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바울신학2-김세윤 교수

바울신학2-김세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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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4.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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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2-김세윤

(현대적인 해석)

독일의 W.G.Kummel(퀨멜) 이래로 대부분의 독일 학자들과 상당수의 영미 학자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 W.G.Kummel은 이 두말-ενδειξις,παρεσις-의 사용법에 대해서 자세한 연구를 통해서 ενδειξις가 ‘증명’이라는 뜻도 있고 παρεσις가 간과함이라는 뜻도 있지만 또 무슨 뜻이 있느냐면 to show(나타내기 위해서) 또 παρεσις 는 to pardon (용서함)이라는 듯도 있다. 그래서 롬 3:24-26은 사실 이런 뜻으로 쓰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후로 많은 학자들은 롬3:24-25은 바울전에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여기 인용을 하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믿음으로 말미암는’-δια πιστως-라는 말 같은 것을 바울이 삽입을 해가지고 약간 보충해서 지금 여기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울 전에 교회의 신앙고백인 ιλαστηριον이 이제 현대적인 해석을 하는 사라들 사이에서는 해석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expiation이라고 한다. propitiation은 다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ιλαστηριον 이 성전의 지성소에 언약궤의 뚜겅을 시은좌라고 해석도 하고 또는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죄를 덮어버림으로서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케 하는 화목제사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로 해석한다.

그런데 다 어디에다 주안점을 두냐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 제사장이 대 구속의 날-렘16장-에 대제사장이 성전의 가장 깊숙한 지성소에 가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놓인 시은좌 위에 피를 뿌림으로서 과거 한 해 동안 지은 이스라엘의 죄가 다 덮혀지고 그래서 다 용서되고 그래서 과거 일년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들로 말미암아 손상되었던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간에 언약의 관계가 다시 한번 새로워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대 구속의 날에 ceremony였는데 지금의 바울전의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와 같은 성전의 대 구속의 날에의 제사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새언약을 세운 새언약제사이다. 죄가 언약관계의 파손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대 구속의 날에 속죄 제사들은 죄로 말미암아 파손된 언약 관계를 수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함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시작 할려는 것이다. 이것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로 속죄의 제사 곧 언약을 새롭게 하는 제사로 본 것이다. 바로 바울 전의 교회가 이렇게 보았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현대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움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이때 하나님의 의는 더 이상 법정의 개념이 아니고 언약의 개념-관계론적 개념-이다. 곧 구약에서부터 오는 하나님 의의 가장 기본적은 개념은 관계의 신실함이다. 구약에서 의라는 것은 הקדצ 또는 צדק는 원래 관계론적인 개념으로서 관게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함이 의라는 것이다.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여 옳바른 관계를 유지함이 ‘의’이다. 그래서 부자간의 관계에서 아버지에게 아들을 잘 양육할 의무가 나온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잘 양육할 때 아버지가 의롭다고 한다. 아버지가 의롬움은 부자간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부자간의 관계에서 아들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가 있다. 아들이 그 의무를 다할 때에 부자간의 관계를 옳바로 잘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이냐?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언약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냐? 또는 우주(인류)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하나님과 온 피조물의 관계의 대표적 표현이지 그 원칙은 똑같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노릇해 주시고 우리가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장초주와 피조물의 관게이고 그의 특별한 대표적 형태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라는 언약의 형식에 의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언약의 관계를 이스라엘과 맺음으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줌이고 이 언약의 관계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해서 사는 의무를 진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런 의미로 언제 의로운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 이스라엘은 의롭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란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성이 하나님의 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성으로서 그것은 항상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노릇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었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움을 펼쳤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주겠다는 언약을 지켰다는 말이다. 그 언약에 나오는 의무를 신실하게 지켰다는 말이다. 또는 사사들의 성전에서 블레셋 족속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이기게 하신 것을 하나님이 그의 의로 나타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언약의 신실함인데 이것은 항상 구원의 힘으로 나타난다.

