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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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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김 세윤 敎授 (미국 플러신학교 교수, 전 總神大 神大院 敎授)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는 미시적인 방법과 거시적인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서유니온에서 사역하고 있는 성경묵상은 성경을 자세히 보는 미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만으로 공부한다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된다. 이런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가끔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보는 기회가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거시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은 상호보완적이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하지만 가끔씩 전문가(신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A. 문제제기
1) 복음서 : 예수님의 가르침
마가는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고 나서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아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마가복음 1: 14 – 15을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公生涯를 하나님 나라 선포로 시작했다.
막 1 : 15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2) 서신서 : 바울(사도)의 가르침
그런데 서신서중 고린도전서 15 : 1 – 5을 찾아보면은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나와 있다. 특히 3절 후반부에서 5절 전반까지 4개의 小節(영어에서의 that절)로 福音을 說明하고 있는데 이를 要略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復活”, 즉 “ 그리스도의 十字架 ”가 된다.
예수님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점에서 출발하는데 그 문제는 이러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예수의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고전 15장 1- 5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고전 15장 1절에서 3절 중반까지가 서문이고 3절 후반부부터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요약되어 있다. 내가 전한 복음을 꼭 알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그 복음은 바울이 이미 선포했던 복음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서 이미 구원을 얻은 복음이다. 그런데 바울이 걱정이 되었다. 과연 처음 받은 복음위에 견고히 서 있는지 자기가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복음은 자신도 먼저 사도들로부터 받아서 고린도인들에게 전했다. 받고 전했다는 말은 유대 랍비들이 가르침을 선생으로부터 받아서 전승해 주는 전문용어이다. 그 내용은 모두 네 개의 節로 구성되어 있다.
고전 15 : 3 – 5
3절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초대교회부터 랍비들의 가르침의 전형이다. 받은 것 을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핵심)
4절 :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추가설명)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핵심)
5절 이후 (부활증거)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500여 형제, 야고보, 바 울에게 보이심 (추가설명)
그렇다면 1) 죽으심(十字架)의 意味와 2) 부활의 意味는 무엇인가 ?
그 다음에 5절 전반부에 베드로에게 보여졌다는 것 이 네 文章이 우리말 성경에는 절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다가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부활의 眞理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난 씨리즈를 이야기하고 있다.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고, 그 중에 일부는 죽고 태반이나 지금까지 살아 있고, 야고보(주님의 동생)에게 나타나고, 모든 使徒들에게 나타나고 마지막에 滿朔되지 못한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지금 이 부분들은 바울이 다 덧붙이는 것이다. 앞의 네개의 절들의 내용이 복음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절을 보자
고전 15:11 “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그러므로 나(바울)나 저희(다른 사도들)나 다함께 이 복음을 선포하고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이 복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도 이 복음을 믿는다고 한다. 이 복음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과 그가 사흘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이 두 문장 중심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문장들은 앞서가는 문장의 사실을 부가적 기능을 한다. 거기 성경대로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그리스도가 성경대로(according to scripture) 죽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것이 우리 죄를 해결하고 종말에 나타난 메시야 구원자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는데,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은 書信書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를 읽다가 서신서를 읽으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직접적으로는 거의 안 나온다. 나오더라도 가끔 나온다. 그 대신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선포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초두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자기 복음을 십자가의 道라고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자기는 그것만 선포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도들의 메시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까 ? 이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 일부 自由主義 神學者들은 이 차이점에 대하여 예수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 사도들의 메시지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 사도들의 서신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미리 結論부터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사도들의 메시지는 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가에 메시지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통하여(근거)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결과)이 주어진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어떻게 제자(사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는가 ?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가지 전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구약에서의 전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B. 4 가지 전제들
1. 創造思想(主) – 창세기 1:1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하나님만이 主人이시고 王이시다. 본래 히브리어에는 추상명사가 발달되지 않아서 우주(Cosmos)를 지칭하는 말을 그냥 하늘과 땅(天地)이라는 말로 썼다. 천지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지만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시고 땅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이 거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창1:26,27)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육체나 영혼등 어느 일부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니 사람의 외모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신 다스리는 副王(Vice-king)으로 세우신 것이다.
2, 타락 –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으로 땅에서 통치를 대신하게 하신다. 그러나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에 대해 대항하게 하여 인간은 사단의 종이 되고 사단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스스로는 피조물로서 제한성(결핍성)을 지니는데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증상이다. 로마서 6:23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삯’이란 단어는 로마시대 용병들에게 주는 품삵(월급)을 뜻한다. 즉 사단이 우리를 부려먹어 죄를 짓게 하고 그 삯으로 죽음을 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며 타락사상이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나무가 그 생명의 근원인 땅으로부터 뽑힘을 당했다면 그 나무는 죽은 것일까 ? 산 것일까 ? 물론 산 것이다. 왜냐하면 일정한 기간 물이나 양분의 공급이 없더라도 나무안에 비축된 물과 양분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 나무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양분의 계속적인 공급이 없으면 결국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성에서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있다’고 일컫어 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공급이 없어지면 인간은 결국 죽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었다’고 한다. 罪란 바로 하나님의 主人되심을 否認하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다. 人間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의 보호와 모든 능력과 자원을 제공받으며 살도록 지음 받았는데, 오히려 인간은 사탄의 꾀임을 받아서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 바로 罪의 本質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內的인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기能力과 智慧를 개발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맞게 된 결핍이나 고난을 해결해 나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人本主義 운동이다. 그 결과는 해결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대로 풍성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핍이다. 즉 부족함이다. 이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은 무한한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스스로 개발하여 왔다. 그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안된다.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여 科學이나 文明을 발달시켜 왔으나 그 결과는 인간에게 더 큰 죽음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성의 황폐화로 인하여 이웃사이의 관계가 삭막해지고 인심이 각박해졌다. 과학이 발달해서 더 살기 좋은 樂園을 이룬 것 같았지만 반대로 더 많은 어려움과 공해를 불러 일으켜 왔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모습이 이러한 것이다. 11, 12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운동 즉 문예부흥운동은 로마-그리스시대의 찬란했던 문명을 복구하려한 운동인데, 이 운동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대표적인 人本主義 운동이다. 인간은 결핍을 극복해보려고 지혜를 발휘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더 큰 타락을 가져왔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떠난 결과가 무엇인가 ? 그것은 인간성의 황폐와 결핍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탕자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회복과 부요함이 그에게 주어졌다. 아버지께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잔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풍성한 자원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만 부요함(풍요)이 있다는 것이다.
3. 救援 – 세번째로 言約思想이 있다. 언약은 곧 선택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한번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음이다. 언약이란 타락한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원래 王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행복하고 혼자 부요함을 누리면서 잘 살 줄을 알았는데 그 결과는 반대였다. 빈곤함과 결핍이었다.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그 결핍을 보충하려고 투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여 내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결핍은 그러한 방법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언약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다시 너희들의 왕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타락전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 나는 너희의 하나님(王)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 는 이 말이 바로 언약의 핵심문구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친히 너희의 하나님 즉 王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方法이 바로 인간과 언약을 맺는 것이다.
4. 終末思想 – 마지막으로 종말 사상이 구약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하셔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先知者들을 통하여 예고하셨다. 그러므로 그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 다시 한번 올바로 연결되어서 즉 탕자가 죽음의 상태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상속자로 회복이 되어서 아버지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고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나무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이 다시 한번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뿌리박아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어서 사는 삶을 永生이라고 한다. 영생이란 영원한 삶이란 말이 아니고 오는 세상의 삶이란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원한 삶이라고도 하지만 죽음이 완전히 극복된 고난이 없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全知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全能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참여하는 삶이므로 고난이 없고, 결핍이 없는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같이 됨 그것이 긍극적인 의미로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같이 됨이 인간 스스로 내재의 가능성 속에서 찾는 아담에 게 있었던 것같은 인본주의의 그 환상에 인간이 늘 젖어 있다. 인간이 만물의 근원인 것 같고 인간의 내재의 자원, 지혜를 개발하고 하면 인간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가게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속에서 살면 하나님 나라에 살면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어서 하나님 같이 된다. 神的인 삶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종말에 약속된 구원이다.
C.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바로 舊約에서 약속한 그 구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구약적 전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인간이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구원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것일까 ?
그것이 바로 막 1:15의 내용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임박했다고 했다.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1). 구약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박했음을 우리에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고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는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유대 묵시문학가들같이 땅의 물질적인 유비를 써 가지고 현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말하면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며 구원을 받는 것이며 바로 이런 원칙적인 신학언어를 주로 쓰셨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통치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도 하나님은 마땅히 王으로 主로 군림하셔야 하나, 이 땅에서는 그의 왕권을 찬탈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들에 의해 그의 왕권이 무시되고 그의 “뜻”이 거스려지고 있다. 고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땅위에 사단의 세력을 꺾고 그의 통치를 세워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 그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빌라고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주로 역동적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2) 하나님 나라를 비유(PARABLES)로 가르치셨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는데, 여러 비유 중에서 잔치비유를 즐겨서 가르치셨다. 구원을 큰 잔치로 비유한데서 온 것이다. 잔치 중에서도 특별히 혼인잔치 비유로 가르치셨다(요 2:1 – 11 참조). 잔치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바로 잔치의 상징성 때문이다. 잔치에는 결핍의 상대어인 풍요와 배부름이 있다. 즉 만족함이 있다. 기쁨과 사랑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에 참예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부요함이 있다. 인간의 결핍이 해결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반면에 사탄의 나라의 특징은 罪와 죽음이다. 그래서 사탄의 나라를 죄와 죽음의 나라라고 한다. 사탄의 나라는 결핍성, 욕구불만 슬픔/아픔, 생존경쟁/갈등 투성이다. 부족하기에 서로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면서 살아간다. 생존경쟁에 빠져있다. 제한성에 갇혀 있는 것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제외되어 유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주장하고 또한 이웃에 대하여 자기주장하니까 착취와 경쟁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을 이룬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다른 사람을 내 從으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즉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늑대이다. 자존심의 대결이다. 인간 사회는 욕심의 대결장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 즉 혼인잔치의 비유로 설명하시는데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풍성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는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1)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아울러 2) 상속(기업)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속의 그림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데 특별히 눅 12 : 30에 보면 “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상속) 주기를 기뻐하신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부요함과 상속의 개념이 같이 들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죽음, 고난, 결핍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는 유대 랍비의 묵시문학이나 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D.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점
1.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임박할 실재의 나라이다.
2. 아울러 하나님 나라는 현재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예수의 강조점이 있다.
눅 11: 14 – 23
눅 11:14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 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눅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눅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눅 11:1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 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눅 11: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눅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 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 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눅 11: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 누느니라
눅 11: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는 것과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예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조롱하였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너희 아들들도) 귀신을 내어쫓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아들들은 (너희자신) 누구를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쫓는냐고 반문하셨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원래 유대인의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적대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능력)으로 즉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1)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기 이미 임했음을 증거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탄의 나라(귀신의 나라)에 속한 자를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셨다. 믿음으로 이동시켰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귀신의 힘을 극복하고 구원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실현된 것이다. 귀신이 쫓겨감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됨을 의미한다. 벌써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로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이적을 동반한 것은 (귀신을 내어쫓고,병자 고치심)하나님 나라의 실현(시위 :Demonstration)이다.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치유’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너무 표면적인 해석만 하여 이 치유를 단지 육신의 병고를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하게 될 때 잘못된 구원론, 성령론과 맞물려서 신앙의 미신화를 초래하게 되며 성령을 마력적인 존재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또 이와 반대해서 구원을 단지 來世의 ‘오는 世上’의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이 관념화 ,추상화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실존의 전 영역에서의 ‘치유’로 이해해야 한다. 고난 가운데 있는자가 하나님 나라의 새생명에 동참한 것이다. 치유의 사역은 죽음의 증상(질병,고난,지혜 없음,우울증,외로움 등)들을 극복하여 온전케 함이다. 감기 걸리면 재채기, 콧물, 목아픔, 熱등의 감기의 증상이 나타나듯이, 죽음도 증상이 있다. 지혜 없음, 가을이 되면 우울함,병,피곤함 이러한 것들은 바로 죽음이 드러나는 증상들이다. 치유는 단순한 병고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치유의 사역이다. 불치의 병인 암을 고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못된 독재자(김정일, 전두환)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 그가 변화되어 새 삶을 살고 바른 정치를 한다면 이 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겠는가 ?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치유의 사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 병 고치는 것과 복음을 전하여 그를 삭개오처럼 변화시키는 일 어떤 일이 더 큰 일인가 ?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사역이 전인적인 온전한 치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 즉 치유하여 온전케 하셨다. 삭개오는 주님을 통해서 치유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또한 이웃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되었다. 뒤틀려진 관계가 바르게 되었다. 육신의 병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이다. 빈곤과 정치적 압박도 고난이다. 구원(치유)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되는 것이다. 모든 참된 것과 선, 아름다움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모든 악, 독, 썩어짐은 사탄으로부터 온다.
안식일
예수님은 그 당시 전례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다.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셔서 더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 “심히 좋은 ”창조를 즐기며 쉰 날이다(창2:1 – 3). 그러나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하여, 그것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고 사단의 주권아래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하지 않고 그의 창조를 고치는 일 ,곧 구원의 사업을 하시는 것이다(요5:17-21).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은 원래의 의미로 안식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극적인 증명이다. 이에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병자를 치유함은 병든 창조를 고쳐 하나님의 “심히 좋은”창조로 종말론적으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대로의 안식일이 있도록 한다는 사실의 상징적 또는 극적인 증명이다. 즉 예수의 안식일에의 치유활동은 사단의 통치아래 병든 하나님의 “좋았던”창조를 사단의 통치 밑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다스림 밑으로 가져와 치유하고 원래의 “좋았던”상태로 회복하여 진정한 ‘안식일’이 있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극적인 천명이었다. 안식일은 결핍에서의 회복과 관계 있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 天地創造를 완성하시고 일곱째날 安息하셨다. 창조를 完成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자기 스스로 일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즉 자기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 나갔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종교라고 만들어낸 것은 모두 지혜와 선행과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는 지혜와 선행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 즉 자력구원을 표방하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자각), 힌두교, 마니교, 플라톤 철학을 비롯한 헬라의 종교(영지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을 통한 구원의 길을 표방하고 있다. 힌두교의 경전인 리그베다에서 베다라는 뜻은 헬라어 ‘οιδα’ (오이다 — 알다,知)와 같은 의미이다. 타락한 인간은 지혜를 극대화하여서 이것이 교육과 연결되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혜를 개발한 노력이 역사를 살펴보면 계속되어 왔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농업혁명)으로 인하여 소비재를 비롯하여 많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고, 농업혁명으로 풍요한 양식을 가져왔으며, 의학, 통신, 교통이 발달하였다. 이와 아울러 죽음도 더 크게 확대되었다. 통신의 발달로 우리의 삶이 노출되고 있다. 개인의 정보가 노출되고 있다. 교통의 발달은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건축및 토목공학의 발달로 큰 다리를 건설했으나 더 큰 재해를 가져왔다(성수대교 붕괴). 농기계(경운기, 트렉터)의 발달로 인하여 농민들이 기계화되어 편리한 면도 있지만 기계를 잘못 다루면 목숨을 잃거나 더 큰 재난을 당한다. 소비자 사회는 물질주의에 빠졌고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발달은 해결이 아니라 더 큰 죽음을 가져왔다.(성수대교 사건, 택시강도, 지존파 등) 과학발달및 지혜가 개발되면 될수록 죽음은 더욱 더 극대화되고 공해, 인간성 황폐, 억압과 감시가 더 심하다.
이와 반대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회피운동 같은 것이다. 그래도 그 안에 참만족이 없고 결핍이 있다. 죽음이 있다.
안식은 바로 재창조의 축복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일과 관계되어 있다. 안식일은 종말의 때에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이다. 십계명중 제 4 계명은 창조의 완성에 대한 안식의 기념이다. 동시에 종말에 있을 안식일을 고대한다.
안식의 반대인 ‘일을 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 인류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풍요의 상징인 에덴에서 추방 당하자. 자신의 삶을 위해 일해야 했다. 땅을 일구어 나가면서 그들은 문명을 이룩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문명낙관론’이 환영받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형태나 공산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피조물은 피조물의 제한성(결핍성)으로 인해 스스로 삶을 확보할 수 없다. 인간의 ‘일함’을 통해서 인간은 어느 정도 삶을 확보하지만 이 삶은 항상 죽음을 동반한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 한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삶과 자유는 확대되었다. 이와 아울러 죽음의 속박도 확대되었다.
안식일 지킴
안식일은 하나님의 하나님(주인,왕)되심을 고백하는 날이다.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생명의 근원이 있고 풍성함이 있음을 고백하는 날이다.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자력구원을 의미한다. 올바른 질서가 아니다. 죽음을 가져온다. 구약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과 행복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의 일을 삼가야 된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치유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결핍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안식일에 손 마른자를 치유하셨는데 손이 말랐다는 것은 결핍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풍요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이러한 고난은 바로 죽음의 증상들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일로부터 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엿새 동안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6일 동안 돈을 받고 의술을 행하였다고 주일에 아무런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업으로서의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울러 주일은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북돋우는 날이 되어야겠다. 교인끼리 만나서 교제하고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지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잔치와 상속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이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는데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한 것을 암시한다.치유를 주로 안식일에 하심으로해서 하나님 나라가 창조를 다시 한번 심히 아름다운 상태로 만들어 우리 모두가 생명의 풍성한 상태로 가게 한다는 것이다.
E.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
예수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더불어 “온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 또 수동형으로 “주어진다”. 인간이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받다”등의 언어를 사용한다. 반면에 “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라는 말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주 독특한 언어이다. 유대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확장하는 내재의 현실이 아니다. 초월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즐겨 쓰는 용어인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거나 ‘확장한다’는 표현은 일체 쓰지 아니한다.
이러한 예수가 즐겨쓴 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가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1) 초월성과 (2) 은혜성이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초월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초월자가 아니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자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은혜성이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확립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의 영역에 들어와 그 주권의 복(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초월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에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초월성과 은혜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가지 초월성과 은혜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때 자유주의는 문명 낙관론을 주장하였다. 신학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신학으로 정치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천지개벽처럼 갑자기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열심당(열혈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정의와 자유체제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메시야 즉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메시야가 나타나서 다윗의 왕국을 지상에 다시 재건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로마로 부터 자기들을 해방하여 새로운 다윗 왕국을 지상에 재건할 것을 꿈꾸어 왔다. 그들은 혁명으로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예수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은혜성과 초월성이다. 하나님이 초월해 계셔야만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내재의 것은 제한성(결핍성)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제한된 자원을 다 동원한다해도 극복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져온다. 그러므로 제한성 밖에서 무한하신 이로부터 구원이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초월해서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성과 은혜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온다”, “들어간다”, “받는다” 라는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물론 2 차적인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성과 초월성을 망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중요한 비유들을 사용하셨다. 열혈당원들이 생각했던 식으로 전쟁이나 혁명을 통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유대 묵시문학가들처럼 천지개벽으로 온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마 13장에 나오는 비유의 성격들을 이해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몇 가지 성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누룩과 겨자씨 비유는 쌍둥이 비유이다. 예수님은 종종 쌍둥이 비유를 가지고 말씀 하셨다.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비유,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등이다. 이것은 또한 여자와 남자의 하는 일로 양분하고 있다.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외형적인 확장을 의미한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일년생 관목으로 가지가 많은 식물로 자라간다. 그 가지 속에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된다. 여기서 많은 새는 랍비문학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많은 민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긍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해서 많은 새들이 깃들 것을 또는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죽음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부풀린다는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확장시켜 나가시는데 우리의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룩비유는 여인이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한다. 이 비유는 여인과 관계 있는 비유이다.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결국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이 비유는 천국의 내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지만 천국은 자라간다.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신다. 이 비유는 천국의 은닉성을 암시한다. 누룩은 가루속까지 파고 들어가 부풀어 올린다. 아울러 필연적으로 자라간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1) 은닉성 (2) 점진성 (3) 필연성이 있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거대한 로마제국내에서 갈릴리에서 나사렛 출신 예수가 어부 몇 명과 여인 몇 명으로 시작한 아주 미미한 운동이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무시해도 좋을 만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 오늘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지 않는가 ?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 (모든 민족을 의미한다)이 깃들일 정도로 자라난다. 온 세상이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을 통해서 온다.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오는가 ? 억압이 아니라 말씀으로 설득해서 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예수님은 弟子道를 사랑의 두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2.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계명으로 구약의 모든 계명을 요약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삶의 법칙으로 주었다. 사단이 인간을 꿰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지게 하고 자기주장하게 하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게하여 착취의 원칙으로 나타나고 그럼으로 갈등과 고난을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반대는 우상숭배이다. 자기주장이다.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이 맘모니즘이다. 돈에 대한 우상숭배는 돈으로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니까 우상숭배는 곧 착취의 삶을 요구한다. 그것은 갈등과 고난을 낳아 죽음의 길로 이끈다. 오늘날 우상숭배란 돌이나 나무조각에 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맘몬 즉 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딤전6:10).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도 하나님의 부요함을 깨닫기 전에는 돈이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결핍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돈을 착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부요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이다. 삭개오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몰라서 착취하였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부요함을 깨닫고(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샬롬이 임한 것이다. )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다. 이웃을 압제하는 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삭개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으로부터도 소외 당하였다. 그래서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돈을 숭배하는 자이었다. 삭개오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였다.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을 때 오히려 근심하며 돌아갔다. 착취하여 많이 소유하면 행복이 보장될 것 같으나 오히려 고난이나 갈등이 더 커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샬롬 즉 고통대신에 자유와 평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삭개오는 하나님을 선택함에 따라 샬롬이 확대되고 불의 대신에 정의가 확대되어 간다. 그것이 하나님 통치에 있어서의 삶이 그만큼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가 점차 확대되어간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에 따라 즉 두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루어진다. 첫 계명은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우상숭배하면 착취를 낳고 갈등을 낳고 죽음을 확대시킨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에는 샬롬이 확대되고 그러니까 초월해서 온 은혜로운 통치의 힘이 우리를 성령으로 설득해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하면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확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점진적으로 아주 가시적으로 더 많은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지금 하나님 나라가 왔다.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나라 법에 따라 성령의 설득으로 우리가 진짜 우상숭배를 버리고 타락의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중에 시시각각의 가치판단과 윤리판단에서 사랑을 베풀도록 시시각각으로 나를 주장할 것인가 ?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 판단하는 상황에서 사단의 말을 들으면 이웃과 나와 함께 고난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땅에 샬롬이 확대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도의 덕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누누히 강조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오른뺨을 치면은 왼뺨까지 돌려대고 맞는 것이다. 그것이 이웃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헌신이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반대는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은 롬 1장 후반부에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싫어하면 결국은 우상숭배로 빠지게 되어 있다. 중간지대는 없다. 하나님의 대용품을 만들어 섬긴다. 우상숭배는 자기주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은 부요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을 가져온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자기가 열심히 돈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죽도록 일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럴수록 죽음은 더욱 더 확대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타나는 양상이 바로 마약, 폭력, 변태적 성욕, 지존파, 르완다, 소말리아 사태 등이다.
