도 사실은 은혜라는 말이다-또 모든 사람들이 의인된다는 말이다. 주어는 23절의 παντες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곧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δωρεαι 공짜로-로 의인이 된다’
25절에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ον-관계대명사-하나님께서 ιλαστηριον으로 προεθετο(내세웠다) δια πιστεως ο Θεος, εν τω αυτον αιματι(믿음으로 우리가 덧입는다고 하는 괄호 속에 들어가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δια πιστεως ο θεος는 괄호 속에 넣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εν τω αυτον αιμαιτι(그의 피로 말미암는 ελαστηριον으로 내세웠다. εις-목적구-는 ενδειξις를 위해서 그렇다. 이 ενδειξις는 자기의 의로움-της δικαεοσυνης αυτον-을 ενδειξις 하기 위해서 그렇다. ενδειξις를 번역을 안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서로 전혀 반대되는 의미로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필요하느냐면 δια την παρεσιν παρεσις 때문에 필요했다. προγεγονοτων(과거에 지은 죄들을) ανοχη(오래 참음 가운데) παρεσις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δικαιοσυνη)를 ενδειξις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ιλαστηριον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ον προεθετο ο θεος ιλαστηριον(지금 이때에 그의 의를 ενδειξις하기 위함이요) εις ενδειξιν της δικαιοσυνης 그가 의롭고 또 예수를 믿는자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이다‘로 되어 있다.
롬 3:24-26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다. 그런데 크게 두 종류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해석이 있고 하나는 현대적인 해석이 있다.
(전통적인 해석)
전통적인 해석은 ελαστηριον을 영어로 라틴말에서 온 propitiation으로 해석을 하든지 아니면 expiation으로 해석한다. propitiation이 무슨 뜻이냐면 신의 진노함을 풀어 버리는 제사라는 말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바울이 지금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해석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래서 죄인들이 다 죽음을 징벌로 받을 처지에 있다. 아니면 진노 아래 있어서 죽음의 징벌 아래 있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징벌을 십자가에서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진노함을 풀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진노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을 대하게 했다는 것이 proptitiation이다.
그런데 ιλαστηριον이 헬라오로 이런 뜻이다. 신의 진노함을 풀어버림, appasement(달램)-제사를 드려서 달램-을 통해서 노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 그런 저열한-비열한-사상을 적용할 수가 있느냐? 어찌 헬라의 저열한 신들과 같이 인간이 제물을 바쳐서 노한 신의 노를 풀어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성경에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이시고 또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어 내어주셨는데 어떻게 자기가 내어준 제물로 자기 노가 풀어져 버렸다고 할 수 있느냐? 는 논리에 거부감을 느낀 현대학자들은 propitiation이라고 하지 말고 expiation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expiation이라는 말은 ‘죄를 덮어 버림’이다.
그러니까 propiation은 제사를 드려서 노한 신의 노를 풀어버림이고 expiation 은 그 죄를 덮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성전에서 제사 행위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의 죄 위에 제물 피를 뿌려서 덮어 버려가지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안 보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더 이상 죄인들로 간주하지 않음’ 그래서 expiation으로만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최근 영어 번역에는 대개 expiation으로 번역이 된다. 그러나 보수주의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바울의 책 중에 로마서 자체내에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엄연히 중요한 개념이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또 롬8:3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고 정죄했다고 하고 또 갈3:13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한다. 또 고후5:21에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죄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죄로 만들었다’ 할 때 이말은 바로 αμαρτια 또는 히브리어로 ישׁתכ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로 protitiation을 말한다. 이런 언어들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징벌하시고 저주하신 형법적-penal-카테고리를 적용해서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현대인들의 생각이지 바울의 객관적인 용어를 보면 바울이 전부 형법적인 언어를 쓴다. 그러니까 porpitiation이라는 말을 바울이 지금 ιλαστηριον에 의도했다. 이것을 고집하는 학자들이 대개 보수주의-복음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 이것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형법-penal-적인 것은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의 사건이 되었느냐? 즉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다. 어떻게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고 화해를 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이루게 하나를 할대에 전통적인 개혁주의,복음주의자들의 설명을 penal substitution theory라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substitution-으로서 하나님의 형벌-penal-을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함,심판,징벌을 피하게 되느냐?’ 즉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우리가 그 하나님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이것을 갈3:13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롬8:3/고후5:21). 그러니까 롬3:25절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할려면 ελαστηριον이 expiation을 포함할지 모르지만 너무 약하고 더 중요한 요점은 propitiation에 있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한다. 최근 학자들 중에 이것을 굉장히 강조한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L.Morris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도 쓰고 일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썼다.
그러면 εις ενδειξις라는 말은 영어로 to porve로 쓴다. 이 말은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로 해석한다. παρεσις는 overlooking(간과함)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서 본문을 다시 한번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선물로(공짜로) 의롭다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απολυτρωειως-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면 25절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그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풀어버리는 우리 대신 벌받는 대속의 제사로 바쳤다. 이것은 그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왜 그의 의로움의 증명이 필요했느냐? 그의 오래참음 가운데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들을 그가 지금까지 간과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때에 자기도 의로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기 위해서 자기 의를 ενδειξις(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이냐면 이때의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법정의 개념-죄인들을 벌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셔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었다. 하나님의 의가 증명되어야 할 입장에 놓였다. 하나님이 정말 악인을 벌주고 의인을 상주는 분으로 되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은 죄를 간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증명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를 지금까지 인간들이 짓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사실은 의로운 진노함을 나타냈는데 그 진노함을 인간들에게 다 풀면 인간들이 진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 대신으로 세워서 그에게 하나님의 의에 의한 심판을 대신받는 제사로 삼아서 인간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버리게 했다. 26절에 ‘그래서 이제 이때에 하나님이 이 예수를 그리스도의 ιλαστηριον(구속의 행위)에 근거해서 죄인들을 예수를 믿는 믿음을 보고 의롭다함에도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고 자기가 의로움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타협하지 않고 예수 믿는 자들을 지금 현재 의롭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다시말하면 전통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죄인들을 심판해서 진멸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propitiation으로 내세워서 그로 하여금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도록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타협되지 않고 천명되었다. 벌주는 의는 천명이 되는데 그것은 예수가 대신 받게 함으로 된다. 동시에 그의 사랑이 또 증명됨이 전통적인 해석으로서 이것을 penal substitution theory 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출처] 바울신학 [19~21강]김세윤 교수|작성자 Oh My Jesus Chr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