지금 현대적 해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 이해한다. 그것은 구원의 힘으로 나타나는 언약의 신실함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 이전의 예루살렘 유대교회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것은 유대 성전 신학의 종말론적 완성으로서 과거에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죄-언약을 지키지 않은 죄,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는 당연히 벌을 초래하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불의하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겠지만-불의하지만-하나님은 의로우신다. 하나님은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내어주심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렇게 세워서 언약을 새롭게 하는 제사로 내세운 것은 속죄의 제사-언약을 새롭게 하는 제사-에 힘입어서 언약을 지키지 못했던 하나님 백서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사건이다. 곧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나타냄이다. 자신이 너희 하나님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을 지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다. 언약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하나님 백성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속하는 그리하여 언약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시 한번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서 자기의 부요한 은총에 의지하여 살도록 만듬-하나님이 내가 너희 하나님이다-이 언약의 자기 쪽의 의무를 지킴이다. 이것이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쪽의 의를 나타낸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과거에 지은 죄들을 용서해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언약을 파기해서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이 징벌해버렸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도 못한다. 그러면 언약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함이 못된다. 그들을 용서해줌으로서 내가 너희 하나님 이라는 하나님 노릇해주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사 곧 언약을 새롭게 하는 화목제사로 내놓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현대적 해석이다. 더 자세히 보려면 전통적 해석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주석이 I.C.C에서 나온 Cranfield의 로마서 주석이다. 그러나 현대적 주석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주석은 E.Kasemann(케제만) 주석이다. 이 두 주석이 1973년 무렵에 동시에 나왔다.

현대적 해석에 의하면 이와 같은 바울 전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수용을 하고 여기 지금 δια πιστεως 라는 말을 삽입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줌 즉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셔서 속죄의 제사-새언약의 제사-로 내세워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되게 함을 믿음으로 덕입는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말은 바울이 보충함으로 바울전의 교회의 신앙고백-바울전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일단 유대인들에게만 적용-을 이제 확대해서 온 인류에게 바울이 적용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22절에 말한바와 같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27절,31에 더 강조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둘 다 믿음으로 구속에 덕을 입음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이런 식으로 지금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덕입는데 대해서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대인들에 대한 언약의 성취로 해석했던 것을 바울이 온 인류에게 확대해석한 것이다. 현대적으로는 이렇게 해석을 한다.

두 해석이 서로 다른데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 바울이 바울 전의 신앙고백을 많이 인용한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상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바울 신학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제 그래서 한 학기 정도의 토론할 과업으로 들어간다.

나는 내 책에서 둘다 옳다고 보았어요. 어느 것을 고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좀전에 이야기한바 롬8:3/갈3:13/고후5:21절 등과 더불어 본문을 해석하면 이 전통적 해석도 참으로 옳다. 철두철미하게 맞다. 더 나아가서 이 의인됨(δικαιουν)-to justificaiton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된다.’ 여러분이 소위 칭의론 또는 의인론이라고 하는데 to justification이 무엇이냐? 법정의 개념이냐? 그래서 의인이 무죄석방된다는 말이냐? 의인으로 선언됨의 말이냐? 소위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의인으로 무죄석방의 뜻이냐? 아니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감 그것이 의인됨이다. 의인됨이라는 것은 법적인 관계이냐? 그래서 선언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함(=무죄석방-의인이라고 인정함) 선언적이다. 법정의 판사가 ‘너 무죄’‘너 의인’ 그래서 ‘너 벌을 받을 필요없음’라는 그 행위냐? 최후 심판때에 일어난 그 판결이 여기에서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이냐? 아니면 관계론적인 개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감-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속에 있음-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노릇해주시고 우리가 그의 하나님 노릇해줌에 의존해서 순종해서 삶, 그런 올바른 관계를 맺음(들어감)을 말하느냐?