인간의 타락 때부터 사탄의 나라가 지배하고 있다. 이 나라가 계속되는 동안에 예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출범되었고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사탄의 나라는 끝이 날 것이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시험 때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선전포고를 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탄의 등뼈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그 사탄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고 완전한 제거는 주님께서 재림할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시 110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사탄을 완전히 정복할 것에 대하여 네 원수(사탄)로 네 발등상 될 때까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탄을 완전히 짖밟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사탄의 잔재세력은 다 없어지고 박살날 것이다.
오는 세대 (의,생명이 지배) 성령을 따라 살아감
선과 악의 각축장 완성된 하나님 나라
(긴장의 관계) 새 하늘과 새 땅
초림 부활(등뼈 뿌러짐)
이 세대 (죄,죽음이 지배) 육신을 따라 살아감 재림
F. 새聖殿의 完成者 –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 보면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종종 가족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그림언어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왕 — 백성, 아빠 — 자녀(상속자), 목자 — 양떼, 농부 — 포도원 또한 언약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노릇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가정언어로서 하나님을 ‘아빠’(ABBA)라고 부르고 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제3계명). 그래서 하나님 이라는 말 대신에 전능하신 이, 창세로부터 계신 이, 세세무궁토록 계시는 분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 당시 아빠라는 말은 금방 말을 배운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으면서 매우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었다. 아빠라는 말은 친근하면서도 매우 의존적인 말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집을 비유로 들어서 많이 말씀하셨다. 문 즉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또한 열쇠라는 말을 쓰셨다.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 문으로 들어가 열쇠를 따고 들어가면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식탁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집의 가장(host)으로서 우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푸신다.
詩篇중에서 시14편, 24편 등을 성전순례시라고 한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시편 24 편과 이사야서에 나오는 것인데, 성전의 순례시에서 성전에 들어간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가 그 순례시의 말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의 言語를 사용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어린 아이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이다.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의로워야 하며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것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란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 의로운 자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들을 살펴보면은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그렸다. 예수의 예루살렘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 예수는 그 당시 종교와 생활의 중심지인 성전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그대신 자기가 성전을 짓는다고 했다. 왜 예수께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가 ?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기에 성전에서 데모를 했는데 성전을 청결케 해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선지자적 언어로 말하면 드라마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제사 지내고 하는 것이 이제는 쓸데 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사 드릴 제물을 사고 파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체포되어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 받으신 것이다. 네가 정말 성전을 짓는다고 했느냐 ?라고 하니까 예수께서 묵묵부답이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면 성전 문제와 하나님의 아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쿰란문서를 보니까 이 용어가 삼하 7 : 1 – 13절과 관련되어 있다.
삼하 7 1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삼하 7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 장 가운데 있도다
삼하 7 3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삼하 7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 7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 축하겠느냐
삼하 7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 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삼하 7 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 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삼하 7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삼하 7 9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 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삼하 7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삼하 7 11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 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삼하 7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삼하 7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예수는 자신이 성전을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한 죄목 즉 나단의 신탁에 따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총독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했다. 성전은 그 당시에 유대인의 생활과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시고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다. 자기가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으로 인하여 새로 탄생된 백성들로 새 성전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요 2장의 성전소동사건은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거나 성전청결 사건이 아니고 자기가 이 성전을 헐고 구속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성전을 세울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데모이다. 시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소 당한 죄목도 성전에 대한 것이다. 네가 이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말한 자이냐 바로 네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이냐고 심문했다. 사실 이 질문은 두 개의 질문이 아니고 한 질문인데 다른 측면으로 두 번 질문한 것이다. 성전재건할 자와 메시야는 동일 인물이다. 예수님은 바로 성전 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구약배경은 삼하 7:12 – 14에 나오는 나단의 신탁이다. 즉 나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다.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씨를 통하여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하셨다. 삼하 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다윗이 주변의 대적을 다 물리치고 그 백성에게 안식을 주고 자기는 궁궐에 거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나님께 말씀 드렸다. 그러나 나단을 통해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집이란 다윗의 왕조(dynasty)를 의미한다. 여기서 집이라는 단어에 있어서 하나의 WORD PLAY 를 볼 수 있다. 다윗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그의 왕조를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의 씨를 일으켜 왕조(집)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가 합법적으로 통치한다는 의미로 그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의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다윗왕조를 세운다는 말씀이다. 이 약속은 솔로몬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다윗왕조를 세웠다. 그래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그런데 솔로몬을 기점으로 다윗 왕조가 타락한다. 그리고 분열왕국이 되어서 타락해서 망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구약내에서부터 나단의 신탁이 다시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여기서 구약과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세워서 메시야를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는 메시야 사상이 강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세워서 다시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다윗의 씨인 메시야가 하는 일은 바로 성전을 짓는 일이다. 그 왕조와 하나님의 아들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왕조와 하나님의 아들(성경에서 아들은 상속자개념을 의미한다)사이에는 관계론적 의미가 있다. 메시야는 바로 다윗의 왕조를 재건할 뿐만 아니라 새성전을 세우실 분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왕조를 이어 받은 메시야라고 한다. 육적 다윗 왕가는 바벨론 포로로 끝이 났다. 그러나 영적인 다윗의 왕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승 되어졌다(마1 : 1). 다윗의 씨(seed, 후손)를 ‘가지’ 또는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야는 바로 성전을 짓는 자이다. 새성전과 메시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속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모독 죄는 하나님에 대한 참람죄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죄인 것이다.
G. 예수님의 의도 — 하나님 백성의 창조 – 새성전을 이루심
우리는 이전에는 죄와 죽음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탄의 나라 백성이었는데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해서 의와 생명이 왕노릇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요에 참예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누구인가 교만한 宗敎指導者들이 아니고 바로 죄인과 창기들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래서 그 당시에 불리웠던 예수님의 별명이 1) 탐식가 2) 죄인과 창기의 친구 3) 술주정뱅이(술을 즐기는 자)등이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約束으로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부요함에 동참케 해주셨다. 우리의 아빠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기도란 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를 내것으로 끌어쓰는 것이다.(지혜를 주소서, 능력을 주소서, 연약함을 도우소서, 질고에서 건져 주소서 등)
영생이란 바로 신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비유로 시위하셨고, 치유를 통하여 그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났다.
막 8 : 28 – 31(마16:21이하 참조)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사역의 전환기를 가져온다. 그 때부터 임박한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셨다.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드라마를 제시하신 것이다. 1) 시기 – 유월절 2) 재료 – 음식-생명 3) 몸짓 – 죽음 예수님이 떼어주신 떡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찧기실 살을 의미하며 잔은 우리를 위해 흘리실 대속의 피이며 언약의 피이다. 4) 말등 이런 것들은 전부 엄청난 상징을 갖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
시기는 兪越節이다. 유월절을 지킴은 바로 출애굽의 첫 구원을 기념하고, 종말에 있을 제 2 의 출애굽 즉 종말의 구원을 염원하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등 음식은 生命을 주는 것을 상징한다. 몸짓은 부수고 포도주를 붓고 하는 것은 잔인한 죽음, 최후의 만찬 때 즉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한편의 劇(드라마)으로 마디 마디마다 엄청난 意味를 부여해서 말한다. 즉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제 2의 출애굽을 이루는데 그 구원을 어떻게 이루는가 ? 자신을 스스로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그리고 말을 보면 잔의 말씀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言約의 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사 53 : 10의 引用이다. 예수님의 十字架에서의 죽음은 사 53 :10에 근거한 대속적 제사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바로 이사야서에 인용된 여호와의 從의 죽음이라고 한다.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를 代贖의 제사로 바쳐서 백성의 罪가 용서되고 그들을 의롭게 함이 내용이다. 바로 그것이 바로 예수 자신의 죽음의 의미라는 것이다. 言約의 피라는 말은 출애굽기 24장 8절에서 왔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한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새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언약적 죽음이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되게(왕) 하기 위한 죽음이다. 출 24 : 8에 보면 모세가 언약의 피를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의 예식을 취한다.
출 24: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 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즉 언약을 맺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백성됨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렘 31 : 31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한다. 새언약의 내용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마음의 동기에서 시작된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을 세 우리라
렘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 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 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 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 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시대에 모세를 중보자로 맺은 옛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 즉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약을 어겼다. 그래서 새언약을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8장과 10장에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이 새언약을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종의 노래’라고 하는 사 42 : 8과 사 49 : 6에서도 종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또한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과 아담사이에 단절되었던 교제를 회복시키어 의로운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죄가 용서되어 의로운 하나님 백성을 창조되는 사건으로 그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왕노릇하시고 아비 노릇해주심에 의해 살 수 있는 백성들을 창조함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결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 주심에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런 구원을 이루는 사건이라고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해설해 주었다. 제자들은 별로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의도는 우리에 대한 초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초대이다. 잔치와 상속의 약속이 있다. 그것은 영생의 약속이다. 사단의 죽음의 나라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죽음의 증상을 고치는 치유로서 시위하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인데 이로부터 의로운 하나님의 새백성 창조가 된다. 그의 하나님의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는 초대인데 그의 죽음은 그 약속의 제의적인 성취이다. 그래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이다. 이때까지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과 너무나 동떨어져서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인데 그래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고(막1:15),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의 약속을 성취하셔서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인가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를 통한 속죄제사와 새 언약의 성취를 인치는 것이 부활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켰다.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을 본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하고 높이신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고전15:3-5,롬4:25,고후5:21)는 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신앙고백과 케뤼그마가 되었다.
구원이나 영생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神的인 삶이 바로 永生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은 매우 긴장의 관계에 있다. 현재(부활과 재림사이)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각축장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자기주장하고 이웃을 착취하라고 하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바울의 표현대로하면 사단은 육신대로 살도록 하고 하나님은 성령의 지시대로 살라고 한다.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지금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사단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가 완전히 극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좇아 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 아닌가 ?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 육신을 따라 살 것인가 ? 매 순간 직면한다. 그 때마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市民權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땅위에 살지만 사단의 나라에서 이미 벗어난 자들이다.
골 1:1·3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 으니 ”
우리를 사단의 암흑과 죄악과 죽음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겼다. 우리의 신분이 거기에 있다.
교회는 바로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이다. 그러므로 본국의 법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의 열매 샬롬이 확대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사단의 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우리가 매순간마다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생명 가운데 동시에 산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지만 우리는 손해를 본다. 그래서 구원과 고난이 함께 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과 구원이 함께 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롬 12 :1,2과 빌 1:27에 의하면 교회는 식민지로서 본부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갈 5: 22, 23에는 성령의 열매가 묘사되어 있다. 매 순간마다 육신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고난 속에서 살아간다. 고난은 구원을 가져오고,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 우리들이 인간사회에 살려면 자신이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구원과 고난이 함께 공존한다. 인간의 내재의 삶속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겠는가 ? 우리의 구원은 초월해서 와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병든 사회를 사랑 외에는 치유할 힘이 없다. 구원은 바로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긍극적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은혜로 우리가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확대된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으면 거기에 샬롬이 이루어지고 그만큼 나도 덕을 보게 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구원이 확장되면 우리도 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남에게 덕을 입히지만 나는 손해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예수가 말하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다. 생활속에서 죽는 것이 복음을 위해 고난 받으며 사는 것이다. 복음을 위한 고난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마16:24). 종말론적 긴장의 관계이기에 재림 때까지 이러한 긴장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와서 구원이 여기 있는데 왜 고난이 있는가 ? 바로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 살게하면 우리의 고난도 적어진다. 다함께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면 내가 손해를 보니까 ? 전도를 더 열심히 해야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지 완전한 구원이 없으나 구원이 더 확장되면 복음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더 확장되면 샬롬이 커진다. 종말에 가면서 고난이 더 커진다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다. 종말에 가면서 구원도 증진되고 고난도 더 증진되는 역설이 있다. 우리가 믿는 바가 얼마나 훌륭한가 ?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얼마나 위대한 구원의 소망을 갖는가 ? 우리가 기도로 날마다 구원을 체험한다.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우리 삶에 부분적으로나마 임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오는 세대 (의,생명) 성령을 따라 살아감
초림
부활 재 긴장관계
십자가 림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안식
이 세대 (죄,악,죽음) 육신을 따라 살아감
[출처] 하나님의 나라|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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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적 전쟁/김세윤박사
진정한 영적 전쟁
한국에서 ‘영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땅 밟기 선교’를 행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 전쟁’이 아니다. ‘영적 전쟁’은 사단의 나라에 맞서는 것이다. 우리가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을 하는 순간마다, 맘몬이라는 우상을 미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통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가르치고, 사도들이 가르친 ‘ 영적 전쟁’이다.
신약 어디에 이교도의 신전을 뱅뱅 도는 방법으로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흔히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돌며 ‘땅 밟기’ 했다고 하는데, 그런 해석을 따르는 것은 원시적인 신학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계시 신약을 두고 왜 구약의 예비 계시로 돌아가서, 특히 여호수아 이야기를 ‘영적 전쟁’의 준거로 삼는가? 왜 그렇게 구약의 이야기 하나에 몰두하는가? 그것도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주의에 얽매여서 말이다. 여호수아 식으로 ‘영적 전쟁’ 하고 선교한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교도들 다 죽였듯이 우리도 불신자들을 칼로 다 죽여야 할까? 그것은 과격파 이슬람이 이어받은 “성전’, ‘지하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계시가 가르치는 ‘영적 전쟁’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영적 전쟁’
‘영적 전쟁’ 따위의 미신이 한국교회에 퍼져 도리어 교회의 건강과 선교를 해치고, 전도의 길을 막고 있다. ‘축사'(요사스러운 기운이나 귀신을 물리쳐 내쫓음)나 ‘땅 밟기’ 같은 방식으로 ‘영적 전쟁’ 한다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식으로 선교하느냐 물으면, 그들은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를 언급하며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에베소서에서 ‘영적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하라고 가르치느냐 물으면 그들은 대개 묵묵부답이다. 6장 13절 이하를 읽지 않았거나,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영적 전쟁’은 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심각한 ‘영적 전쟁’의 전장에 서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매일 대항해야 한다. 그렇다면 ‘땅 밟기’ 같은 방식이 에베소서가 말하는 ‘영적 전쟁’일까. 에베소서에는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 병정의 무장 상태를 묘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허리띠·호심경·군화·방패·검·투구 등 로마 병정의 무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ㅇㅇ의’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 ‘성령의 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풀어 주지 않았는가. 즉 우리가 진리를 굳게 지키고, 의를 행하며, 열심히 돌아다니며 화평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며,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 내는 것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치는 ‘영적 전쟁’이다.
에베소서는 에베소의 교회에 보내진 서신으로 이해된다. 에베소서 수신인란에 일부 유력한 사본들이 에베소라는 지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에베소에는 고대 ‘세계의 일곱 불가사의들’ 중 하나라는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그 신전을 돌며 ‘땅 밟기’ 또는 ‘축사’ 하여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한국에 엄청난(선한?) 영향을 끼친 미국의 한 유명 선교학 교수가 10여 년 전 한국의 한 대형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양국의 그리스도인 다수를 동원하여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 신전 폐허를 밟는 ‘영적 전쟁’을 하였다 한다. 이런 뉴에이지 소설 같은 ‘영적 전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래서 터키와 이웃 무슬림 나라들에 복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되었는가? 세상에 자유·정의·평화가 증진되었는가? 그러기는커녕 그 직후 저 과격파 무슬림들이 그들식 ‘영적 전쟁'(지하드) 을 벌여 온 세계(특히 서방 기독교 세계)가 전쟁과 테러 공포에 휘말리고, 종교 전쟁, 문명 충돌의 커다란 위기를 맞게 하지 않았는가? 이런 결과를 거액을 들여 그런 ‘영적 전쟁’을 감행한 사람들의 논리에 맞추어 해석하면 우리 하나님이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에게 패배했다는 것인가?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이런 이교도적이고 미신적인 ‘영적 전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정한 ‘영적 전쟁’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곧 믿음 안에 굳건히 서서, 진리를 고수하고, 사랑과 의를 행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화평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
신약의 모든 책들이 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전쟁 언어를 가장 절실하게 사용하며 ‘영적 전쟁’을 말하는 책은 요한계시록이다. 그 책은 교회를 유다의 사자 다윗적 메시아 예수가 소집한 12사단 14만 4,000의 군대라 한다. 그리하여 용·짐승·거짓 선지자라는 사단의 삼위일체에 맞서 거룩한 전쟁을 처참히 치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 책은 사단의 나라에 대항해서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승리하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군대로 그 전쟁에 어떻게 참여해서 하나님나라의 승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아시아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하나의 순회 서신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이 있는 에베소 교회에도 보냈고, 사단의 왕좌가 있는 버가모 교회에도 보냈다. 하지만 그 책 어디에도 그 신전들 주위를 ‘땅 밟기’ 하고 ‘축사’하는 식으로 ‘영적 전쟁’ 하여 승리하라는 말은 없다. 도리어 요한계시록은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으로, 즉 순교를 무릅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이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로마 황제 체제로 현신화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거짓 복음으로 열방을 미혹하는 사단의 나라에 맞서 여러 도시에 세워진 황제 숭배의 신전을 ‘땅 밟기’ 하여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은 일언반구도 없다. 그 책은 도리어 강요되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팍스 로마나의 유혹에 도취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만 진정한 왕이시니 그의 통치 아래서만 진정한 의와 평화와 구원이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여 사단의 거짓 왕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단은 ‘짐승’으로 무력과 압제와 수탈 등의 방법으로 세계를 지배하지만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의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는 삶으로써, 즉 사랑과 자기희생과 진리 증거로 ‘영적 전쟁’을 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극복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이고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다. 예수와 사도 바울 그리고 계시록은 교회로 하여금 사랑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써 신실하게 선포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을 극복하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영적 전쟁’의 전쟁터는 우리 실존의 삶이다. 날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이라는 갈림길에서 사단의 통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그런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라는 요구로 온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을 ‘이중 사랑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막 12:28~34),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법’ 또는 ‘그리스도의 법’이라 했다 (고전 9:21, 갈 6:2). 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이다.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우상은 불상도, 아르테미스 신상도, 버가모의 사단상도, 신격화된 황제상도 아니라 바로 맘몬이다 (마 6:24, 눅 16:13). 모든 우상 숭배는 파괴력이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 우상 숭배의 형태는 바로 돈 또는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맘몬·재물이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우상 숭배가 부자간 형제간도 갈라 원수가 되게 하고, 사회 계층 간의 불의·불평등·갈등을 낳고, 나라 간 전쟁도 일으키며, 전반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그 우상 숭배를 가장 심각히 경고하신 것이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 육신을 자극하여 맘몬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 돈이 우리에게 안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니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바가지도 씌우고, 유해 식품 등 가짜 물건도 팔고, 부실 공사도 하고, 뇌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힘으로 남을 억압하라고도 한다. 이런 사단의 통치에 맞서 있는 우리에게 날마다 성령이 상기시키는 것은 사단의 그러한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그리스도의 재림 시 오는 것으로만 가르쳐 먼 미래로 연기해 버리든가, 죽음 뒤 우리의 영혼이 가는 저 위 하늘 어딘가로 밀어 올려 버려, 많은 성도로 하여금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통하여 이미 출범한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셨다.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대행하심을, 즉 그의 성령을 그의 교회에 퍼부어 주시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의 통치의 일꾼 또는 군사가 되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실현해 가도록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통치는 오늘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맘몬 우상 숭배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착취 대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나라)의 법’ 또는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물신주의적 탐욕을 배제하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세로,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 주심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성령은 맘몬 우상 숭배와 이웃 착취를 조장하는 사단의 통치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갈림길을 밝히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일깨워 주심, 인도하심, 그리고 믿음 주심에 힘입어 우리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단의 통치를 극복하고 ‘성령의 열매들’ (갈 5:22~23 – 사랑, 화평, 관용,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 등 도덕적 가치들!), 곧 ‘의의 열매들’을 맺는 것이다. (빌 1:11; 마 7:15~23) 이것이 진정한 ‘영적 전쟁’ – 성령에 힘입어 악령과 싸움 – 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직장이나 사업장에서도 정당한 이익만 얻으며 나의 상품이나 서비스로 이웃의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하며, 우리 사회 또는 환경 전반에서도 자유·정의·화평·건강이 증진되도록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맞서는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진정한 ‘영적 전쟁’을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하나님나라의 샬롬이 얼마나 크게 실현될 것인가? 그것은 또 전 세계에 얼마나 큰 선교의 효과가 있을 것인가? (마 5:13~16, 벧전 2:9)
‘땅 밟기’는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
봉은사나 카자흐스탄, 또는 예루살렘에 가서 ‘땅 밟기’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이 아니다. 미신, 즉 샤머니즘의 발로다. 그리스도인들이 무리지어 세를 과시하면서 무슨 도시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외쳐 대거나, 무슨 우범 지대 또는 퇴폐 지역을 ‘땅 밟기’ 한다고 해서 그 도시, 그 지역이 ‘성시화’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릇된 ‘영적 전쟁’의 폐해는 중세 십자군 전쟁이 우리에게 충분한 교훈을 남겼다. 십자군 전쟁이 지금까지도 교회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선교를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보라. 11세기 초 부터 200~300년간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십자가 기를 높이 들고 몇 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성지를 중심으로 근동 지역을 ‘땅 밟기’ 했다. 그 땅 이곳저곳에 십자가의 기를 꽂고 주께 바친다고 난리를 피운 결과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성지와 중동 세계의 귀신들을 몰아내고, 이슬람을 박멸하고, 주 예수의 이름만을 부르는 교회로 가득 찼는가. 괜히 기독교 국가였던 비잔틴 제국만 멸망시켰고, 이슬람 터키 제국이 들어서게 했으며, 고대 기독교가 왕성했던 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다 이슬람 땅이 되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도 무슬림은 기독교에 대해 극렬히 적대하고, 교회의 선교를 막고, 기독교 세력이 무엇만 하려 하면 즉각 ‘십자군’ 이름을 대며 저항하지 않는가. 십자군 ‘땅 밟기’가 중동 전체를 이슬람화하는데 공헌했다는 역설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샤머니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복음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하고,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이른바 선교 열정만으로 무슨 무슨 ‘스탄’이라는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땅 밟기’하는 선교의 결과를 보라. 중세의 십자군이 일으킨 역효과가 그대로 나타고 있지 않은가. 봉은사 ‘땅 밟기’도 그런 결과를 낳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욕을 당한다”라고 사도 바울이 자기 백성 유대인들에게 한 절규(롬 2:24, 사 52:5)가 오늘 한국교회에도 하는 절규가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의 선교 지도자들은 선교 전략으로 ‘땅 밟기’를 주장한다. 몇 년 전 미국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열린 한인 세계 선교 대회에서도 ‘땅 밟기’를 중심으로 한 선교 전략을 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중요한 대회에 모인 신학자·선교학자·교회 지도자·선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선교 ‘전략’을 짰다면, 그것은 놀랍고 슬픈 일이다.
한국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일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군 운동의 정신과 승리주의(Triumphalism)에 빠져 있는 듯하다. 몇몇 소수의 힘없는 그리스도인이나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회개와 갱신의 기미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교회의 구원론은 사실상 구원파 또는 고대의 영지주의의 구원론에다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공로-상급 신학을 합성하여 놓은 것이고, 그들의 윤리는 세 가지(주일 성수, 헌금, 전도) 하기와 세 가지(술, 담배, 제사) 안 하기로 축약된 바리새적 경건주의요, 그들의 성경 해석은 성경의 ‘정확 무오’ 교리만 앞세우며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를 주입하는 것이어서, 성도들을 성경의 이곳저곳 본문들을 들이대며 접근하는 갖가지 이단 사설들(예: 여호수아 6장을 들이대는 ‘땅 밟기’식 ‘영적 전쟁’, 출 20:4을 들이대는 ‘가계 저주론’)의 쉬운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성은 다분히 샤머니즘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땅 밟기’ 선교는 우리 조상들이 정월 대보름에 지신밟기 하던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교회일수록 진정한 ‘영적 전쟁’은 등한시하면서 예수께서 가장 엄중히 경고한 맘몬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기복 신앙을 열심히 북돋아 많은 성도들을 사실상 사단의 나라 속으로 계속 밀어 넣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기복 신앙의 ‘가짜 복음’을 선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많이 벌기를 염원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 때마다, 사실상 그들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게 하는 것이다. 즉 사단의 나라 군사로서 하나님나라에 대항해 ‘영적 전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역설이 벌어지는 곳이 지금 ‘영적 전쟁’ 한다는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 안에 “믿음 좋다”는 그리스도인 사기꾼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해야 할 진정한 ‘영적 전쟁’의 제일 전선은 우리 자신의 삶의 현장이요, 제이 전선은 우리 자신의 교회 안인 것이다. (아니, 제일 전선은 우리의 교회 안이고, 제이 전선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그리고 제삼 전선은 사단의 나라의 거짓·불의·억압·갈등에 맞서 하나님나라의 진리·공의·자유·화평을 확대해야 하는 한국 사회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성숙 없이 어떻게 이런 진정한 ‘영적 전쟁’을 치룰 수 있을까? 한국교회가 얼마나 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얼마나 더 쇠락해야, 회개와 영적 갱신 그리고 신학적 성숙의 운동이 일어날까?
[출처] 진정한 영적 전쟁/김세윤박사|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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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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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박사(미국 풀러신학대 교수,바울신학의 권위자)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 1:14-15)
마가는 이 한 마디로 주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여러분과 함께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가르침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하나의 문제로 부터 시작하면 지금 마가는 예수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이렇게 말하죠. 그런데 우리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요한복음에만 가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가면 그 초대교회의 설교들을 요약한 것이 참 많은데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거의 안 나와요. 바울서신서들을 위시한 신약의 나머지 책들에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런데 사도행전에 요약된 설교들을 본다든가 서신서들을 통해서 사도들이 하는 설교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그래요.
대표적으로 전에도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고전 15:3절 기억나십니까? 거기 좀 자세히 공부한 바 있는데 고전 15장 1절 부터 읽어 보시죠.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쓴 것을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복음은 사도인 내가 바울이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 부터 받아서 너희들에게 제일로 먼저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달했다.
그 내용은 4개의 절로 되어 있다고 그랬죠.
지난 번에 첫째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둘째 장사 그러니까 묻혔다는 것. 장사되었다는 것. 세째 성경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다시 살아 나사 뜻은 비슷할지 몰라도 번역이 좀 좋지 않아요. 사흘 만에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는 것 또는 부활되어졌다는 것. 네째 게바에게 보였다는 것 나타났다는 것.
이 4문장들로 복음을 설명하는데 지난 번에 본 바와 같이 두 번째 문장 ‘장사되었다는 것’은 그 앞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요 네 번째 절 ‘게바에게 보였다는 것’은 또 바로 그 앞에 가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정확히 말하면 이 3절과 이 4절,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우리 죄를 위한 죽음과 부활,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고 ,이제는 이 11절에 봅시다. 11절에 그러므로 나나 저희들이나 ‘저희들’은 예루살렘 사도들‘ ,다른 사도들이나 다 함께 이와 같이 복음을 선포하매 너희들도 이와 같이 믿었느니라. 여기 지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게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이고 이것이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믿는 복음이고 이 복음을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지금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금방 의문이 하나 생겨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자! 어떻게 사도들이 주로 예수의 제자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해서 다 예수와 똑같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하여간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는가?
그런 문제가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이렇게 질문을 해 보아야겠어요. 이게 서로 다른 복음인가? 아마 다른 복음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언어를 달리하죠? 아 좀 다르니까 언어를 달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두 복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이것이 사도들의 복음이 어떻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서 나오게 되었는가? 기원하게 되었는가?
이런 것을 우리가 살펴 보아야죠. 이런 것은 순전히 역사적인 호기심이 아니고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어요.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몇 시간 공부할려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이 기독교 복음을 좀 정확히 깊이 깨닫고자 하는 것이어요. 이것을 정확히 깨달음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신안생활의 의미도 정확히 알 뿐아니라 우리의 그 믿은 바 신앙과 우리의 삶을 제대로 연결시킬 수가 있어요. 우리는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역사관, 인생관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 우리의 일 우리의 활동 우리의 직업과도 올바로 연결시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 그리고 올바른 윤리 올바른 태도 이런 것들을 확정하게 되어요.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 우리 신약성경에서 우리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하려고 해요. 단편적으로는 여러분들과 같이 제가 공부하면서 여러 번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듣다보면 아! 전에 조금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는 감을 느끼는 것도 가끔 있을거여요.
전에 제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한 동안 강의하던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부 중복되는 부분도 있을텐데 이번에 두 가지 단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전달했었던 것을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같이 생각함으로서 여러분들의 기독교 복음을 좀 깊이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해요. 그렇게 해서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삶의 일치 이런 것을 도모하고자 해요.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불행히 신학을 꽤 오래 한 사람도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없어 가지고 아주 혼동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복음이라는 말을 수 없이 쓰지만 복음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말을 잘 못한다든가 예수의 중심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인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 보세요 하면 잘 모릅니다. 잘 모른다든가 이런 현상이 참 많이 발생해요. 그래가지고 신앙과 사고 그리고 삶, 기독교적 삶의 일관성과 성숙을 도모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음을 보는데 조금 그런 문제에 있어 도음이 되고자 앞으로 몇 시간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 부터 출발하여 가지고 이 복음이 어떻게 거기서 발생하였으며 이 복음이 무슨 의미인가 그런 것을 생각해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가 신관 신론에 이 복음이 내포하는 신관만이 정말 우리에게 구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고 다른 종교들의 신관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의 관계들도 설명을 할 것이며 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도 연결시켜서 좀 설명을 할려고 그래요.
우선 여기 마가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해요. 마가복음을 위시해서 마태 누가는 예수께서 그럼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쭉 기술을 해요. 그래서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을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 예수께서 과연 하나님 나라를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예수의 여러가지 행적 대표적으로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그리고 죄인들과 먹고 마신 이것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런 것을 우리가 공부하겠어요.
우선 이 배경,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 배경을 좀 생각해 보겠어요.
이 하나님 나라 또는 마가 누가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꺼려했지요. 그래서 하나님 이름 대신에, 대신- 이름, 대칭을 많이 발전시켰지요. 그래서 ‘전능하신 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이스라엘과 함께 임재하시는 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 ‘영원히 복 받으실 이’ 뭐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 많아요. 그 중에 하나가 하늘이지요. 하나님 이름 대신에 하늘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이 그 유대적인 성격 역시 유대인들을 위해서 그들을 주로 대상으로 쓰여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선포될 이 복음임을 우리로 하여금 금방 알게 해줘요. 그러나 하여간 같은 뜻이라는 것.
그런데 구약성경과 우리 신약이전의 유대문서에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의 나라‘ 이런 문구가 잘 안 나와요. 거의 없어요. 구약성경에도 거의 없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중심사상이 ‘하나님이 왕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그러므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시리신다. ’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런 말은 참 많이 나올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중심사상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려야 의가 있고 이 평화가 있음. 평화 샬롬! 화평 구원이 있다. 그런데 이 왕이란 말과 다스린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로 써요. כלמ 은 어떻게 모음을 붙이냐에 따라 왕이라는 명사가 되기도 하고 다스린다는 동사가 되기도 해요. 그런데 이 말이 참 많이 나타나요. 그런데도 막상 하나님의 나라 또는 여호와의 나라, 하늘의 나라 이런 우리 복음서에 나오는 이런 고정된 문형은 안 나온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고정된 문형으로 쓰게 된 데는 상당히 새로운 시각적 시도를 했다.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을 계속 이어받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구약과 유대교의 어떤 배경을 내용적으로 이어받았나?
첫째로 창조사상,
둘째로 타락사상
세째로 언약사상
네째로 종말론 종말사상.
이 구약과 유대교의 여기서 구약과 유대교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구약이후 신약이전에 그리고 신약시대의. 구약과 신약시대의 중간기를 중간사라고 그래요. 중간기라고 하고 그 기간에 유대문서들에 나타난 유대교의 이 신앙을 보통 우리가 유대교라고 그래요. 이들은 구약을 이어받았죠. 이것은 신약으로 이어져요. 그러니까 사도들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이 가르침이 구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어가면서 동시에 새로움을 새로움 해석을 또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인가. 이렇게 늘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이 점에 있어서도 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우선 내용적으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는 구약과 유대교에 이와 같이 근본 사상을 이어 가는 거여요.
그러니까 이 창조사상은 우리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 말도 하늘과 땅이란 말도 히브리 사람들은 우주전체를 말했어요. 우주란 말이 없었어요. 히브리어로 원래 세상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원래 나중에 올람 이라는 말은 원래 ‘세대’ 시간적인 개념으로 세대라는 말이었는데 나중에 장소적인 뉘앙스를 가진 ‘세상’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는 했으나 이것은 나중에 생긴 것이고 원래는 이 우주라는 말 헬라어 코스모스에 해당되는 우주전체를 통칭하는 히브리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우주를 하늘과 땅 이렇게 말했어요. 우주를 하늘과 땅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사상을 넣었느냐 하면 우주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늘과 땅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늘은 하나님께서 거처하는 곳이고 땅은 인간들이 거처하는 곳이어요. 여기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시고 마땅히 하늘과 땅의 왕이 되시죠.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니까 하늘과 땅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요.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이 주이시지요.
그런데 보통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요. 그래서 땅위에 자기 대리자를 하나 세웠어요. 그것이 인간이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을 대신해서 땅을 통치하는 대리자로 세운 것이어요. 그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다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굉장히 함축의미가 많은데 가장 기본적인 뜻이 하나님의 대리자라 그 말이어요. 하나님 대신 땅위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라 그 뜻이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이!
이 놀라운 선언, 창세기 1:26-28절의 놀라운 선언,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다는 놀라운 선언은 우리 창세기 내에서 부터 벌써 하나의 인권선언으로 받아들여져요. 그래서 가인과 그 후예들이 인간을 죽였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죄로 간주된다고요.
그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에서 그러니까 유대 기독교 문명에서는 살인이라는 것이 단순한 인간 끼리 저지르는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 저지르는 죄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형상으로 지었다는 선언이 이 유대 기독교 문명에 인권사상에 가장 근본이어요. 또 이 놀라운 선언은 물론 인간성의 높음 고양된 위치를 천명한 것 같으니까 옛 유대학자들로 부터 랍비들로 부터 우리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로 부터 해서 지금까지 엄청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어요. 인간의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냐? 그래서 온갖 이론들이 있죠. 한동안은 인간을 여러 분석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생각할 때는 인간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이해하는 힘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관계론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과 관계될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말과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말하는 능력과 관계있다. 뭐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인간내의 어떤 일부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의 모습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어요. 무엇까지 포함해서? 외모까지들도 포함해서요.
왜 그런 깨달음을 우리가 갖게 되는냐면 여러분 구약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술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대표적으로 이사야 6장 에스겔서 6장 같은 데에는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죠? 다니엘 7장도 마찬가지여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스스로를 계시하는 하나님과 이 사람과 이 외모 형상에서도 유사한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는 외모는 등한시하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엇만은 아니고 외모까지를 포함한 인간의 실존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가장 기본 뜻은 하나님의 대리자라 그 말이어요.
하나님께서 땅위를 통치하시는데 보통 하늘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땅에 자기의 형상을 세워가지고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어서 그 형상을 세워 가지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 말이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도록 세워진 자니까 그가 어떻게 해야 되어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나님의 대리자 노릇을 하지요. 그러는 한 아담은 땅위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자로서 땅위에서 제일로 높은 자죠.
옛날에 영국의 총독을 부왕이라고 불렀지요. 빅토리아 여왕의 대행자라 대표라 해서 부왕이라고 그랬지요. 그가 총독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때나 자기에게 부왕노릇 하도록 권세를 위임한 빅토리아 여왕의 뜻을 충실히 받드는 한,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가 스스로 왕이라 하면 그 순간에 자기는 부왕의 위치를 잃지요.
바로 타락이 그런 것이어요. 아담이 땅위에 하나님의 부왕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아담이 어떻게 되었어요? 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졌지요. 사단은 우리를 속이는 자여요. 뭐라고 속였지요? 네가 하나님 밑에서 부왕 노릇하는 것 그런 것을 하지 말고 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이 과일을 먹으면 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에 의존하고 순종함이 없이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말을 아담이 들어서 그러니까 아담이 어떻게 되는 셈이어요?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는 사단의 말에 순종하는 셈이 되지요. 이렇게 해서 아담이 사단의 권세 아래 떨어져 버렸어요. 아담이 땅위에서 제일 높은 자였는데, 어떻게 해서 제일로 높은 자?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있는 한 제일로 높은 자였어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리어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사단의 말을 듣는 사단에 순종하는 사단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를 넘겨 버린 것이죠. 팔아버린 것이지요. 그것을 타락이라고 그럽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냐? 그 결과는 그러니까 아담이 더 이상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 하나님이 되고자 함, 그러니까 과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존해서 사는 자였는데 이젠 그 창조주 하나님, 무한한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필요 없음.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하나님임, 자기 자신이 하나님 노릇해 줌.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 노릇하는 상태에 떨어진 것이지요. 제가 여러 번 설명을 했습니다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내재의 자원속에 움추러든 셈이다 이 말이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제한된 자원 속에 움추러 든 셈이어요. 그것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공부하겠지만 주로 무엇으로 선포했어요? 비유들로 선포했지요. 그 중에 아름다운 비유 하나가 무엇인가요? 탕자의 비유. 이 아담의 타락을 그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요?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 분깃을 주세요. 그 분깃을 가지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멀리 간다. 그것으로 예수는 무엇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아담의 타락을 설명하는 것이어요.
아담의 타락이란 아담 후에 우리 모두 운명이 그때 결정이 된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의 현재 상태를 그렇게 설명하는 거여요. 아담의 타락, 우리의 제한된 분깃 재산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해요. 자기의 자원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자기에게 스스로 하나님 노릇,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 노릇 그래서 그 아들이 아버지로 부터 분깃을 받아 가지고 자기 것을 받아 가지고 멀리–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조그마한 자원을, 금방 무엇을 느껴요? 우리가 결핍성을 느낀다고 그랬지요. 이 부분을 내가 여러 번 설명을 했어요.
여러분들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하겠어서 다시 합니다만 ‘결핍성’, 우리의 지혜가 부족함,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름, 지혜가 부족함, 힘이 부족함, 무슨 문제가 발생해도 속수 무책, 우리가 시간적으로 제한된 존재여요. 그래서 우리 교회 연로하신 장로님들 권사님들 120세 까지 살기를 제가 간절히 바랍니다만 120년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까짓 것 지금 60세 사신 분들 깜빡할 사이에 60년 되어 버렸잖아요. 엊그제 저기 제기 차기 하고 뛰놀던 때가 엊그제인데 벌써 60세 되어 버렸어요. 앞으로 더 짧게 살면 120세일텐데 잠깐 사는데 그 잠깐 사는 동안에 늙고 병들고 쇠약해지고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장소적인 제약 우리에게 얼마나 압박하는 힘으로 우리에게 와요. 그런 결핍성, 우리의 결핍성 여기서 뭐가 옵니까? 모든 고난들이 오죠. 아까 제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함.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무엇을 표현했다구요?
아담이 타락함으로 6가지를 잃어 버렸다. 6가지 잃어버린 것 뭐라고 그랬죠?
처음에 얼굴의 광채를 잃어버렸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반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그의 얼굴의 광채가 전부 다 빛났는데 아담이 범죄한 후에 그냥 시커먼 추남이 되어 버렸다 이거예요. 그 다음 두 번째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뭐라고요? 아담이 키가 줄어들었다는 거예요. 랍비들의 신학에 의하면 아담의 키가 원래 장대한 자였는데 범죄하고 타락한 뒤에 키가 165센치로 줄어 버렸어요. 무슨 말이라고 그랬죠? 무능한 자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어요. 그 다음 세번째는 하늘의 광채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캄캄한 암흑과 혼돈 속에 살게 되었다. 네째 다섯째 땅의 열매와 나무의 열매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무의 열매 가령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포도 한 송이가 장정이 여나므명이 들어도 못 들정도로 컸는데 범죄한 후에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포도가 이주 작아졌어요. 아담이 농사를 하고 땅을 파고 땀을 흘리고 열심히 죽어라고 일해도 항상 기아선상에서 허덕이죠. 먹고 살뚱 말뚱 삶과 죽음의 선에서 허덕이는 존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영생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죠.