바울서신 전체를 보면 둘다 그런 의미가 있다. 이래서 바울의 믿음으로 의인됨이 문제를 일으킨다. 이 문제는 시간이 없으니가 앞으로 더 연구하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의인론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유산으로서 되었기 때문에 알고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바울의 의인론에 있어서 문제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도대체 ‘δικαιοσυνη του θεου’(신실성)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이냐? 지금 전통적인 해석에 의한 법정의 개념이냐? 아니면 구약에서 나오는 관계론개념으로서 도리어 하님의 구원행위(구원의 힘,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힘)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δικαιοσυνη을 받는 것(justification의인됨)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를 벌 을 주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자를 상을 주는 그런 개념이냐? 아니면 하나님과 관계론적인 개념인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의 힘들을 말하느냐? 다시 말하면 의인된다는 것은 단순히 무죄석방하고 의인으로 인정됨을 말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감을 말하느냐?

그 다음에 의인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냐?

바울은 δικαιουν(의인됨)-to justification 또는 δικαιουσθαι-ro be justified(의롭다함을 받음,수동태) 바로 이것을 율법의 행위가 없이 (율법 없이, 율법과 관계없이 롬3:21).

롬3:21 “Νυνι δε χωρις νυμου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 πεφανεερωται μαρτυρουμενη ουπο του νομου και των προφητων 율법과 관계없이 롬3:22 δια πιστεως-믿음으로만,δια χαρις,-은혜로만 또는 공짜, 바로 이것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윤리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 윤리는 어디에 근거하느냐? 우리가 율법의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의인으로 선언되면 롬6:1,14에 있는바 ‘자 죄를 더 짓자’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크게 하자. 소위 Antinomianism 즉 반규범주의,방종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 바울의 δικαιοσυνη (to justification)교리가 윤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또 한가지는 가령 슈바이쳐 또는 그전에 학자들이 지적한 바 바울의 구원론은 두개의 체계가 있다. 하나는 신비주의 체계 곧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συν χριστω) 그리스도 안에 내포됨되어서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해서 신비주의적으로 성례주의적으로(먹고 마시는 성례)와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는 세례와 먹고 마시는 성찬식의 의식을 연합하여 내포되어서 운명에 동참하는 체계가 있었다.

하나는 법적인 개념인 재판석 카테고리가 있었다. 이렇게 법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었는데 AD 10 세기 자유주의 학자들은 법적체계로 보고 헬라주의자들은 신비주의적(성례주의적) 체계로 다시 보았다. 그런데 슈바이쳐는 17세기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것은 유대교적 배경에서 나온 카테고리이고(그리스도의 구원을 해석하는 카테고리이고) 이것은 헬라 신비종교 성례사상에서 나온 카테고리이다. 이것은 서로 완전히 따로 논다. 통일되지 못하고서 슈바이처는 그렇지 않다.

이것도 헬라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유대교의 묵시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묵시사상의 메시야사상에서 나온것인데 메시야와 연합하는 것이다. 메시야의 운명에 동참함,이것도 유대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쳐는 바로 그것만 고정하고 그 나머지는 그전에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데로 주장했다. 이것과 저것은 따로 놓고 더 나아가서 슈바이쳐는 이것이 바울의 구원론의 중심이고 이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의 복음의 진수로 보았던) 이 구원론의 카테고리는 구체적인 것에 불과하고 슈바이쳐 언어로 한다면 이것은 바울신학의 주분화구(바울신학을 표현한 수단)이고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부차적인 곁다리 분화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서 교회 유대주의자들의 도전 때문에 논쟁용으로 갈고 닦아서 만들어졌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마치 바울의 구원론 중심인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울의 논쟁교히이다. 슈바이쳐는 바울의 구원교리의 근본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 가운데 바울의 윤리가 나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주고 부활했으며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가 새롭게 살아야 한다.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말 속에서 새로운 윤리가 나올 수 없고 도리어 방종주의가 나올 수 밖에 없다(반율법주의:율법의 행위를 철저히 부인하는 자들). 또 하나의 문제는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기껏해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빌립보서에만 나온다. 다른 서신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들은 달았다. 그래서 의인론을 논함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다 해결해야 되요.