그렇게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그게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말이죠. 아담이 아까 예수의 멋진 비유, 탕자 비유, 자기 분깃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으로 부터 삶과 자기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는 조그마한 분 깃 재산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재산으로 어떻게 해보면 자기 삶과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과대 망상증에 빠진 것이지요. 자기의 인간성 자기의 피조물성 이런 것들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망각하고 부인하고 자기 자신 자기를 믿음 만용 자만에 빠짐 내 속에 있는 재산으로 충분히 내 삶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 탕자같이 내가 가진 내 속에 내게 속한 상속 50억 이것으로 내가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독립하는 거죠. 그래서 이 타락이 어떻게 일어났다고 그래요?. 신학에서는 자만 교만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바울은 이를 뭐라 합니까?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3번이나 되풀이 해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당연히 알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지탱하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은혜로 옵니다 하고 인정하는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이죠. 그런데 인간이 어쨌다고요?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자기에게 속한 것이 당연히 자기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항함으로,결국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뭐라고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둔다고 인간을 그렇게 살려는 태도에 방치해 버렸다. 예수의 탕자의 비유에 다시 전환해서 말하면 이 탕자가 내 분깃을 주세요. 나 멀리 가서 내 멋대로 아주 잘 살겠습니다. 할 때 아버지가 할 수 없이 놔 두었다. 요새 우리 아이들 쓰는 말로는 아! 그래 잘해 봐라 하고 그냥 보냈다 그 말이어요. 그래서 인간들의 결핍성 속에 제한성이 빠졌는데 그 제한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온다.
이 고난들은 제가 여러 번 말씀했죠?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그랬죠. 우리가 우리의 삶의 근원인 창조주로 부터 분리되었으니까 그림으로 말합시다. 생명줄이 끊어져 버렸으니 죽음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으로 죽음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 죽음이 이렇게 고난들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표현된다. 이것을 환절기라 감기 많이 걸리죠? 감기 걸리면 증상들이 나타나죠? 감기 걸리면 콧물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삭신이 쑤시고 감기 걸렸다고 그러죠? 우리 모든 고난들이 이것이 고난이 어떤 종류이든 육신의 질병이든 경제적 빈곤이든 부부간의 갈등이든 사회적 정치적 압박이든 심리적 어려움이든 외로움이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고난, 이것이 모두 이 죽음의 구체적인 증상들이어요. 이제 우리가 죽음병에 걸린 거여요. 그 죽음병이 뭐 어떻게 증상을 나타내요? 외롭고 이렇게 가을에 외롭고 허무하고 인생무상을 느끼고 앞의 소망 없이 그러다가 몸까지 아파 사업은 잘 안 돼. 이 아들놈이 대학입시에 합격할지 못할지 통 이런 게 다 뭐여요? 죽음의 증상들이어요. 이런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 말이어요. 이것도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사단이 어쩐다고 그랬어요? 우리의 육신을 신봉한다고 그랬지요. 육신을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으로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존재로서 인간을 육신이라고 그랬지요. 사단이 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네 뜻대로 살아라. 네가 행복하고 안전하다. 자꾸 충동질 해요. 네가 네 하나님이다. 자꾸 충동하는 거요. 그래서 육신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서 무엇을 해요? 죄를 짓죠. 죄를 지으면 사단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품삯을 준다고 했죠? 죽음으로.
이것이 로마서 6:23절 ‘죄의 품삯은 사망이라. 죽음이라’ 사단이 우리 육신을 자꾸 충동해서 자기 말을 듣게 만들어요. 사단이 아담을 총동해서 네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다. 그래서 아담이 사단의 말을 들었을때 어떻게 되죠? 어느 상태에 빠진 거죠? 죽음의 상태에 떨어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죽음의 상태에 떨어졌다. 창조주로 부터 분리되어 죽음의 상태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진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찬탈자 거짓왕 속임수로 우리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버린 사단의 통치 아래로 떨어져 버린 거죠. 사단의 나라에 떨어져 버린 거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는 거죠. 그 구원하는 일을 언약의 역사라 그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해서 그 후손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 삼아가지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언약이죠. 언약이란 말이 애매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죠. 아담과 그 후손들은 전부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의 자원으로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면서 내가 내 스스로 문제 해결해 가면서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면서 살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죽음이다. 그러면 우리가 역설적으로 사단의 나라에 떨어진 것이고 이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뒤집어야 되는데 그 방법이 이스라엘을 택해 가지고 아담같이 사는 게 아니고 사단의 통치 아래서 그 속임수에 빠져 가지고 네 스스로 하나님 노릇해 준다. 그렇게 살지 말고 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대해서 살라. 내가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 하나님 노릇해준다는 말은 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무한한 자가 이스라엘을 복주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렇게 하나님 노릇해 주는 것이죠. 그것을 하겠다고 약속함이어요. 그 약속은 언약은 무엇을 위해서? 창 12장부터 계속 나오지만 무엇을 위해서?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 인류를 사단이 통치에서 회복해서 신학적인 언어로 말하면 구속해서 구출하고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다시 한번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 살 수 있도록 죽음에서 건져 주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거죠. 그것이 언약이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왕권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두 개의 동심원으로 그릴 수 있는 거죠. 이 세상 땅 세상 땅 전체가 하나님이 지으셨으니까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죠. 야훼의 창조주가 온 세상을 통치하죠.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하죠. 이 세상이 스스로를 사단에게 팔아버림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는 사단의 통치여요.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죠.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니까 하나님이 합법적인 통치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법적으로 세상의 통치자요 그러나 세상이 세상이라 함은 인간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상이요 아담에 의해 주도되는 세상이 스스로를 사단에게 팔아넘겨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 안 받고 사단의 통치 받겠다고 함으로 실제적으로는 사단의 통치임.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음. 요한복음 3:16절 복음 기쁜 소식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가령 예수의 탕자의 비유를 다시 말합시다. 아담은 인류는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주심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살겠다고 자기 분깃을 도둑질하다시피 해 가지고 멀리 가 버렸으나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포가하지 않았어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래서 계속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구원의 역사를 해요. 그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려하심. 이스라엘의 그런데 이스라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통치 그런데 문제는 이 이스라엘도 자꾸 사단의 사주를 받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거역하고 그래서 세상도 하나님과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 되듯이 이스라엘도 그래요.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사단의 각축장이어요. 다만 세상과 이스라엘이 다른 것은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단에 빠져 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과 관계가 더 돈독하다고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여요. 한 마디로 자꾸 하나님 대신 사단을 쫓는 그래서 아담의 죄를 자꾸 되풀이 하는 그런 역사죠. 그러나 하여간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치하며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려고 한다.
이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들이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들이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시다. 하나님이 아비가 되시고 이스라엘이 그 아들이다. 출 4:22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또는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 돌보는 양떼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은 신부다.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 또는 농부이시고 이스라엘은 포도원이라. 하나님 포도원 주인 또는 농부가 잘 가꾸는 포도원이라. 하나님이 전쟁의 사령관이고 이스라엘이 그 징집된 병사들이다. 그 사단의 주권에 대한 성전을 하는 병사들이다. 이런 관계론적인 그림들이 전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시다. 하나님이 아비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이시다. 아들이다고 할 때는 가장 기본의미가 뭐라고 그랬어요. 상속자라고 한다고 그랬어요. 아들이라는 그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상속자라고 했죠.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주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주심에 의존해서 살 수 있는 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무한한 창조주의 그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도록 되어 있는 자라. 그 말은 좀 목자 양의 그림 여기 지금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그때에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있어요. 구원이 있어요. 하나님의 왕 노릇 해주심에 의존할 때 자! 히브리 말로 구원을 뭐라고 그러죠. 구원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말이 משׁ ! 우리 삶 전체를 온전케 함 그러니까 평화라고 할 때는 헬라어로도 그렇고 우리 말로도 그렇고 전쟁이 없는 상태 이런 소극적인 개념으로가 아니고 우리 삶 전체가 온전해 짐 그러니까 죽음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죽음의 증상들이 전혀 없는 어느 면에서나 고난이 전혀 없는 상태 그게 샬롬이어요. 샬롬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그러니까 시편에 보면 야훼가 높이 등극하여서 세상을 다시리는 곳에 뭐가 있다고요? 의가 있고 샬롬이 있어요. 그런데도 불행히도 사단이 다스려서 불의가 있고 죽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단은 죄와 죽음으로 통치해요. 우리로 죄짓게 하고 죄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해요.
하나님은 의와 생명으로 다스린다. 이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이 사상이 구약의 언약사상에 가장 중요한 표현 방법 중의 하나로서 구약의 중심사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 야훼의 나라라는 말은 드물게 나와요. 이런 말은 드물게 나와요.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의 이 사상들은 내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장 잘 쓰이지 않는 고정된 개념으로 함축시켜 가지고 표현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전승사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한층 더 높게 표현했다 그것이죠. 자 이 종말론 금방 끝납니다. 여러분들 종말론 마지막으로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떤 역사라고요? 한마디로 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왕 노릇하시기 위해서 왕 노릇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또 대리자로 세웠어요. 그게 다윗왕조에요. 다윗자손의 왕 그래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게 했는데 그게 나단의 신탁이라고 제가 소개했죠.
삼하 7:12-14절 나단의 신탁에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면서 다윗과 그 후손을 자기 아들로 세운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를 대행하게 한다. 그렇게 했죠.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을 종점으로 해서 다윗왕조가 기울죠. 어떻게 기울어요. 열왕기 역대기는 계속 무엇이 나오죠?. 다윗의 후손들이 계속 하나님의 아들 노릇하는데 실패한단 말이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바알을 숭배하고 무슨 몰록을 숭배하고 그런 짓을 해가지고 하나님의 대행자 노릇에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실현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샬롬이 안 일어나지 그 대신 뭐가 일어나요. 고난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 고난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다윗왕조 세우는 약속 이것을 뭐라고 했죠. 나단의 신탁이라고 했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나단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것이 점점 종말론적으로 해석이 되어요. 종말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이 패역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심판하고 사단의 권세를 꺽고 그의 의의 통치를 확립하고 그래서 온 세상이 샬롬이 일어난다는 종말에 대한 소망이 발달하고 그 소망이 일부 어떻게 변동이 됐냐면 나단의 신탁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자기 아들 진짜 다윗 같은 메시야를 보내서 그의 의의 통치를 정말 대행하게 했어요.
이스라엘의 유대 왕 다윗의 그 자손들은 다 실패했는데 종말에는 진짜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떤 사람이어요.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썩 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윗보다 하나님 마음에 썩들 다윗의 아들을 세워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일어나게 하고 그래서 샬롬이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어요. 구약에서 부터 나오는 메시야 사상이어요. 그래서 구약의 유대교의 종말론이 크게 말하면 두 종류여요. 정말로 복잡했어요. 아주 단순화해서 크게 말하면 두 종류 종말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과 이스라엘 내에 있는 사단의 통치를 꺽고 이 세상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사단에 대한 순종을 심판하고 의의 통치를 이루어서 온 세상이 샬롬을 이룬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의 메시야를 보내서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를 보내서 그를 통해서 사단의 통치 사단의 나라를 꺽고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종말론이다.
그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어요. 유대교에 그래서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이 드렸던 기도 기도문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 이 카도쉬라는 기도가 있었어요. 이 기도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야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당대에 빨리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빨리 사단의 통치를 종결지우고 여호와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이런 context에서 여호와 그의 통치 그의 나라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쓰이기 시작했어요. 이런 종말론적인 소망과 관계해서 아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구약에는 안 나오고 유대교에도 드물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쿰란 문서 일부에 종말에 대한 소망과 관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바라는 그의 통치 그의 나라 통치라는 말과 나라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תכלמ 라는 말이어요. 이 말이 몇 문서들에서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기도가 얼마나 간절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의 당대에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 말이죠. 그의 통치를 세우신다. 그래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빨리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의의 통치를 세우시길, 이런 간절한 소망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께서 여기 뭐라고 했어요.
막 1:14-15 때가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로 작정한 예정한 그의 때가 찼다. 그의 때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 이게 뭐여요. 기쁜소식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사단의 통치와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허덕이면서 하루 빨리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옵소서 죄와 죽음의 사단의 통치를 몰아내고 의와 샬롬이 통치 생명의 통치를 세우시길 간절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카도쉬 기도에서 하는 바와 같이 기도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지금 뭐라고 선포하는 거여요. 너희들이 바라고 바라던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가 당도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아주 기쁜소식 아닙니까? 이게 복음이란 말이어요. 복음 !
자 이 다음 시간에 부터 이 내용을 예수께서 어떻게 설명을 했는가. 이 복음내용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모저모를 조금 시간을 두고 살펴 보겠습니다.
[출처] 천국복음 선포|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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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2) – 김세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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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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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나라-막1장14-15
마태복음8장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번에 이어서 우리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몇 번에 걸쳐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하는데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번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배경을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4가지 존재들을 살펴 보았어요. 간단히 요약하면 창조사상 그리고 타락사상 언약사상 종말사상. 구약과 유대교에 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 사상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 지난 번에 살핀 배경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으로 세상의 왕이었다.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여야 이 세상이 생명을 누리며 의롭고 평화롭고 축복가운데 산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힘으로 스스로 자기가 인간 자신의 왕이 되어서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 가지고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단의 통치속에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결핍이 생기고 악의가 생기고 고난들이 생기고 그런 것을 죽음이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데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줄 것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심으로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 그 언약사상 그런데 거기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제 오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권자인 메시야를 보내서 이 땅에 그의 통치를 세우심으로 이 땅에 평회와 샬롬을 이루신다. 그런 것이 4개의 존재들이 말한 바인데 4개의 존재들이 다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4개의 존재들이 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나 실제로 이 구약과 유대교에 하나님 나라라는 구절 숙어는 참 드물어요.
예수께서 쓰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자체는 참 드물게 나왔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것도 유대교의 중심사상인데 그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사상은 예수께서 상당히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새로운 언어였어요. 듣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죠.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사상이었어요. 4가지 사상으로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는 구약과 유대교에 근거해서 구약과 유대교와 계속성도 있고 예수께서 전혀 새롭게 구약과 유대교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새롭게 표현하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그 새로움도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의 메세지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의 메세지를 쉽게 이해하면서도 아! 새로운 가르침이다. 우리들의 랍비들이 가르침과는 좀 새롭다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늘 새로움.
더구나 예수께서는 랍비들과 같은 형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아주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어요. 전에도 제가 한 번 말씀을 드렸는데 전에 기억납니까?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 예수의 모든 가르침에는 엄청난 이 권위의식이 숨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예수의 권위주장이라고 그래요. 신학자들은 가령 αμην 이란 말 사용에서 우리가 그런 것을 제일 먼저 느낀다고 그랬죠. 우리는 아멘을 어떻게 씁니까? 아멘이라는 말은 확실하다. 진실하다. 그런 말이어요. 진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멘을 응답용으로 쓰지요. 하나님 말씀 끝에 아멘 이렇게 응답하지요. 그런 말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게 진리이다.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멘이어요. 또 기도 끝에 또 아멘 그렇죠. 내가 하나님께 하는 찬양과 청원이 확실히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진정으로 나의 청원이다 하는 뜻으로 아멘하죠. 그리고 대표기도 끝에 아멘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사람의 기도를 함께 하나님께 드렸다 하기 위해서 아멘 하죠. 이렇게 응답용어로서 유대인들도 꼭 그렇게 아멘 했어요. 응답용어로만 그런데 예수는 응답용어로도 썼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복음서에 보면 아주 독특하게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하고는 예언의 말씀을 선포해요. 그래서 이 아멘이란 말을 비 응답 용어로 문장의 제일 첫 머리에 쓰는 것이어요.
그런데 유대문서를 아무리 뒤져 봐도 아멘이라는 말을 그렇게 쓴 사람이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여 진 성경인데 우리 신약성경에도 이 아멘이란 말은 헬라어로 번역을 않고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만 해가지고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남겨 놓았어요. 왜? 예수의 독특한 어법이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말 성경 번역에도 그 정신을 살려서 그대로 놔 두어야지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에는 이것을 전부 진실로 라고 하여 번역을 해 놨어요. 그 뜻을 번역해 놨어요. 진실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요? 여러분들 성경 읽다 보면 공관복음에 뭐라고 무슨 말이 가끔 나와요?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진실로는 사실 전부 아멘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에는 성경 일독 하시고 이독하시게 되면 그 차이를 알게 되지요. 요한복음에는 어떻게 되어 있어요? 아멘이 두 번 되풀이 되지요. 요한복음을 우리 개역번역으로 읽는다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니까 요한복음에는 원래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어요?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렇게 되어 있는 거여요. 하여간 중요한 것은 아멘을 비응답용어로 쓰는 것은 오로지 예수만 이렇게 쓴단 밀이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속에 예수의 엄청난 권위주장이 담겨 있는 거여요.
이 예수당시에 랍비들은 가르칠 때에 자기 선생님들의 이름을 대대로 부른다고 그랬지요. 랍비ㅇㅇㅇ는 랍비ㅇㅇㅇ의 이름으로 랍비 ㅇㅇㅇ의 가르침을 가르치되 이런 식으로 . 그러니까 제가 랍비 김세윤이 자기 선생 랍비의 가르침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해 주는데 이 사람 선생은 ㅇㅇㅇ 이 사람선생은 옥한흠. 이런 식으로 3대 4대 선생 이름을 댔어요. 왜 그렇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 그 가르침이 율법을 준 모세에게서 온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모세시대에서 부터 대대로 신실한 선생들에 의해서 이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된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 가르침을 이런 서문을 달아 가지고 가르칠 때는 여러분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려 가지고 제 선생 대대로 해서 궁극적으로 모세에게 호소함으로 제 가르침의 권위 그의 진리를 대대로 확보하려는 것이죠. 이것이 제가 사사로이 생각해 낸 진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세에서 부터 오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이 대래로 물려받은 위대한 가르침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이런 것 아닙니까?
또 구약의 여러분들 선지서를 읽어보면 선지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까 이사야서를 읽을 때도 뭐라고 그랬지요? 여호와의 말씀이다. 랍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에게 임했다. 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내게 말했다 라고 서문을 달고 그 다음에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지요. 그래서 선지자들도 청중들로 하여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 인간적인 말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이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나를 이렇게 영감을 해서 내가 지금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선포한 말의 하나님 말씀된 권위 진리를 확보하려고 서문을 달았어요.
그런데 이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께서 전혀 무슨 랍비 누가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의 가르침을 기르치되 그런 것도 없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다. 그런 것도 없어요. 누가 말해요. 내가 말하죠. 아! 그러니까 아멘이란 말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말게 되는 거여요. 꼭 구조가 이렇게 되는 거여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나의 권위로 말하는 것이다. 그 내가 가르치는 말씀이 진리됨 아멘됨 아멘은 무슨 뜻이라고 그래요. 진실하다. 확실하다. 진리이다. 그런 뜻이라고 그랬지요. 내가 기르침 말의 아멘 됨을 내가 보장한다.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에서 엄청난 권위를 주장하는 거여요.
그 다음에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모세의 율법에 대한 것에서도 예수는 엉뚱한 표현을 주장했다고요. 살인하지 말라. 옛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라고 십계명을 인용하면서 옛 사람들에게 선포된 임시적이라는 것. 그러나 이제 자신을 통해서 선포되는 종말의 완성된 계시는 그냥 남의 목을 치는 살인이 아니고 남을 상대로 미워한다든가 형제를 무시해서 바보 멍텅구리라고 한다든가 이렇게 전부 살인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것은 모세의 법보다 더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는 예수의 자기주장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과 유대교의 종교는 모세에게 궁극적인 권위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이고 사상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가르침을 전제로 하되 그것을 더 풍부하게 새롭게 종말에 완성된 계시자로서 구약과 유대교가 더 새로운 더 풍부한 더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분이어요.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은 한편 구약과 유대교의 연속성도 있으면서 다른 한편 항상 새롭고 더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어구에도 그래요. 자 그러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하셨는가. 예를 좀 들면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 그것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예수는 뭐라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까? ‘당신의 나라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마땅히 왕으로 주로 군림하셔야 하나 이 땅에서는 그의 왕권을 찬탈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에 의해 그의 왕권이 무시되고 그의 뜻이 거스려 지듯이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더러 이 땅에 사단의 세력을 꺽고 그의(하나님) 통치를 세워서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빌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지요.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주로 역동적인 개념이다라고 알 수 있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하나님 나라가 주로 장소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통치하심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왜냐하면 당신의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하게 하소서.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죠. 마찬가지로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저 하늘이 아니고 하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의미로 땅에서와는 달리 땅에서는 사단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니까 그런 의미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장소적인 의미로 하늘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우선 여기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주로 역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통치. 이것이 곧 구원이어요. 구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사단은 우리에게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무엇으로 품삯을 준다고 그랬어요. 품삯은 죽음으로 그랬지요.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한 말이어요. 롬 6:23절 죄의 삯은 죽음이라.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주어요.
그것을 지난 번에 제가 여러 가지 그림들로 설명을 했지요. 그러니까 사단은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해요. 하나님은 의와 생명을 주어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덧입는다. 하나님은 어떤 분? 무한한 창조자 우리 생명의 원천 우리 생명을 지탱할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는 분 그 분이 우리에게 왕노릇해 주신다. 그러니까 이것이 구원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역동적이 된다.
둘쩨로는 여기서 무엇을 배워요. 그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와야 할 것이어요. 우리가 빨리 오도록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되어요. 그러니까 미래적인 것이 되죠. 미래적인 것.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을 선포하셨는데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문학전승과 연속된 것이어요.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다고 그랬던가요?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사상에서 그 세대 역사를 두 시대로 갈라 생각했다고 그랬지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대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서 이 세대를 심판하시고 사단의 세력을 꺽고 하나님의 통치 다스리심을 이루시는 오는 세대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구원의 시대라고 그랬지요. 오는 세대.
그러니까 예수도 일차적으로 이 땅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이 구약과 유대교의 이 둘을 수용하셔서 하나님께서 빨리 사단의 통치를 꺽고 통치를 땅에 이루셔서 이 땅위에 의와 생명이 기득 차는 그런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기도하라. 그렇게 가르치고 그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곧 임한다고 여러 곳에서 가르쳤어요.
한 번 그 예를 보겠습니다. 막 9:1절 같은데 가령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미래에 임한다는 것 곧 임한다는 것 눅 21: 3절도 막 1:15절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이 구절은 이렇게도 해석이 되고 저렇게도 해석을 되어 엇갈리는데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하나님 나라가 거의 당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거의 모퉁이만 돌아오지 않았지 하나님 나라가 모퉁이에 돌아온 셈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가 가르쳤다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임할 것인데 미래에 임해도 곧 임할 것으로 그렇게 가르쳤어요.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인자’라는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여요. 그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을 인자가 오리라 그가 심판과 구원을 위해서 오는 것으로 그런데 그 옴이 하나님 나라여요. 함께 미래적인 것인데 임박한 일로 곧 온다고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것도 가면서 하나 해결해야할 문제여요. 재미있는 현상이어요.
이 우리가 복음서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와 인자라는 문구는 분명히 내용적으로는 연결이 되요. 그런데 이것이 같이 나오질 않아요. 거의 항상 분리되어서 나와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쓸 때에 인자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왜 내용적으로는 같은데 또는 연결되었는데 이렇게 분리되어서 나타나느냐? 그것도 우리가 해결해야 되어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요. 특히 인자 예수께서 자기를 인자로 불렀느냐 이것이 무슨 뜻이냐? 정확히 번역하면 문자적으로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란 말인데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왜 예수께서 자기를 그렇게 불렀는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을 해결해야 되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이것이 내용적으로는 일치하고 연결되었는데 같이 나오질 않은가? 그런 것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여요. 여기서 일단 내용적으로는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곧 온다. 이런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의 심판이 있고 구원이 있을 것을 여러 곳에서 말하지요. 막 12:32절에서도 그렇고 마 24:41,50절도 그렇고 여러 곳에서 말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관심을 가지고 묻기도 하고 즉시 임할 것을 생각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죠.
다음, 자,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임한다고 예수께서 가르쳤다. 그런데 그 미래라고 하는 것은 임박한 미래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둘째로 그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가르쳤나? 예수께서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양 모습을 가진다고 가르쳤나? 이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예수가 가르친 구절 생각납니까? 여러분들 이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예수께서 가르쳤나요? 주로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흔히 나오는 비유들이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주로 비유들로 가르쳤잖아요. 비유들은 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이 비유들을 자세히 보면 주로 잔치 베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그의 자녀들로 맞아들여 식탁을 배설하고 잔치를 베품 특히 잔치들 중에서도 흥겨운 혼인찬치를 비유로 많이 그렸죠. 또는 가끔 상속의 비유들도 가르쳤죠. 그럼 하나님 나라의 귀중함. 그것이 말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나라가 우리가 생각하고 계산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갑자기 임할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 도적의 비유로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가지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하나 다만 그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서 일체 그리지 않아요. 이것은 이 당시 유대교의 묵시문학이나 나중에 유대교 기독교 전승을 이어받은 이슬람 코란과 비교해 보면 예수의 가르침의 독특성이 금방 두드러져요.
당시의 유대 묵시문학이나 나중에 랍비들이 신비문학 더 나중에 이슬람 코란 같은데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굉장히 현란하게 그려저 있어요. 그 모습을 여러분들은 우리 요한 계시록에서도 일부 볼 수 있죠. 하늘의 궁전의 모습 금 은이 번쩍이고 무슨 촛불들이 번쩍이고 천사들이 굉장히 많이 거기 운집해 있고 그런 모습들. 그것이 묵시문학이나 신비문학이나 나중에 이슬람 코란에 있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런 기술이 예수께는 없어요.
다시 말하면 유대 묵시문학이나 신비문학에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것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귀중한 가치들로 생각하는 것들로 하늘에 전부 모여 있는 걸로 하나님 나라를 그려요. 그래서 굉장히 물질적인 인상을 줘요. 현란한 찬란한 그런 보석 금 은 보화가 번쩍이는 궁궐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하게 한다든가 그 곳에서의 삶이 만족하고 이런 굉장히 물질주의적인 인상을 주는 그림을 많이 그려요.
예수께서는 그런 그림을 엄격히 억제하고 그 하나님 나라가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주로 일반적으로 천명하는데 그쳐요. 그 구원을 물질적인 그림들로 그리는 일을 삼가해야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든 것 종말의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대에 땅의 소출이 어떻게 된다고 해야 맞다고요. 포도 한 송이가 장정 몇 명이 들어도 못 들 정도로 커진다고 이런 그림으로 그렸다고 그랬죠. 그리고 우리 얼굴들이 광채가 빛나게 현란하게 된다고 그런 그림들로 그려놓았다고 그랬었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잃었던 6가지를 다 회복한다고 봐가지고 그걸 그림으로 그린 거여요. 얼굴들이 태양보다 빛나고 우리의 육신이 장대해지고 장성해지고 먹을 것이 풍부해진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 땅의 열매 나무의 열매들이 엄청나게 많이 커지고 이런 그림들을 많이 그렸지요. 예수께서는 이런 그림들을 일체 삼가했다는 거여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아주 현란하게 그려주어야 기분이 좋잖아요. 우리가 그런대로 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서 재능 있는 부흥사들이 그렇게 많이 그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을 절제하셨다는 것. 그것은 왜 그러느냐면 나중에 보겠지만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워넝에 대한 굉장한 강조가 있어요. 예수의 가르침에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들이 확대된 모습으로 자꾸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그림으로 삼아서 자꾸 그리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굉장히 이 세상적인 가치로 물질적인 가치로 오해하기 쉬어요. 그것을 예수께서는 피 할려고 그래요. 그것은 예수께서 상당한 절제된 모습 속에서 주로 두 그림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그렸어요. 둘 다 그림이 똑같은 그 실제를 말하고자 하는 바여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잔치의 그림은 예수께서 아까 우리가 마8:11절도 하나님 나라에 어떤 답니까? 동과 서에서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의 식탁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 함께 앉는다. 잔치를 나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많이 비유하시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어떤 비유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푸는 주인으로 종들을 시켜 가지고 세상의 큰 길 골목길 다 가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다 불러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쨌다고요? 잘 안 올라고 이 핑계대고 저 핑계대고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어요. 유대인들을 두고 하는 소리여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면서 유대인들에게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는데 유대인들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쨌다고요. 원래 초대되지 않은 사람들 절름발이들 이런 사람 다 불러 오라고요. 무엇을 말하는 것이어요. 우선 일차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야 되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을 원래 초대했다는 자들이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행하지 않으므로 이방인들이 먼저 잔치에 들어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함. 이것을 다시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죠. 잔치의 비유는 이 잔치라는 것이 우선 여러분들이 잔치를 머리에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라요. 풍요로움. 음식의 풍요로움. 그러면 잔치의 경우에는 뭐가 있어요. 만족함이 배불리 먹고 만족함 만족함이 있으면 뭐가 있어요. 기쁨이 있죠. 잔치의 기쁨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잔치를 하면 꼭 노래 한 자리씩 하는 아주 재미있는 풍습이 있지 않습니까? 잔치에는 산해진미 이런 것이 여러분들 잔치를 하는 그림이 금방 머리에 떠오르기도 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이 말이어요.
그럼 지금 우리가 사단의 나라 사단의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의 우리의 실존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요. 지난 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결핍. 우리의 피조물적 제한성에 갇혀 가지고 우리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장소적으로 제약이 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제약이 되어 있고 이런 결핍성이 있어요. 여기서 뭐가 와요. 욕구불만이 오죠.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쌓일 수 있는 불만 그래서 뭐가 있어요. 슬픔과 아픔이 있지요. 인생의 슬픔과 아픔 왜? 슬픔과 아픔이 고난으로 가득차 있으니까 아무리 능력이 부족해서 지혜가 부족해서 그러죠.
영원에 참여하면 그런 변화의 노예가 되겠습니까? 쇠약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사회가 어떤 사회여요? 악의가 가득찬 사회이지. 서로 어떤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고 그래서 좀 더 많은 안전과 행복을 쟁취하려고 만인이 만인을 대항해서 싸우는 이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늑대 노릇하는 것이 인간사회지이요. 그래서 다윈의 법칙이 적용되는 약육강식하고 적자생존하는 엄청난 생존경쟁이 벌어진 것이죠. 이것이 지금 우리 인간사회가 사단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참여하는 무엇이냐? 그 무한에 들어감 . 그러기 때문에 무한에 참여함. 그 속에 만족과 기쁨과 사랑이 있다. 그것을 잔치에서 표현한 것이어요.
이것은 예수께서 처음이 아니고 구약에서 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보통 잔치에 표현했어요. 구약에서 부터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도 그렇지 않습니까? 끝이 어떻게 되어요. 내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베푼다고요? 잔치상을 베풀어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앞에 상을 베설하시고 어쩐디고요? 내 잔이 넘친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 품에 앉고 나를 그 쫓던 사단의 세력에서 부터 나를 보호하실 뿐아니라 그들 앞에서 내게 상을 베풀고 내 잔이 넘치게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그렇게 잔치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에서 부터 오는 아주 중요한 숙어 메타포여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인들이 종말에 있을 그 메시야 시대 종말에 있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의 통치를 꺽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이루실 것을 잔치로 많이 그렸어요. 그것을 예수께서 이어 받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해요.
그러나 다만 가령 유대 묵시문학 같으면 그 잔치상이 어떻게 생겼고 그 잔치상은 어떠하고 뭐 많이 그렸을 것인데 예수는 일절 그런 것을 그리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우리가 참여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심. 그것은 뭘 말한다고 그럽니까?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 그러니까 피조물의 제한성 한계성 피조물성을 극복하고 어떤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피조물의 한계성에서 결핍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나옴. 이 고난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그랬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가 사단의 자리에서 우리의 피조물적 제한성 한계성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죽음인데 여기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럼 그런 생명은 어떤 생명이겠어요? 여러분들. 우리같이 결핍된 제한된 인간적인 자원들로 이루어지는 삶을 그런 삶을 삶이라고 그래요? 삶이라고 해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랬지요? 왜? 고난들 죽음의 증상들 죽음병 있는 삶. 이것을 우리는 인간적인 삶.
그런데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 하나님의 초월을 통해서 무한한 지혜에 참여함으로 불안함이나 무한한 능력에 참여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를 일으켜서 괴로운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적인 삶 하나님적인 삶 하나님의 무한으로 이루어진 삶. 인간의 죄악 된 자원으로 이루어진 삶을 인간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진 삶이 하나님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성경에서는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는 오는 세대에서의 삶이라는 말이어요. 아까 유대인들은 이 역사를 두 세대로 나누어서 보았다고 그랬죠?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우리를 죄악 된 세계에 갇히게 만들어 가지고 죽게함. 다시 말하면 죄와 죽음으로의 통치에 반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오는 세대에서의 삶을 영생. 영생이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오는 세대의 삶이다. 그 말이어요.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해서 얻은 삶 이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이무런 결핍이 없는 삶. 아무런 고난이 없는 삶. 긍정적으로 말하면 온전한 삶 그러니까 신적인 삶을 가지는 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어요. 하나님과 같이 됨.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이어요. 인간이 피조물이 피조물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으로 하나님과 같이 됨.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됨의 궁극적인 구원이 품위 있는것 같이 보임. 아담이 취한 길. 스스로 하나님께 대항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함. 요새 말하면 인본주의의 길 인간 스스로의 지혜와 선행을 계속 계발해 나가면 인간이 자기자신의 문제들을 다 극복하고 전혀 결핍이 없고 고난이 없는 세상을 만듬. 그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유토피아 세상이라 그러죠.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상상을 하지요. 그것을 성경은 무엇이라 합니까? 교만이라 합니다. 그 길은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어쩐다고요? 비인간화. 인간을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인간의 모양에서 타락하게 만들어서 인간 이하로 떨어지게 됨. 그래서 사단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하고 죽음에 떨어지게 하는 것. 반면에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해서 우리에게 좋은 길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감.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하고 그 통치속으로 들어감. 그러니까 역설이죠. 이것이 첫 아담의 길은 하나님이 필요 없음.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이다고 자기 주장함.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하로 떨어뜨리고 죽음으로 떨어뜨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기는커녕 죽음에 떨어 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선포하는 길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해주심에 스스로 나아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함 하나님의 무한한 부한 잔치에 참여해서 신적성장을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됨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이란 하나님과 같이 된다.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두려워해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런데 우리 가령 예수의 이 가르침을 여러가지 표현을 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됨. 곧 상속이라는 뜻. 바울이나 사도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 하나님의 형상으로 옴. 하나님의 영광을 얻음. 이런 것들도 다 똑같은 말이어요. 전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됨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우리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느냐? 옛 아담의 길로 되는 게 아니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종국적으로 우리가 그에게 의존하는 피조물로 우리를 인정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참여해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것은 은혜죠. 그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 그것을 말하는 거여요.
자 그래서 예수께서 잔치로 구원을 잔치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설명하는 거여요. 상속이라는 의미도 마찬가지여요. 이것은 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께서 이 아까 아멘이라는 말을 예수께서 독특하게 쓰셨다고 그랬지요. 예수께서 득특하게 쓴 말 한마디는 하나는 아빠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마디가 뭐여요? 아빠. 하늘에 계신 이 아니고 우리 어순 때문에 그런다고 그랬지요.
원래 어순에는 아빠 하나님 아빠 이것은 유대인들이 감히 하나님께 쓰지 못하는 언어라고 그랬지요. 예수만 하나님 아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뭐가 되는 거여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지요. 예수께서 너희들이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할 때 2차적인 의미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결하고 견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2차적인 의미가 무엇이라 했어요. 하나님을 아빠 부르는 자들이 되라. 왜? 아빠는 어린아이 언어이거든요. 가정내에서의 어린아이언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들이 되라는 것. 예수께서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그랬지요. 주께서 가르쳐 주신 첫 마디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죠.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스스로의 상속자된 우리가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어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등 청원.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를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이거든요. 기도라는것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고자 하는 것이지요. 잔치와 똑같은 그림이죠.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상속받고자 함. 그래서 우리의 제한성 결핍성으로 부터 해방되어서 풍요로움을 얻고자 함.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상속의 그림으로 많이 그렸어요. 상속의 그림과 잔치의 그림이 합쳐져서 나오는 아주 가장 유명한 비유는 탕자의 비유여요.
여러분들 탕자의 비유 전반부는 무엇을 그려요? 아담적 인간의 모습. 하나님으로 부터 어느 정도 자원을 받은 인간이 마치 아버지로 부터 자기 분깃을 주장해 가지고 멀리 아버지로 부터 가 버리는 자 그래서 자기의 제한된 분깃으로 자원으로 자기가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누리고 자기 멋대로 스스로 주인 노릇 하면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자. 아담적 인간의 모습. 우리 죄인을 사단의 통치아래서 사단의 꼬임 속에 빠져서 있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뭐라고요? 죽음이라고요. 그에게 구원은 무엇이어요. 아빠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 감히 더 이상 상속을 바랄 수 없어요. 그래서 나를 아들로 취급하지 말고 종으로 취급해 달라. 예수의 비유여요. 하나님께서 그 탕자를 다시 아들로 회복시키시고 상속자로 회복시켜요.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상속자로 회복시켜요. 그리고 뭐합니까?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고 그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모습이어요.
그래서 이 잔치와 상속을 두 그림으로 합쳐서 아주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이 뭡니까? 탕자의 비유죠. 이 안경을 쓰면 책이 보이는데 여러분의 아름다운 얼굴이 안 보이고 이 안경을 쓰면 여러분의 빛나는 얼굴은 보이는데 태초의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의 그림이 보이는데 글씨가 안보이고 그래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데 이 상속의 그림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 이런 하나님 나라에 오라. 예수께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어요.
자 오늘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이어요. 오늘은 미래 올 하나님 나라의 한 면을 봤어요.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나? 이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출처] 하나님 나라(2) – 김세윤 박사|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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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3)-김세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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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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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의 현재성 -눅11장14-22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희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있던 재물을 나누느니라”
지난 시간에는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실 것으로 곧 오실 것으로 선포하셨다. 그때 그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나타내는 역동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곧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우리에게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할 것을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주로 미래적으로 말씀하셨는데 미래에 오시되 곧 오실 것으로 가르쳐 주셨다 하는 것을 살펴보았고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면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 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예수는 그 당시의 유대묵시가들이든지 또는 나중의 랍비들이든지 그런 사람들처럼 현란한 물질적인 감각을 굉장히 자극하는 그런 언어들로 그리지 않고 단순히 그게 우리 인간의 삶 전체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는 일반적인 언명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우리가 그의 자녀들로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특히 그림으로 그린다면 상속이란 그림과 잔치라는 그림으로 그리되 더 자세히는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서 굉장히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하나 예수도 그런 쪽으로는 많이 권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어서 우리가 온전해짐 우리가 신적인 생명을 얻음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됨 그래서 인간의 제한성 결핍성에서 오는 모든 문제를 고난 이런 것들이 종식되는 상태이고 우리의 온전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는 주로 두 가지 그림으로 상속 잔치라는 그림으로 설명을 하되 그 상태를 현란한 물질주의적인 언어로 그리지는 않으셨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어요.
자 오늘은 세 번째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살펴보면 또 하나 특징이 드러나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여기 지금 임했다는 선포여요. 눅11:20절에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 예수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 실현이 되었다. 실현이 되고 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것이어요. 사실 우리가 공관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래서 한 편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해서 미래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가 곧 오실 것이다. 한 편 현재적으로 말하기도 해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여기서 지금 구원의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현재적으로도 말해요.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이렇게 미래적으로도 하신 말씀이 있고 현재적으로 말하는 말씀들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자세히 보면 현재적인 면에 비중이 더 가 있어요.
현재적인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그 구원의 힘을 이미 발휘하고 있다는 현재적인 면의 비중이 좀 더 커요.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당시 유대교의 가르침과 더 다르게 특징을 부여하는 요점이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사실은 당시의 유댜교적 배경과 비교해 보면 특징들이 참 많아요.
지난 번에 말한 것처럼 구약과 유대교의 기본사상을 이어받으면서도 그만큼 공통점이 있죠.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교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를 많이 가르쳤는데 그게 차이점이죠.
그 중의 하나가 두드러진 것이 예수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지금 여기서 현재 구원의 힘을 발휘한다. 이것을 강조하는 점이죠.
그래서 예수께서 뭐라고 그럽니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가 세례요한으로 끝나고 자신의 사역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시대가 도래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고 선언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통치 영역으로 지금 들어 오도록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 11:13절을 읽어 봅시다. 13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에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귀 있는 자들은 들을 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역사를 두 세대로 나누어서 생각했다고 그랬지요. 이 세대 오는 세대,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통치하는 죄악과 고난의 죽음의 세대. 끝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를 보내서 사단의 세력을 꺽고 그의 통치를 한다. 하나님의 통치 노릇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한다. 그래서 구원의 세대 이렇게 보았다고 그랬지요. 이 예언자들 선지자들 구약과 유대교의 이 세대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며 준비하도록 했던 그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가 세례요한으로 끝나고 세례요한이 구약과 유대교의 시대의 즉 이 세대의 종결이라고 자기와 더불어 세로운 세대 종말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새 시대가 도래 했음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도래하여 그 구원의 힘을 지금 나타내고 있음을 무엇으로 증거했느냐? 여기 오늘 읽은 본문 눅 11:14-2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의 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이것으로 그를 통해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를 삼은 것이어요.