진짜 서로 다른 주제가 바울의 구원론에 신비적 카테고리와 법적 카테고리도 혼합되지 못하고 엉성하게 있느냐?

이것이 하나고 둘째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윤리에 어떻게 연결되느냐?

세째 믿음으로 의인됨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아니면 곁가지이냐 별로 중요하지 않느냐? 이것을 해결하지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하함’을 정확히 해석함으로서 가능하다.

그래서 시간이 다가서 말할 수 없고 해결의 방향만을 설명을 하면 ‘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많은 책들을 참고 바랍니다’

해결방향 제시

1)믿음으로 의인됨 얻는다는 면에서

믿음이 무엇이냐? 이것은 나의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이것이 복음의 사건이고 복음이다. 왜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의인이 되느냐, 구원을 받느냐? 바로 열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우리 대신이며 대표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또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의 도미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참여하게 함 그리하여 구원을 받는다.그래서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말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그래서 신비주의 카테고리와 법정적 카테고리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믿음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왜 믿음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했음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대신 인정함을 우리를 내포시킨다. 이 믿음의 극화가 세례라 할 수 있고(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두개의 카테고리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이다.

또 하나 윤리의 문제, 두개 카테고리가 하나라면 더 이상 어느 것이 바울신학의 구원론에 있어서 어느것이 주된 카테고리냐 어느 것이 부차적인 의미 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면 그 문제는 다르게 제기된다. δικαιοσυνη, δικαιουν 원어가 로마서 혹은 갈라디아서 빌3장에만 나오고 다른 서신에 전혀 나오지 않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의 대답은 두가지이다.

가령 고전 1:30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또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등 고린도 전후에서도 나오고 살전 1:1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에수시니라’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한다. 여기에는 바울의 구원론이 펼쳐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농축된 언어로 나온다.

왜 펼쳐지지 않았느냐? 바울이 이렇게 쓴 교회들이 그처럼 그 구원론이 되지 않아서 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나 빌립보 교회, 로마 교회에 쓸 그런 이유가 있다. 둘째 고린도전후서에서 바울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원칙을 고린도의 지혜신학에 관하여 펼치고 있어요. 인간은 유사이래로 두가지 구원의 길을 항상 추구하고 있다. 인간의 자구책(자력구원)은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이 지혜를 쌓음으로서(문명을 발달시킴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것이 특히 헬라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선행이나 수양을 쌓거나 덕행을 닦아서 스스로 의를 쌓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 두가지가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자력구원 자구책이었는데 은혜로만,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초월해서만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강조하느냐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해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재적인 자원 동원해서 선을 쌓고 지혜를 쌓아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것들에 구원을 걸려고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잠나심과 헛된 것을 믿는 자기자신의 믿음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다. 이것을 바울은 육신이라고 함. 육신으로 하여금 자기주장으로 하여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여 지혜를 탐구하여 선행을 해서 구원을 얻을 수있을 것 같이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이고 율법이 지극한 해요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선행을 쌓아서 내가)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나에게 축볼하지 않고 못베기게 만들겠다. 내가 십일조를 이렇게 많이 하고 새벽기도를 이렇게 많이 했는데 자기가 나를 구원안하고 배겨?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위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율법행위라고(육신이라고) 했다. 율법과 육신-사탄-죽음 이것은 악의 순환이다. 그래서 완전히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은 이렇게 적용해야 한다. 신비적인 카테고리나 원리적인 카테고리가 분리된 것이 하나이다. 그래서 믿음의 현상이라는 것으로 다 해결이 된다. 이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데서는 안나오느냐? 다른 서신에서도 나오는데 그것이 펼쳐지지 않는 이유는 …

그러나 고린도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것은 지혜와 문제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그러면 문제가 하나 더 남았는데 윤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좀전에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의’를 관계론적으로 풀면 쉽게 해결되요. 의인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이다.
[출처] 바울신학2-김세윤 교수|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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