이 이야기는 잘 아는 이야기이지요.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까 귀신을 쫓아내고 신유의 일을 많이 하심으로 사람들이 거기 예수를 적대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비아냥거려요. 그 사람이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바알세불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여기 본문에는 분명히 바알세불이 마귀 사단의 별칭으로 쓰는 것이 분명해요. 본문에서는 모든 귀신들을 졸개들로 거느리는 귀신들의 왕국 이 세상의 왕 그러니까 사단의 별칭으로 바알세불이란 말이 쓰인 것이 사실이어요. 이 본문에서는 .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에 사단이란 별칭이 참 많았어요. 여러가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바알세불을 별칭으로 삼은 것은 우리가 아직 문서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까지 공용되지 않았다. 그런 말이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를 욕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단의 별칭 바알세불이란 말을 만들어냈다는 말이어요. 그러면 이 바알세불이라는 말이 본문에서는 예수를 욕하기 위해서 사단의 별칭으로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이런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근거가 무엇일까? 이 말을 분석하면 이 말은 두 마디로 되어 있어요. 바알과 세불이라는 말. 이 말들을 엮어서 한 말로 만들은 것이어요.
바알(לאב)이란 말은 원래 샘족어에 남편 또는 주 라는 보통 명사여요. 우리도 지금도 그렇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부인이 우리 남편을 우리 주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럽니까? 누가 그러네요. 옛날에 남성위주의 사회에서는 부인이 남편을 주인이라고 불렀어요. 우리 한국에도 그런 관행이 있어서 부인이 남자를 우리 주인이라고 그래요. 남편은 거기 상응해서 자기 아내를 집에서 부리는 하인으로 생각을 해서 우리 집 사람 이렇게 완전히 부부관계가 주인과 하인으로 되는데 이 팔레스티나에서도 그랬어요. 그래서 바알이란 말은 남편이란 뜻도 있고 주라는 뜻도 있는 보통명사여요.
그런데 이 말은 신에게도 적용했어요. 특히 가나안 신화 가나안 종교는 부, 주신들을 중심으로 한 다신교였죠. “לא” 아버지 신. 부신은 엘과 부신으로 부터 권세를 위임받아서 세상을 통치하는 아들신이 자신이 לאב. 가나안 종교는 엘신과 바알신, 부신과 주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였는데 바알신이 주로 세상과 관계하는 신이어요. 세상을 다스리고 이 신은 구름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비를 내려주어요. 비를 내려서 땅으로 하여금 비옥하게 하기도 하고 소출을 많이 하게 하도록 하는 신이어요. 소출 생산을 많이 하게 하는 신인 동시에 생식의 신 그래서 모든 생식을 하게 하는데 있어서 원동력을 바알이 준다고 봤어요. 땅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짐승들 간에도 사람들 간에도 생식은 바알의 신에 의해서 된다. 그래서 가나안의 바알숭배가 가나안 종교에 있어서 바알숭배가 바알숭배를 통해서 생식이 힘을 얻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알숭배가 어떻게 표현되었느냐면 여러분들 구약성경에서 가끔 보다시피 성전의 창기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바알신전에서 신을 섬기는 여자들을 고용해 가지고 남자 사제들과 이 여자들이 성교를 함으로 신을 기쁘게 하고 생식이 힘을 얻는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바알숭배가 아주 음란한 종교로 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눈으로 볼 때는 타락의 극치의 현상을 속출하는 그런 종교였어요.
그런데 외형적으로 이스라엘의 야훼숭배사상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 그들의 모세를 통해서 준 하나님의 야훼의 계시와 야훼의 출애굽의 구원에 따른 체험에 근거한 야훼숭배종교와 자기들이 새롭게 정착해서 관찰하게 되고 자기 주위에서 행해지는 가나안의 바알종교와 많이 혼합을 했어요. 그래 가지고 이스라엘의 야훼숭배가 많이 타락하고 위협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구약의 선지자들은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의 아주 많은 수가 특히 포로 이전 선지자들의 대다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알숭배를 없애는 바알숭배와 싸우는 그런 역활을 하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엘리야 선지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바알하면 이렇게 남편 주라는 보통명사이면서도 동시에 가나안의 타락한 우상숭배의 가장 잔인하고 퇘폐적이고 천박한 형태의 신 그런 감을 갖는 것이어요.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우상 자체는 하나의 돌조각 나무조각에 불과하다고 보았어요. 그러나 인간의 우상숭배행위를 이용해서 인간을 사로잡는 힘이 사단이라고 그랬어요. 우상 표현을 사단이 작용한다고 보았어요. 그러니까 바알이라는 우상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 사단이 있는 것이어요. 거꾸로 말하면 바알은 사단의 표현이어요. 그런 의미로 바알이라는 말을 썼구나 우리가 알게 되어요.
“세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처지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하늘이 세불이어요. 하나님의 거처지로서. 땅위에 있는 세불은 무엇이냐? 예루살렘 성전이 땅위에 있는 세불이어요, 다시 말하면 세불은 성전이란 말이어요.
자, 바알세불이란 말이 이런 두 단어의 혼합어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원래 조합할 수도 있지요. 바알세불이란 말이 성전의 주 라는 뜻을 들 수 있죠. 그러나 바알신전에서 퇘폐적인 예배가 벌어지는 사단의 인간을 타락시키는 힘이 그런 우상숭배를 상상하게 하는 말이죠. 그래서 아주 최근에서야 몇몇 학자들 간에 이런 새로운 관찰이 이루어 져서 유대 예수의 대적자들이 예수를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 하면서 바알세불을 새롭게 만들어낸 데는 예수의 어떤 주장과 관계가 있다. 예수의 자기주장과 관계가 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성전에 대해서 무슨 주장을 했는데 이 주장을 비꼬아서 비아냥해서 이런 말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아주 쉽게 말하면 예수가 자신을 성전의 주라고 주장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 다음 쯤에 가서 우리가 볼 것이어요. 예수께서 어떤 의미로 성전의 주라고 주장을 했나요?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어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아주 깡그리 부서 버렸지요. 성전에 올라가서 무슨 제사하고 그러는 것. 반면에 예수께서는 성전의 기능을 자신이 성취한다고 주장했어요. 죄용서를 선언하기도 하고 문등병자가 깨끗이 되었음을 선언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고 자신이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주장하고 . 그래서 바로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 예수의 체포와 재판의 죄목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산헤드린에서 재판받을 때 죄목이 그것이어요.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했다. 그 말을 성전에 가서 소란 피움으로 성전에 가서 제물을 팔고 사는 것을 금지하는 식으로 소란 피움으로 그 말을 뒷받침 했다. 그것이 예수께서 체포되고 재판받는 직접적인 동기이고 죄목이어요.
그런 것들이 다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 다음시간에 하겠지만 예수께서 자신을 성전의 주라고 한 것이어요. 곧 이 예수께서 자신을 성전의 주라고 하는 것은 또 예수의 그 알쏭 달쏭한 자기 칭호 우리 개역번역이 인자라고 번역된 말 그것이 사실은 알쏭 달쏭한 자기 칭호여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 그런 말인데 그 당시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그 말을 잘못 알아 들었어요. 알쏭달쏭한 말이었어요. 왜 그런가도 이 다음시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예수의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성전의 주라는 주장과 다 연결되어 있는데 그러한 주장과 빗대어서 유대적대자들이 네가 성전의 주이기는 커녕 사단의 앞잡이인 가나안의 우상 바알 우리 야훼신앙을 가장 역사적으로 위협하고 우리 민족을 오도한 바알과 연계해서 바알을 힘입어서 바알에게 작용한 사단을 힘입어서 귀신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욕을 한 것이어요. 그래서 바알세불이라는 말을 새로 만든 것이어요.
자,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무엇이라 합니까?
그것이 세 가지로 답을 하지요. 그것이 엉터리 틀렸음. 왜 그것이 틀렸어요. 논리적으로 틀렸음. 어떻게 사단의 힘을 빌어 가지고 사단의 졸개들을 쫓아내느냐? 사단이 자기 졸개들을 내어 쫓는데 힘을 빌러주어요? 그럴 수 없는 것이어요. 만일 그렇다면 사단의 집이 지금 파괴되었다는 말이 아니냐? 내분이 일어났다는 말이 아니냐?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질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만일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바알세불이 사단인데 사단의 힘을 빌어 사단의 졸개들을 쫓아낸다면 사단의 집안이 스스로 분쟁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저희 나라가 서겠느냐?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말이어요. 논리적으로 이것이 맞지 않다.
첫째 답. 그런데 여기 7절 18절을 읽으면서 특히 나이가 드신 분들 40세 이상 되신 분들 기억나는 말이 없습니까? 무슨 구호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여기서 온 말 여기서 온 교훈이어요. 저기 그 말은 이 본문에서 나온 말로서 서양숙어로 꽤 오래 있었던 말이어요. 아마 이 박사께서 우리 한국에 해방정국에 혼란스런 상황에서 뭉치라고 한 모양인데 그 양반이 제일 뭉치지를 못했던 양반 아닙니까? 미국에서 독립운동 할 때도 제일 뭉치지 못했던 양반이고 해방 후에도 제일 뭉치지 못한 양반이고 그래서 우리 민족이, 그 양반이 공로도 많지만 그 양반의 단점도 단점으로서 우리에게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지요. 하여간 이 본문 읽으면서 갑자기 이승만 박사가 생각나는 군요.
둘째로 예수의 적대자들의 말이 옳지 않음을 두 번 째로 19절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여기서 너의 아들들이란 말은 예수의 적대자들의 진짜 문자적으로 아들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다 셈족 언어의 숙어들이어요. ‘너희들은’ 그 말이어요. 너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이어요. 아들이란 말은 여러가지로 쓰였어요.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개별화하는 의미로 소새끼 소 한 마리 송아지 송아지를 셈족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소떼의 아들’. 문자적으로 소떼의 아들. 무슨 말이냐 하면 송아지 한 마리 하나의 송아지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불렀어요. 듣고 보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누가 사람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어디가 있어요. 이것이 다 숙어적 용법이어요.
인류 인간중의 하나 인류라는 종 중의 하나로 개별화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 아들이라는 말이어요. 소떼의 아들, 송아지 한 마리 그래서 너희들의 아들들이란 말은 진짜 너희들의 육신적인 아들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떼거리 유대인들 너희 떼의 몇 사람 그런 말이어요.
몇 사람들은 그러면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느냐?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압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어요. 그리고 병 고치는 이런 일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행했어요. 유대선지자들도 했고 랍비들도 했고 또 이방 사람들 중에서도 가끔 그런 보고가 있어요. 그래서 두 번째로 그저 말도 안 됨.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다른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음을 너희들 중에도 증거가 있지 않느냐?
그러나 세 번째 20절에 진짜 대답. 예수께서 하나님의 힘으로 원래 원 본문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그 말이어요. 하나님의 손이란 말은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보신다. 이런 언어를 전부 의인법이라 그러지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 인간의 기능에 비추어 말함. 하나님께서 손을 내민다 뻗친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속으로 개입하신다. 그런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역사속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구원의 힘을 발휘함. 바로 그 힘을 입어서 내가 귀신을 쫓아낸다.
예수께서 누구를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그래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서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개입하셔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그 힘에 의거해서 내가 귀신을 쫓아낸다. 그러니까 자기 귀신을 쫓아내는 게 무슨 증거여요. 역사속에 지금 현재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지금 나타내고 있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나타나고 있음. 죄악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를 자꾸 제거하려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의 중간입니까?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 증거를 들어서 뭐라고 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했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증거를 세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느냐? 그것을 21절 부터 설명을 해요.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요. 강한 자가 집안에 지키고 있고 그 집안이 이제 안전하죠. 그러나 더 강한 자가 그 집에 침투해서 그 강한 자를 꽁꽁 묶고 그 집안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 올 수 있죠. 탈환할 수 있죠.
이것으로 예수자신과 사단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더 강한 자로서 강한 자 사단의 왕국에 침투했어요. 강한 자가 지금까지 인류를 그의 집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어요. 귀신들로 해서 지키게 하고 인류를 꽁꽁 감옥 속에 가두었어요. 예수께서 더 강한 자로 오셔 가지고 강한 자를 꽁꽁 묶었어요. 그래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졸개들을 쫓아내고 이 사단의 왕국에 졸개들을 위해서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가고 있음. 그게 자신의 일이라는 거여요. 언제 예수께서 사단을 꽁꽁 묶었어요? 이 그림을 예수의 시험 때와 예수의 세례 때의 이야기를 예수께서 뒤돌아보면서 하는 거여요. 예수께서 세례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고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았죠. 하나님의 능력을 입었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도록.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의 세례 때 뭐라고 선포되었어요?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로서 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통치를 대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그를 성령으로 힘을 주셨어요. 성령으로 무장시켰어요. 그랬더니 사단이 즉각 예수에게 전투를 걸었지요. 결투를 신청했죠. 그것이 시험 때여요.
그래서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간시켜 가지고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대항하게 자기 주장할려고 만들려고 그렇게 해서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힘을 행사 못하고 도리어 옛 아담과 같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하려고 사단이 애를 썼죠. 그것이 시험 기사죠. 그때 예수께서 분명히 사단의 시험을 극복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고 의존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들 노릇한 것임. 그래서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할 것임을 결단하죠. 이것이 무엇이냐면 사단을 일차로 한 번 묶은 것으로 생각했죠. 그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은 사단의 통치에 대항하는 것이고 사단은 너희들을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한다. 여기 하나님의 통치가 구원의 힘을 발휘하면서 곧 완성될 것인데 지금 벌써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시위하는 거여요.
귀신들을 쫓아내서 귀신에 붙잡힌 인간들을 해방시켜서 그들을 온전하게 함, 여러가지 죄에 눌려 사는 사람들 삭개오 같은 사람들을 그의 죄의 신에서 해방시켜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결하게 하고 이웃과 연결되어서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해서 그 사람을 온전케 함. 또는 문등병자 중풍병자 혈루병자 온갖 병자들을 사단의 통치 죄악과 죽음 고난의 통치에 시달린 사람들을 치유해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나타남을 시위하고 이렇게 예수께서 계속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단의 집안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을 자꾸 구출해 가는 과정이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점점 실현되어 가는 과정이죠. 그러니까 뭐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여기에 지금 구원의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보아야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예수와 사단의 대결은 크게 세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예수의 세례 때의 소명과 시험 때의 예수가 사단을 묶음. 예수가 시험 때 사단에게 지지 않고 사단을 꺽음은 사단을 묶은 셈이어요. 그러나 사단은 예수에게 계속 대항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요. 그 인간들을 충동해 가지고 유대 지도자들을 충동하고 로마 권세자들 빌라도를 충동해 가지고 예수를 사형에 처하죠. 사단이 하는 짓이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죽음이란 사단의 최후의 무기인데 그런데 예수로 하여금 사단의 최후의 무기를 부활로 무력화시킴으로서 사단을 이기게 해요. 결정적인 승리이어요. 이런 것을 우리 신약성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에서의 예수의 사단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인 승리이니까 이것을 우리는 등뼈를 분질렀다. 이렇게 표현해요. 예수께서 사단의 등뼈를 분질렀다는 말은 두 가지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하나는 결정적으로 이겼다는 것. 하나는 그러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등뼈만 분질렀지 아직 사단의 힘이 잔뜩 남은 거여요. 아직도 그 두 가지를 말하는 거여요.
이것을 최근 2차 대전 이후에는 어떤 그림을 쓴다고요. D-day라는 그림을 쓴다고 그랬지요. 전쟁이 결판이 났다. 그런 의미로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사단의 전쟁에 있어서 결판이 났어요. 그러나 아직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어요. 아직 사단이 항복을 안 해요. 엊그제 신문에 났습니다.
내년 4월이 2차 대전 때의 D-day 50주 년 이랍니다. 1944년 4월이니까 연합군이 불란서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해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르는 날 그것을 D-day라고 그러지요. 전쟁이 결판이 난 날이다. 그런데 사실은 전쟁이 1년간 더 끌었죠. 1945년 5월 8일에 히틀러의 후계자 체내스 제독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무조건 항복서명했을 때 총성이 멎은 거죠. 연합군의 승리가 결정이 된 것이어요. 그 날을 승리의 날이라 그러지요. Victory Day. 승리의 날 그 날은 예수의 재림 때 그 날은 사단에 대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고전 15:28절 이하 지난번에 공부할 때 기억납니까? 예수께서 어쩐다고요. 재림하셔서 사단을 무력화시킨다. 또는 사단을 완전히 파멸한다. 우리에게 자꾸 죄를 사주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월급을 주는 게 사단의 본업이죠. 그래서 사단이 실업자가 되면 죄악과 죽음이 없지 않습니까? 사단을 완전히 파멸한다. 또는 실업자가 되게 한다. 또 좀 더 히브리서 10: 14절입니까? 좀 더 그림으로 뭐라고 표현해요. 사단을 발등상 만든다. 여러분들 고대 중동 그림들 한 번 보세요. 왕이 앉아 있고 왕 앞에 발로 딛는 상이 있어요. 그것이 발등상인데 그 상 밑에 누가 조각이 되어 있느냐면 가령 용이 조각이 되어 있다든가 또는 카오스 혼돈을 일으키는 신 원수 원수가 조각이 되어 있어요. 원수를 완전히 제거함의 그림이 발등상 만듦. 그러니까 예수께서 사단을 발등상 만든다. 발로 딛고 앉은 상 만듬.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사단의 대결은 이런 큰 단계로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어요. 이 상황에서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아들의 가장 기본 의미는 뭐라고 그랬어요. 상속자라고 그랬어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자 하나님의 통치를 예수가 대행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사단의 도전이 처음 와요. 예수께서 그 도전을 이겨요. 이것이 예수께서 사단에 대한 첫 승리여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 현재 예수가 하는 것은 이 사단의 통치 죄악과 죽음의 통치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벗어나서 의와 생명의 통치의 영역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고 사람들을 자꾸 초대하는 것이어요. 죄악과 죽음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여러분들에게 기쁜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사단을 주로 따르고 죄를 짓고 그래서 죽음과 고난을 품삯으로 받는 그런 삶이 아니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의 뜻에 사십시요. 그러면 거기에 의와 생명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 구원이 곧 완성될 것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눈물과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 왜? 고난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 기쁜소식을 선포하고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선포하는 그 복음을 시위하는 거여요. 그 진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시위하는 것이어요.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침 그것으로 시위하는 거여요. 그런데 그 과정을 계속 사단이 대항해요. 그래서 예수의 전 하나님 나라의 선포기간이 예수와 사단과의 투쟁의 기간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사단의 통치에 대행해서 선포하고 하나님의 통치 그 구원의 힘을 사단의 통치에 죽음의 힘에 대항해서 나타나게 하고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에 뭐라고 보내뇨?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라 이렇게 보내죠. 눅 10장 항상 이 두 가지는 같이 가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귀신 좇아내고 병자고침은 항상 같이 가요. 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침이 사실은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위요 해설이어요. 또는 실제화여요.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여러 동네에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라고 그러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이 이제 자기들의 선교사역의 성공담을 가지고 기쁨으로 돌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눅 10:17-18절 사단이 저 하늘의 왕자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고 예수께서 그러지요. 예수와 그의 제자들 교회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이 사단의 통치에서 점점 더 많이 해방되어 가는 과정은 동시에 어떤 과정이어요? 사단이 불법적으로 앉아 있는 하늘의 보좌에서 점점 더 굴러 떨어져요. 그래서 사단의 왕국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어요. 이렇게 예수께서 벌써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자신의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그 구원의 힘을 발휘하고 있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말할 수가 있고 그런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인간들의 체험의 실제여요. 인간들이 체험할 수 있는 그 구원의 힘이어요. 그래서 예수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라고 설명을 했다.
그래서 귀신의 쫓아냄과 병고침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의 시위이며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여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공급하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으로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설이며 그것의 그 실재가 되게 하는 과정이다 이 말이어요.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 주로 안식일 날에 치유활동을 벌이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어요. 왜 예수가 안식일 날 주로 치유하셨는가?
이것은 4복음서에서 심지어 요한복음에서까지 공통적으로 증거하는 바인데 바로 그 일 때문에 예수가 유대인과 유대신학자들과 심각한 마찰에 들어가요.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그런 갈등을 마다하지 않고 주로 안식일을 골라서 치유를 했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무슨 뜻인가를 알지만 아마 여러분들이 많이 관심 있는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고 지내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올바른 지냄인가? 이런 것도 모두 함축적으로 설명을 해야 되겠어요.
그래서 이 다음 시간에 제가 설명을 하겠어요. 다만 여기서 제가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한다는 말을 많이 썼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 자신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시는 일을 꼭 같이 한다. 제자들을 보낼 때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도록 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함은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보금에 대한 해설이고 그것의 실제화이다. 이런 말을 많이 쓰는데 이때에 귀신 쫓아내고 치유함을 높게 생각해 가지고 포괄적으로 우리가 하기 쉬운 좁은 의미로 서울의 김 아무개 목사가 하고 다니는 그런 의미로 생각할 것도 아니고 산 속에서 손 얹어서 앉은뱅이 낫는다는 여자들의 의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폭 넓게 생각을 해야 되요
.
우리 삶을 온전하게 하는 모든 행위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는 행위여요. 그런 것도 이 다음시간에 아울러서 설명을 하겠어요. 이것에 대한 오해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해요. 우리 신앙이 한 편으로는 이런 자꾸 미신화해 가고 미신화에 대한 반발을 느끼는 정통적인 개혁신학에서는 자꾸 우리 신앙이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어 가고 성경의 가르침이 올바로 회복이 되어야 되요. 한편 미신화도 방지하면서 다른 한 편 우리 신앙의 극단적인 추상화 관념화도 막아야 되요. 우리는 복음이 실제 우리 삶에서 체험할 수 있는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 이런 것을 이 다음 시간에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출처] 하나님 나라(3)-김세윤 박사|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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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4)-김세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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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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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하나님나라 -막2장13-17
오늘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번째 공부로서 지난시간에 우리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미래에 종말에 완전히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지금 벌써 예수를 통해서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어요. 치유로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힘을 시위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룬 구원을 가져다준다. 지금 벌써 이런 구원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종말에 그런 구원이 완전히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항상 치유로 뒷받침하고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지요. 치유가 항상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같이 가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보내면서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라고, 하나님 니라를 선포하고 치유하라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는 항상 같이 가요.
하나님 나라 선포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 구원을 약속하는 것인데 그것을 치유로 시위하고 현실이 되게 하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이 치유활동을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라. 그렇게 신학자들이 말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실제화라. 그렇게 말씀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손에 쥐어주는 그림이어요. 삽화(illustration).
오늘은 그런데 주로 예수께서는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다. 4복음서들이 똑같이 한꺼번에 증거를 해요. 그런데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또 유대신학자들은 서기관들은 안식일 날 병 고치는 것이 아주 못마땅해 가지고 예수를 그 이유로 죽이려 달려들지요.
먼저 예수와 유대 신학자들과 맨 먼저 갈등을 일으키는 issue가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어요. 유대 신학자들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일을 고집하시는지를 오늘 좀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웠어요.
우선 예수의 안식일 날 치유활동과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왜 예수는 그 치유가, 그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시위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 실제화라고 그랬는데 왜 그것을 특별히 안식일 날 해야 의미가 있다고 보았는지 그것을 오늘 살펴보고 그것을 살펴보다 보면 안식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게 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더 지켜야 되는가 그런 것도 알게 되어서, 오늘 그 공부를 할려고 작정을 했는데, 자꾸 2시 까지 성경공부가 마쳐야 성가대를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안식일 문제를 다룰려면 1시간을 꼬박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중에 잘리면 아주 고약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다음 주로 그 문제를 미루고 오늘은 하나님 나라와 치유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일반적인 서론을 하고 여러분들이 혹 질문할 일이 있으면 질문하면 좋겠어요.
먼저 막 2:17절을 한 번 펴 봅시다. 거기 막 2:13절 부터 17절 까지 한 번 읽어보십시다.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이 경건하고 스스로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그 회개하여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잘 응하지 않아요. 그런데 도리어 죄인들과 세리들은 많이 응한다 이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그 선언을 하나의 증거로 주기 위해서 그들과 늘 먹고 마시는 잔치를 행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늘 잔치의 비유로 많이 설명했다고 그랬지요. 종말에 완성될 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부요한 잔치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인간의 한계성 결핍성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 영생을 얻게 된다. 그것을 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이 비유를 설명을 했는데 바로 종말에 지금 여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한 죄인들은 바로 종말에 그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 그 영생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보증해 주고 그 잔치를 미리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항상 죄인들과 잔치를 베풀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항상 잔치를 베풀었다고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이지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로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대적자들이 예수에게 뭐라고 별명을 붙였습니까? 마11장을 제가 읽겠습니다. 11장 18절 부터 읽어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세례요한은 아주 금욕주의자였지요.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고 사막에서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양식으로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까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늘 이렇게 잔치를 베풀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창기의 친구로다. 예수의 별명이 3가지여요. 탐식하는 자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께서는 뭐라고 정당화해요?
우리가 아까 읽은 막2:18절 이하에 쭉 정당화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볼 것이 아니고 17절에 예수께서 자기가 온 것은 자기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렇게 표현하지요.
그런데 죄인을 부른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병든 자를 불러 그들을 치유함. 막2:17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이 병과 죄가 동일시 되어 있고 병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요. 그래서 우리가 2장1-11절 그 이야기를 잘 알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읽지는 않겠습니다. 중풍병자를 그 친구 넷이 들 것에 들어다가 아주 예수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음으로 길을 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들것을 내리니까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선언합니까?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5절에 저희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선언하는 것이어요. 이 사람은 중풍병자여요. 중풍병자.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준다. 너는 이제 온전케 되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아 있는 신학자들이 시비를 걸어요.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최후의 심판관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아! 이 사람이 죄를 용서해 준다고 선언하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침범하는 자로구나. 이것을 참람죄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기가 죄를 용서해줄 권세가 있음을 설명하는데 여기서도 중풍병과 죄가 동일시되어 있고 중풍병 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될 수 있고 그래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시편 103편을 보십시다. 시편103편을 예수께서 즐겨 부르는 18번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가르침을 공부해 보면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마찬가지 이지만 시편 103편의 사상이 곳곳에 드러나요. 그래서 예수께서 특별히 이 시를 사랑하시고 많이 부른 것을 우리가 확인하게 되요.
시 103편을 보시면 3절 4절 보십시다. ‘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여러분들 시의 병행 구조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바로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읽고 있는 막 2장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어요. 중풍병자에게 죄용서를 선언하고 그것에 대해서 여기 시비가 붙자 예수께서 2장 17절에 자기의 오신 목적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불러 그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할 수 있고 병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치유한다고 할 수 있고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어요.
가령 이렇게 선포할 때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특별히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세리 하나 있지요. 이 삭개오 이야기. 눅 19장의 삭개오 이야기 알지요. 이 사람에게 삭개오가 예수의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가 그를 알아 보시고 이 삭개오는 사람들 틈에 가지도 못하지요. 세리로서 하도 사람들을 압제하고 못된 짓 하고 아주 죄인으로 유대 공동체 안에서 낙인 찍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를 좀 보고 도움을 얻을려고 하지만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해서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예수께서 은혜로 구원의 손을 내밀지요.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고 내가 네 집에 가겠다 하니까 이 사람이 예수의 은혜에 감동이 되어서 여기 뭐라고 말합니까?
완전히 회개하지요. 그래서 구약의 정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보상한다고 보상하겠다고 자기 회개의 열매를 실제로 보여주고 여기 눅 19장 8절을 보십시다. ‘삭개오가 서서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사오면 4배나 갚겠나이다’ 완전히 회개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가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오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온전케 하는 힘이 이 집에 실현이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지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하지요. 그래서 이 세리들을 죄를 용서해줌은 병을 고침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몇 구절들은 여러분들에게 계획에 없었던 공부로서 몇 구절들을 방금 소개한 이유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냐면 치유란 개념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유란 개념을 많은 사람들은 꼭 육신의 병만을 고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병고를 치유하는 것으로만 보지를 않았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포괄적인 의미로 우리의 실존의 모든 면에서 전체적으로 치유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여요.
죄라는 것이 우리 모든 문제를 낳잖아요. 죄가 낳는 문제들은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갈등관계로도 나타나고 삭개오가 토색하고 억눌러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그래서 원수지고 거기에 고난이 있지요. 죄가 그렇게도 나타나고 방탕 아예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술 담배 향락으로 소진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죄가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고난들을 주어요. 그 고난들이 전부 죄로 부터 나온 곳이어요. 죄가 모든 고난들의 원천이지요.
그러나 죄와 고난들이 1:1로 성립하지는 않아요. 가령 지금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중풍병을 앓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어요. 전에도 제가 예를 들었는데 예수도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해서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소경이 된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입니까? 그것이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한다는 아주 원시적인 신학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지요. 우리들도 많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아요.
1:1로 성립될 수도 있어요. 전에도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만 제가 술을 많이 마시고 운전하다가 전신주 가로수를 받아가지고 다리가 부러지면 그것이야말로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20살 먹은 녀석이 술이 취해가지고 내 차를 받아 제 다리가 부러지면 제가 죄를 지어 가지고 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니지요. 이웃의 죄로 다만 우리들이 인간들의 공동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주고 남의 선한 행위가 나에게 유익을 주고 그래요. 그래서 항상 죄라는 것이 1:1로 성립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누구의 죄든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고난이 있지요. 그런데 그 고난이라는 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심리적인 병으로도 나타나고 관계에서의 고난으로도 나타나고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지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치유하는 것인데 그 치유는 그러기 때문에 죄가 나타나는 다양한 고난들을 다 없애는 것이어요. 꼭 육신의 병고만이 아니고–.
그러니까 치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얻는 치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를 온전케함이어요. 모든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함. 그것이 치유여요. 그러니까 이 치유가 어떤 때는 육신의 병고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서 그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빈곤도 엄연한 고난 아닙니까? 빈곤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리적인 질병으로 부터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부간에 늘 싸우던 갈등관계에서 오는 고난으로 부터 해방되기도 하고 정치적인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오늘 같으면 환경의 공해의 제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치유는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면에서의 온존케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어요. 그 치유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요. 구원을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어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되어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성령의 역사로 지금 우리 안에 실현이 되었는데 그것은 꼭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항상 두개의 극단의 오류가 나와요. 하나는 완전히 카리스마틱한 오순절 신학의 오류가 나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난다고 말하지 않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치유로 나타난다.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사고는 그것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그런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라는 것으로만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을 체험하려고 거기에 몰두를 해요. 그래서 다른 방면으로의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나타남을 경시해요. 상대적으로 아니면 무시해 버리든지.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발생해요. 아 믿음이 좋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육신적 병고가 안 나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은 그것을 기법을 개발해요. 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육신적 병고의 제거 그쪽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함으로 어떻게든지 그것을 체험하려고 온갖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점차 신앙이 미신화 되어 가지요. 우선 여기에 과장된 주장이 많이 발생해요. 그래서 신앙이 점점 미신화 되어가요. 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우리 실존의 모든 면에 나타나야 된다는, 모든 영역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자적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리적 갈등의 해소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빈곤의 퇴치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적 평화의 확대 이런 것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이렇게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한 것 모든 아름다운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의 통치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어 우리 삶을 온전케 하는 것은 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다. 구원의 힘이다. 이렇게 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안수하고 기도하고 뭐해서 뭣 나은 것에만 치유의 의미를 부여하니까 이 사람들의 신앙이 많이 균형을 잃고 그것에 몰두하다 보면 과장된 주장을 많이 하게 되고 환상을 많이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신앙이 굉장히 미신화 되어가요. 그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이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아까 말한 대로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함, 모든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 하나님의 통치의 열매여요. 구체적인 열매, 그러기 때문에 첫째로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둘째로 그 치유의 힘이 인간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음, 보통 그렇게 나타나요. 인간들을 통해 나타나는데 꼭 안수니 기도니 이렇게 만이 아니고 의사를 통해서도 훌륭한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약전문가를 통해서도 훌륭한 영양사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나타나요. 어떤 의사가 암 환자를 잘 수술해서 나았다. 하나님의 나음이지요.
지금 수능 시험이 어려워 가지고 낙담한 친구들이 있어요. 혹시 자살한다고 덤벼드는 친구들도 있을 거여요. 또 요즘 금융실명제로 파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요. 일생동안 양심적으로 사업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도가 나서 감옥에 가고 실망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욱 하는 상황속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어요. 죽음 직전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아 여기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잘 설교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용기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하게 했으면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치유가 아니어요? 네? 아이 어떤 권사님이 아주 못된 젊은이 하나 못된 길로 빠지는 젊은이 하나를 계속 몇 년 동안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고 counselling해서 돌이켜 가지고 그 사람이 자기 가족에게 이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게 하면 그것이 치유가 아닙니까? 죽음 가운데 생명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여기 삭개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많이 끼친 삶이어요. 압제하고 뺏고 강탈하고 도둑질하고 그래서 이 삶이 예수에게 치유함을 받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므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그를 통해서 남에게 전달되었어요. 이것이 치유하는 것이어요. 온전케 함.
한국의 목사님들은 대대로 독재자들에게 아부를 했는데 아부하지 말고 그 독재자들 앞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해 가지고 그 독재자들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통치하도록 했으면 이 나라에 사람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애매한 사람 감옥에 집어넣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회정의가 사회 자유가 인권이 평화가 확대되어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이어요. 그것이 죽은자 가운데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까? 이 기도해서 암환자 나은 것보다 더 큰 생명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첫째로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되고 둘째로 이 치유는 꼭 기도하고 안수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복음선포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counselling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음악에서 한 사람이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새롭게 치유가 일어나요.
이렇게 이런 전제에서 둘째 오류는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전통 보수 장로교회에서 많이 범하는 오류인데 바로 치유는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로만 의미한다는 그런 전제하에서 이 사람들 균형을 잃고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그 사람들 신앙이 자꾸 미신화 되고 과장된 주장을 하고 그래서 신앙이 아주 한 마디로 볼품없다 그 말이어요. 걸레 같아요. 균형을 잃고 미신화 됨.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전통보수 개혁신학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이런 의미로의 치유는 예수와 사도시대에만 그랬고 이제는 더 이상 없다고 그러는 것이어요. 그것이 유명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아주 유명한 B. B. Warfield가 처음에 제창한 이론인데 그것이 우리 한국의 보수장로교의 일반적인 이론이 된 것이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성령의 역사로 실현이 되는데 더 이상 육신의 치유나 이런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요. 그것이 틀렸어요. 왜 틀렸느냐면 이 전제가 틀린 것이어요. 치유라는 것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치유라는 것이 아까 말한 대로 심리적 문제의 해소 관계의 해소문제 빈곤 등 모든 고난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도 엄연한 고난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 육신의 병고의 제거가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정신과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서도 음악 시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특히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선포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런 카리스마틱한 사람들의 과장된 주장 헛된 주장에 너무 반발을 해가지고 그런 것은 이제 없다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아요.
B. B. Warfield가 그렇게 이런 것이 없다고 한 이유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 굉장히 발생하면서 이 분이 조사를 해 보니까 자기가 조사한 모든 case가 거짓 말이었어요. 이 분이 이 이론을 제시한 책 이름이 “거짓말 기적” 이라는 책이어요
[출처] 하나님 나라(4)-김세윤 박사|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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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5) – 김세윤박사
[출처] 하나님 나라(5) – 김세윤박사|작성자 Oh My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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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Jesus Christ ・ 2025. 4. 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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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하나님나라2-막2장13-17
오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두 번째로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치유활동의 관계를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치유하심으로 구원의 실제가 되게 했다. 그때 우리는 치유라는 것을 아주 폭 넓게 생각을 해서 모든 면에서 우리 삶을 온전케 함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인데 그것이 먼 훗날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그런 것만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벌써 우리에게 구원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구원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냐면 치유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 치유라는 것이 육신의 병고의 치유로도 나타나고 절망 가운데서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새로운 용기를 얻도록 하는데도 나타나고 늘 갈등 속에 있는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올발라짐으로 해서 이웃과 더 평화가 있고 자유가 있게 하는 면으로도 나타나고 정치적 압박, 경제적 빈곤 이런 것의 제거로도 나타나고 하여간 모든 점에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 말씀을 지난 번에 드렸죠. 그 점을 예수께서 특별히 효과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쳤어요.
그래서 오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의미를 주로 생각해 보려고 그래요. 우리가 4복음서 들을 다 읽어보면 공통되게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치시죠 바로 그런 이유로 아주 초기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사역의 초기부터 유대 신학자들의 시비를 받아요. 큰 적대감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해요. 왜 그러느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이 무엇인가 부터 생각을 하게해요.
안식일은 원래 창2장에 무슨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이 심히 좋은 상태였죠. 그러니까 창조를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창조가 완전케 되었을 때 다시 말하면 심히 좋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할일 하셨으니까 안식하셨다는 거죠.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창조를 즐김이에요. 그게 안식일의 뜻이어요 원래.
그래서 가령 십계명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우리가 한 번 출애굽기 20장 볼까요? 십계명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는 제4계명을 주신 이유가 거기 있죠. 출20장 11절 한 번 보시겠읍니까? 8절부터 읽읍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을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함이니라. 11절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그 마치고 완전한 창조를 즐김의 의미가 있었어요.
또 한 번 보시겠읍니까? 신5:15절 너는 기억하라. 애굽 땅에서 14절부터 읽읍시다.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는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신5장15절에서는 안식일을 지킨 의미가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게 출20장에 보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신5장15절에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도 얼핏 보면 2가지 다른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 설명 같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기원에 대한 아주 참 좋은 설명이어요. 이 2가지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 전에도 제가 여러 번 설명했지만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에서는 항상 구원은 태초의 회복이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서의 구원은 출애굽이어요. 출애굽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요. 가령 이것을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많이 표현했다고.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라든지 광야에서 공급받은 므리바의 물 이런 것이 아담이 타락 전에 낙원에서 누렸던 축복의 회복 재현으로 보았어요. 시내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 그 얼굴에 빛났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이런 식으로 출애굽이 바로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심히 좋은 상태의 창조를 기념하는 것인데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사단의 꾀임에 빠져 가지고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고 죄와 죽음아래 놓이게 되었지요. 그런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구원은 무었이냐 하면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함이어요.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이 되면 안식이 있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출애굽이 첫 구원의 사건으로서 태초의 완전한 상태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출애굽 이후의 안식일은 원래의 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출애굽의 구원 즉 재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그렇게 설명이 되는 것이어요.
하여간 이렇게 출애굽은 그것이 첫 창조에 완성된 완전한 창조에 대한 기념이든 아니든 그것의 회복으로서 구원의 기념하는 것이든 항상 안식일은 무슨 뜻을 가지냐면 하나님의 완성 되고 완전한 창조를 기념함 이것이 안식일의 기본의미여요. 그러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아담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지죠. 사단은 속이는 자여요. 이렇게 아담에게 사단이 속임수를 썼어요.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창3:5절에. 그래서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지요. 그래서 아담이 결단한 거여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됨. 스스로 자기에게 하나님이 됨. 하나님 같이 됨.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그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 없이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아담이 다시 말하면 자기 속에 내재하는 힘, 지혜,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 자기의 안전 자기의 행복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하는 행위여요. 그것이 죄라는 것이어요. 그것이 죄의 본질이어요. 그것을 신학에서는 교만이라고 해요. 왜 교만이라고 해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자기의 피조물성을 무시하고 부인한다는 말이어요. 자기가 기껏해야 피조물인데 하나님으로 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전, 행복 모든 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인데 그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최종적으로 책임질 수 있고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환상에 빠지는 것이죠. 교만한 것이죠.
그것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 해서 뭐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인간이 그렇게 하겠다고 부득불 등을 돌리니까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포기해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지요. 요새 속된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했단 말이어요. 그러면 한 번 잘해보라 —란 말이지요.
예수의 탕자의 비유로 말한다면 무슨 이야기여요. 탕자가 아버지로 부터 내 분깃을 주세요.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고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아버지께 등을 돌리고 멀리 가버린 거지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아담이 진짜 하나님과 같이 됩니까? 하나님같이 되지 않죠? 그때부터 자기가 하나님이니까 자기의 자원으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 되니까 아담은 무엇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어요. 일을 하는 거여요. 농사를 시작해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첫 시작이 무엇이냐면 농사여요. 땅을 파고 씨를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 자기일의 댓가로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이어요. 더 이상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공급받지 않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니까 스스로 자기가 일해서 이제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이죠. 그래서 일하게 된 것이어요. 그런데 일하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확보가 됩니까? 되는 것 같죠. 되는 것 같아요 일해 먹고 살잖아요. 일 안하면 누가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지난시간에도 제가 작년 이맘 때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우리 권사님 한 분이 질문해 가지고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가? 참 좋은 질문을 하셔서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해서 한 번 특강한 일이 있죠. 그래서 예수는 무슨 메시야인가 그때 제가 상세히 설명을 했는데 그 녹음된 것을 글로 옮겨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책자 뒷면에 나왔어요.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 작년에 들었던 강의가 새롭게 이해가 되고 더 자세히 이해가 될 것이어요. 하여간 작년에 무엇을 강조했느냐면 인간이 일을 해서 얻는 열매는 항상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동전과 같은 것. 이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의 이면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껏해야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실제를 얻는다고요. 일한다는 말에서 인간이 일함. 일해서 얻음. 이것이 문화라는 말이어요. 문화란 말이 일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해서 얻은 것 그것이 문화여요. 그래서 인간의 문화 문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 준 것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일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확대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죽음을 그만큼 또 확대해요. 어려운 말로 말하면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실제 그것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를 들자면 자주 드는 예지만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인간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서 이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자는 것이어요. 지혜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가령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관찰 자연과학적인 관찰 이런 것이 과학기술 문명을 이루어 가지고 산업생산수단의 개발로 연결되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났지요. 산업혁명이라는 생산수단의 발달로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소비에서 엄청나게 풍요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삶이 얼마나 확대되었어요. 엊그제 보리고개를 앓았던 한 30년 40년 전까지만해도 보리고개가 심각한 위험이었는데 이 땅에 농업혁명으로 쌀이 남아돌고 배고품이 없어지고 생명이 확대되었지요. 이 공업화로 우리의 옷 입는 것 쓰는 것 누리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와졌어요. 삶이 그만큼 확대되었지요.
아 그런데 삶만 확대되었습니까? 삶만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산업화의 길을 갔어요. 가봤더니 지금 어떻게 된 거여요. 서울에 지금 숨도 못 쉴만큼 공해가 있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공해 자원고갈 이런 형태로 죽음이 그만큼 — 그것만 입니까? 또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의 존재 의미 삶의 의미가 소유에 있고 소비에 있다라는 인생관 가치관으로 우리가 세뇌되어 가지고 우리 인간성이 황폐화되어 버렸지요. 인간미가 없어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다시 말하면 그만큼 죽음이 확대된 것이죠. 그래서 소유가 소비가 팽배한 구미의 소비사회 한 번 가보세요. 거기 인간성의 황폐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땅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항상 인간이 일을 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일을 하면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그만큼 온다. 이 말이어요. 이것은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지요.
지난번에도 예를 들었지만 교통통신수단의 발달로 우리에게 장소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어요. 우리의 자유를 그만큼 확대함으로 우리의 생명을 확대한 거죠. 그러나 바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해서 생명을 확대한 그 교통통신수단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해요. 그 첨단 통신 장비로 정부가 우리를 감시하고 또 범죄인들이 그 수단으로 우리를 도청하고 그래서 안방에서도 자유롭게 말 못하게 만들어요. 얼마나 속박인가? 그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일을 해서 자기의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명 낙관론이지요. 그래서 그런 줄 알고 한참 가다보니까 죽음의 힘이 더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어요.
그러면 문명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무슨 운동이 벌어지느냐 하면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삶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까 문명을 때려 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인 운동이 벌어져요. 낭만주의가 주기적으로 일어나요. 전 세계적으로. 마지막 낭만운동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히피운동으로 일어났지요.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50-60년대 문명 낙관론에 따라 많은 것을 생산해 내서 소비재가 풍부하면 삶이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해 보았는데 그것이 전쟁의 수단으로 월남전쟁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죽음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연공해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원고갈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젊은이들이 이런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거기 구원이 있습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려고 할 때 이것을 뭐라고 그래요. 인본주의. 일을 해도 삶과 죽음에 변증법적인 실제의 쇠사슬에 묶어 있어요. 일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확대되지 않고 그냥 죽음만 있겠죠. 자연으로 돌아가면 다 굶어 죽음만 있겠죠. 그러니까 일을 해야죠. 일을 해도 항상 죽음의 인연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생명 죽음병에 든 생명을 얻는 거여요. 그것이 왜 그래요? 사단의 나라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어요.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에게 충성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여요.
그러니까 사단의 통치아래 아담과 세상이 떨어짐으로 이 사단의 통치아래 죄악과 죽음의 통치아래 떨어짐으로 이 세상 속에 뭐가 있어요. 죽음이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일을 해 보았자 죽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 타락한 질서 속에서 아까 말한 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없이 일을 해야되요. 뭐하기 위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일을 하면 죽음이 없는 생명이 아니고 항상 죽음을 동반한 생명. 이런 상황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안전하고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인 양 생각을 해서 어떻게 해요? 우리 한국말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지요. 그래서 한국의 40대가 가장 많이 죽는다지 않아요. 전 세계적으로. 왜 그래요? 죽어라고 일을 하니 죽지요.
그런데 왜 죽어라고 일을 해요? 그만큼 생명이 확대할 줄 알고 더 나은 안전 더 나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양 환상이 우리 앞에 있는 거여요.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많이 벌면 더 많이 안전하고 더 많은 자유와 쾌락을 누릴 수 있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어요. 그런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놓인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시작하신 거여요. 하나님의 구원사가 시작이 되는 거여요. 이 세상이 다시 말하면 죄악과 죽음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심히 아름답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거여요. 무슨 일을 ? 구원의 역사 구원의 일을 하신 거여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으려다가 깜빡 잊고 안 읽었는데 요한복음 5장 이야기 알죠. 예수께서 안식일 날 베데스다 못가에 누어 있는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그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시비를 하고 왜 안식일 날 일을 하느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해서 일을 하게 하느냐? 이렇게 시비를 하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답을 해요. 1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아요? 안식일에 일하신다 이 말이어요.
유대 랍비들 간에 토론하는 신학적인 주제 하나가 창세기 2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했으니 진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시니 안식하느냐? 이것이 토론의 주제였어요. 그런데 안식일 날도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안식일 날도 아이가 태어나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안식일 날도 일하신다.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거두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안식일 날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일은 다 쉬고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대권 생명을 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 이 일만을 하신다. 이런 식으로 타협하는 그런 대답을 했어요.
그러나 예수는 훨씬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요. 무슨 일을 ? 생명을 주시는 일 구원의 일을 계속하셔요. 왜? 이 세상이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일을 하시느냐? 죄악과 죽음의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그의 나라 그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폄으로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임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창조주께서 하나님 노릇 해주심으로 더 이상 자기 스스로가 자기 하나님이라고 환상하고 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 살도록 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했어요. 그래서 이 고장 난 창조를 고쳐서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을 계속하신다. 이말이어요. 그것이 언제 완성이 되냐면 종말에 완성이 되어요. 이 종말은 그러니까 구원의 시대죠. 이때에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완전히 종결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다시 한 번 온 창조가 심히 좋은 상태가 되는 거여요. 이것을 재창조라고 해요. 그 때 진정으로 안식이 있죠. 그 때는 온 피조물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차죠.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없는 거여요. 거기에 하나님과 그의 피조세계가 전체 안식이 있는 거죠.
그래서 안식일은 종말론 태초적 개념이면서 종말론적인 개념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온 세계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게 될 때 거기에 안식이 있는 거여요. 온 피조세계가 다시 한 번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덧입어서 살게 되는 때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과 그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상태가 될 때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는 거여요. 하나님께서 그 종말에 안식을 위해서 계속 일하라는 거여요. 계속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 사단의 통치를 꺽고 자기의 통치를 세워 가신 거여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세요.
자 그러면 여기 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의미는 무엇이겠어요? 이것이 한 편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에 안식일을 소망하라 그런 말이어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그리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 됨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그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하라 그런 말이어요. 우리가 일하는 행위를 뭐라고 해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행위죠.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죽음의 이면이 있는 생명 밖에 가져다 주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말이어요. 그것은 다른 말로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때 까지는 우리는 사단의 통치아래 타락한 질서속에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엿새 동안은 우리가 일을 해야죠. 이것이 타락한 창조의 질서여요.
그러니까 우리가 엿새 동안 일을 해요. 일을 해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밖에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해야지요. 그러나 일을 한다고 해서 항상 생명만 오느냐? 그렇지 않고 항상 죽음이 같이 옴으로 우리가 안식일을 망각하고 안식일이 없이 살면 바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가 내 스스로 일을 해서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그런 환상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데 하죠? 그 환상에 젖어 있으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일을 해서 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을 하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그러나 아까 이야기한대로 죽는다고요 죽어.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 4계명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 살기 때문에 일을 해서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로 해서 항상 죽음이 없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이죠. 엿새 동안은 그렇게 살더라도 하루는 그렇게 사는 삶의 태도를 쉬고 지양하고 일을 중단하고 생업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으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을 하라는 말이어요. 그전에는 또 무슨 소리냐면 그 엿새 동안만의 하루 그렇게 신앙고백하면 그 다음 엿새 동안을 그 신앙고백아래 살라 그 말이어요. 다음 엿새 동안도 안식일을 지킨자로서 살라 그 말이어요. 아까 내가 이야기했죠. 안식일을 모르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는 삶이어요. 왜? 일을 해서 자기가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것으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 어떻게 하겠어요.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려고 할 것 아니어요. 즉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면 그만큼 생명이 더 확대될 것 같은데 그만큼 확대될 만큼 죽음이 더 확대 되요. 그래서 계속 죽음 속이어요. 더 큰 죽음 아래 빠지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엿새 만에 하루씩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뭐라고 그럽니까? 나의 안존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신앙고백을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 의미여요.
그런 신앙고백을 엿새 동안에 한 번씩 하는 사람들은 그 다음 엿새 동안을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을 하면서도 어떤 태도로 일을 해요.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로 일을 해요. 다시 말하면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를 사랑하심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달렸다. 그런 자세로 엿새를 일을 하면서 사는 거여요.
그런데 일을 하면서 안식일을 모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는 그런 자세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산다고요. 죽어라고 일을 해요. 왜? 그 사람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어요? 소비와 소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더 안전한 것이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행복한 것이라는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어요. 인간성은 더 황폐되고 이웃과의 관계는 더 파괴되고 건강은 더 나빠지고 그래서 스스로 죽고 그 사람은 죽음을 더 퍼뜨려요. 공해의 상태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고 이런 상태로 죽음을 더 퍼뜨려요.
반면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로서 엿새를 산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세로 엿새를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내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일하며 나의 안전과 생명을 얻어야 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나의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내 일의 열매가 아니고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우선 자신의 일 자신의 힘을 절대화하지 않아요. 그것을 상대화해요. 그러기 때문에 우상숭배로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일을 선택할 수 있죠. 이것이 더 생명을 북돋우는 일인가 아니면 죽음을 북돋우는 일인가? 일의 종류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수 있죠. 그냥 산업화만 한다고 해서 생명이 더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다 죽게 되었어요. 도대체 인간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타락한 질서속에서의 안전과 행복을 최대로 확보하는 것일까?
벌써 60년대 70년대부터 여러분들 로마클럽의 이름으로 모인 지혜로운 자들이 뭐라고?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 보다 더 성장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더 갖다 주고 안전과 행복을 더 많이 갖다 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많이 가져 오니까 이제 어떻게 하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아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삶의 스타일을 변화하고 무조건 많이 갖는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안전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뭐하자고요? 좀 단순한 삶을 개발하고 여러분들 나 지금 회의가 많아요. 스스로도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이 엄청난 독가스를 마시면서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여러분들 회의 안 납니까? 차라리 저기 어디 시골에 사는 것이 서울에 살아서 돈 많이 버는 직장 애들 교육하기 좋고 뭐 어쩐다고 해서 다 서울에 살지요. 서울에 살면 삶이 확대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우리 독가스 마셔서 내일 모래 죽는다면 무슨 확대여요. 차라리 시골에 살아서 맑은 정신으로 연구를 하면 내가 학교 대학이라는 직장 안 갖는다고 해도 그래서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는 적어지더라도 나도 건강하고 인간성이 더 풍부해지고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도 생명 확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엿새 동안 살면서도 일의 종류에 대해서도 선택할 여유가 있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비판적으로 생각할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해서 이 타락의 질서 속에서도 그래도 죽음 보다는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삶의 방식인가? 일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역하는 자가 되요.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려는 그런 운동에 동참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킴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서 그냥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가 일을 해서 내 힘으로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런 삶을 사는데 그런 삶은 결국 생명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죽음에 의해서 압도되는 거여요. 그것이 올바른 삶의 방법이 아니라는 거여요. 그래서 적어도 하루는 그런 삶의 방식을 지양하고 그러니까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라고 그랬어요? 첫째로 생업을 쉬라고 그랬어요. 자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 행위를 멈추고 나의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하는 것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로 부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하나님의 역사의 주되심 하나님의 구원자 되심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그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거여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요새 우리가 쓰는 재충전이라는 말로도 괜찮겠죠. 일생을 그러니까 일하는 다음 엿새 동안도 그런 신앙고백으로 살라는 말이어요. 안식일을 지키는 자 곧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 달렸다는 그 신앙고백으로 그 자세로 살라는 말이어요. 그 자세로 살면 어쩐다고요? 거꾸로 그 자세가 없으면 어쩐다고요? 한마디로 죽어라고 일해서 죽음. 그런 자세로 살면 이 타락의 질서속에서도 우리가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죽음 보다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일을 하면서 그런 자세로 일을 하면서 살게 되는거여요.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여요.
그러니까 구약에 뭐라고 그랬어요? 안식일을 안 지키면 어쩐다고요? 죽지요 죽어. 그래서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 거여요.
자 그런데 예수는 뭐하러 오신 거여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 분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에 우리 구원이 완성이 되어요. 그래서 심히 좋은 상태가 되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안식을 갖게 되는 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이 무슨 대목입니까? 예수는 자기와 함께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기 의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 벌써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거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뭐라고 그랬죠?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동댕이쳐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롬1:18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아담이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내버린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내버리지 않았어요. 기쁜 소식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전체 내버렸으면 거기에는 더 이상 구원과 생명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바울의 복음이 뭣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 주셨다. 그것이 기쁜소식 아닙니까. 그것이 바울의 신학언어로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바울은 롬1:16절에 뭐라고 그럽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 그 복음은 뭐라는거여요? 무엇이 복음이라는 거여요.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기본적으로 관계론적인 개념이어요. 관계의 신실함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신실하게 지키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세상을 창조하실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한 거여요.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들을 지어 가지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정할 때에 이 피조물들에게 약속한 거여요. 무슨 약속을?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슨 의무를 증거해요? 그 창조주에 의지하고 순종해 살도록 그런데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 의지하지 않겠다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는데 하나님께서 나도 몰라 해버리면 하나님도 불의한 거여요.
의란 말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 관계에 신실함.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창조 중에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함으로 인간은 불의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말이어요.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는 거여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뭐라고 선언하는 거여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다 그것을 신학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기쁜소식이 창조주 그러기 때문에 초월자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바울의 언어로 롬 1:18절의 언어로 나 몰라라고 내동댕이 쳐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이 창조 때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셨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복음이라는 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 피조물 전체에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기쁜 소식이어요.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 거지요. 이제 우리에게 창조주 초월자의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 바로 그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시행하는 거여요. 그것을 예수께서 선포하고 복음이라고 하나님이 통치하심 그래서 우리를 사단의 통치에서 건져내심.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 우리를 내동댕이 친게 아니고 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꾀에 인간의 뜻에 내버려두면 죽음 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운데 오셔서 그의 구원의 통치를 폄으로 우리에게 끝까지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이 복음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이 통치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심으로 시위했는데 실제가 되게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어요? 안식일의 범주로 말하면 태초의 안식일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병든 세상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자 이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의 형태로 시위하시되 특히 안식일에 하셨는가를 우리가 알게 되었어요.
자 이제 여기 지금 안식일 날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뭐 하러 모였어요.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더불어 있을 그 안식을 고대하는 의미로 그것을 간절히 바래서 기도하는 의미로 여기 모였어요. 그런데 지금 손마른 자가 앉아 있어요. 또는 중풍병자가 앉아 있어요. 이것은 지금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의 극적인 표현이어요? 안식일이 더 이상 없음 다시 말하면 빨리 하나님의 통치가 사단의 통치를 꺽고 완성이 되어 종말에 안식이 있어야 될 것임을 절규하는 거여요. 그 상황에서 예수가 그 사람을 고쳐준다고 그랬어요.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어요.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는 자로서 곧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분으로서 바로 이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병든 세상을 고쳐서 죽음아래 놓여있는 피조세계에서 죽음을 몰아냄으로서 이 죽음의 힘이 손마름으로 나타났는데 38년 중풍병으로 나타났는데 또는 삭개오 같이 도덕적인 병듦으로 나타났는데 이 죽음의 힘을 몰아냄으로서 종말에 안식을 가져오는 자임을 거기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dramatic하게 표현하는 거여요.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자기가 안식을 가져오는 분 진정한 안식일이 안식이 되게 하는 분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사단의 통치로부터 건져내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데려옴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을 있게 하는 분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주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친 거여요. 예수의 많은 가르침과 그 행위들은 상당히 드라마 극에 대한 센스를 가지고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어요. 그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극을 상징행위를 많이 하시고 요새말로 하면 데모를 많이 하셨어요. 안식일 날 병고친 것도 하나의 데모여요. 오늘 우리가 하는 최후의 만찬도 하나의 극이어요. 효과적인 메세지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연극.
자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주로 병자를 고쳤다. 이 초대교회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그 제자들은 한 동안 유대인들의 안식일 오늘 우리의 월력으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 해짐으로 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어요. 유대 관례로 말하면. 그 안식일과 그 다음날을 주일이라 해서 예수의 부활의 안식일 다음이었으므로 부활한 예수를 만남을 기념하는 안식일 다음날 양일간 예배 모임을 했던 것 같아요. 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는 나중에 안식일의 의미가 안식일 다음날 주일로 합류되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을 지키는데 그것은 신약적으로 참 잘한 일이어요.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종말의 구원의 성취에요. 그래서 아까 출애굽후 안식일은 무슨 의미를 갖는다고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의미를. 출애굽의 구원은 무슨 의미로 해석이 된다고요? 첫 창조의 회복으로 해석이 된다고 그러지요. 신약성경에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설명을 하고 이것을 뭘로도 설명을 해요? 첫 창조로도 설명을 하지요. 그래서 가령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누구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하는 고전 5:17절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에게는 새창조가 일어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새 창조라고 그래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새 창조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역사이해에서 그래요.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역사의 원칙에 따라 그래서 출애굽의 구원을 첫 창조의 회복으로 보고 곧 안식일이 바로 태초의 안식일의 회복으로 의미를 가졌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주의 날.
부활하신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 ‘주’란 말이어요. 주라는 칭호는 가장 기본적으로 무슨 뜻이냐면 부활하시어 하나님께 높임 받은 분으로서 예수를 주라고 지칭해요. 주라는 말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다 상호교환 용어로 쓰는 칭호들이 아니고 다 의미가 좀 달라요. 쓰임세가 달라요. 그런데 주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았다는 말 그래서 세상을 통치하는 분으로서의 예수를 주라 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주의 날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태초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뭐라고요? 창조라는 category를 쓴다고요. 곳곳에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쪽에서 완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이미 일어남 미리 주어짐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 그리고 그 때에 있을 안식이 미리 주어짐 그래서 요새 한국 신학자들이 지어낸 새 줄기 새 신학언어가 ‘선취함’ 이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나온 말 이어요. 한국말 번역으로 미리 취함 선취함 저도 한동안 한국에 와 가지고 신학을 안 해서 신학 용어들이 참 생소해 가지고 선취란 말을 쓰기 어려웠어요. 잘 안 써 지더라고요.
선취 그래서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종말의 구원의 성취로서 그러기 때문에 종말에 주어질 안식의 성취로서 이해가 되는 거여요. 그래서 주일에 부활을 기념하는 것과 원래 안식일을 합류해서 우리가 주일날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자 그러면 지난 번에 우리가 안식일에 대해서 토론했지요. 지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왜 병자를 많이 치유하셨는가 순전히 역사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만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그러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안식일의 원칙을 올바르게 지키는가? 그런 질문들이 다 있을 거여요. 지난 번에 다들 질문하고 토론해서 아주 간단히 한 마디만을 하고 지나면 어떻게 지켜야 되겠어요?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있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종말에 이 구원이 성취되어서 우리에게 안식일의 축복이 그만큼 더 확대되어 체험되게 되었다는 것. 예수의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심.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함이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치유로 나타남. 치유가 뭐라고요? 우리를 온전케 함.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온전케 함으로 나타남. 그것을 우리가 기념하고 그것이 빨리 완성되기를 고대하는 모임이 오늘 우리의 모임이어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가 그 주권이 빨리 완성되도록 그래서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빨리 종결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완성되도록 예수께서 모든 원수들을 다 극복한 후에 어쩐다고요? 바울이 고전 15:25-28절에 그때에 그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린다고 그때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것 위에 궁극적인 의미로 존재하게 됨. 그때에 완전한 구원 완전한 치유. 인류와 세상의 온전케 됨. 안식이 있죠. 그것을 빨리 오시기로 기도하는 모임이 첫째 우리 모임이지요.
그래서 초대교회에 그런 기도가 뭐였다고요? 마라나타 주여 오소서! 그 다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으니 구원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의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도 하고 그런 말로 표현하는 말에 대한 체험. 그것에 대한 확신을 다시 받고 확신을 어떻게 받아요? 설교로 받고 성경공부로 받고 지금까지 성경공부를 뭐하러 합니까? 바로 그것에 대한 새로운 확신 그 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 확신에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거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그의 전능함으로 그의 전지함으로 그의 온전하신 사랑으로 끝까지 하나님 노릇 해 주실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그 분께 의지하고 순종해 살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해야겠죠.
우리가 하루의 생업을 쉬고 다음 6일을 생업에 종사하면 살되 그 신앙고백의 자세로 산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내게 달렸다. 내 손에 달렸다. 내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 내가 죽어라고 일을 해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내게 안전이고 행복이다. 이런 자세가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 그에 뜻에 따라 그 일을 해야 할까? 저 일을 해야 할까? 악을 도모하고 죽음을 도모하는 일 보다는 그래도 생명을 도모하는 일을 해야 되고 일을 하되 어떤 자세로? 죽어라고 일을 해서 죽은 자세가 아니고 과연 정말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생명을 북돋우는 길인가? 를 비판적으로 생각을 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신앙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비판하게 만들어요. 그런 자세로 살아야죠. 그것이 안식일을 지킴이죠. 안식일을 지킴이 무슨 말이라고요? 아무 것도 안한다. 그런 말이 아니어요.
지난 번에 그것에 대해 충분히 토론했으니까 아무 것도 안한다고 생각하면 유대인식으로 무엇에 빠져요?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 가지고 위선에 빠져 가지고 신학적인 의미는 모르고 우리 삶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보다는 도리어 얽어매는 일만 한다고요.
[출처] 하나님 나라(5) – 김세윤박사|작성자 Oh My Jesus Chr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