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
1. 몸에(apar로 vessel을 만들어) 생기[hay neshamah(of life, breath)]를 불어 넣었던이 nephesh(혼)이 되었다.
2. 사람(Adam:흙에서온)이 죽을 때 사람의 육(apar로 만들어진 vessel)은 무어져(부서져) 흙으로 돌아가고 사람의 영(ruwch)과 생명/생기/숨/목숨(neshamah)는 하나님께로 간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6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제자들에게) 영(pnumah)이요 생명(joeh)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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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목사님)
김성수목사 요한복음강해 (029) –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6:60~71)
(요한복음 6:60-71)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자, 이제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에 당도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아주 긴 시간, 이 요한복음 6장을 공부했지만, 주제는 아주 간단해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생명의 떡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떡을 좇아서 예수님께 나온 그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죠. 그만큼 세상은, 생명의 떡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이겠죠.
오늘 본문 60절을 보시면, 군중들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제자들조차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수군거렸어요. 그죠? 어렵도다!
여기서 ‘어렵도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스클레로스’라는 이 단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용납하기 어렵다, 관용하기 어렵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이미 공부해 봐서 알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절대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게 아니죠?
예수님은 알기 쉬운 말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에 의해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 참 생명은, 본인들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 곳에 모인 군중들과, 유대인들과 제자들까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져야 한다는 그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그죠? 제자들과 유대인들과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고, 그분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도, 기적들을 일으켜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주님을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이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당신의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니까, 제자들을 비롯한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그 사실이 마뜩치가 않았어요. 그래서 ‘어렵도다!’라고 이게 수군거린 거예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죠. 자기네는!
주님은 즉시 그들에게, ‘내 말이 너희들에게 걸림돌이 되느냐?’라고, 그들의 속내를 폭로하시죠? 들춰내세요.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주님의 말씀이 제동장치의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의 행진을 위해서,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도와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진로에, 태클을 걸고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림돌이 된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바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뜻하는 바를, 어떻게 하든지 관철시켜서, 이 땅에서의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것으로 목적을 삼으면 안 돼요. 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비록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되는 거죠.
주님은 이어서, 그렇게 이 땅에서의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지적을 해주시는데요. 그게 본문 32절이에요. 볼까요?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신학을 담고 있는 구절이에요. 먼저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주님의 선재설(先在設)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선재설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먼저 존재했던 분이라는 그런 의미예요. 주님의 그 말씀은, 주님이 갑자기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신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이전에 있던 곳! 본문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이전에 있던 곳! 즉 하늘에 존재하시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구절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게 되실 것임을 미리 암시하는 거죠. 그죠? 그래서 거기서 승천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은, 주님의 부활, 승천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음을, 미리 고지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할 것이라는 뜻인 거예요.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많은 이들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나오죠? 한 번에 500여 형제들에게도 나타나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은, 120명에 불과했어요.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까지 나누었던 제자들까지도, 그 후에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어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만,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비밀스러운 하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스테리온,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러한 믿음의 제한성에 대해서 잘 표현한 구절들이 있어요. 한번 볼까요? 고린도전서 1장 22절.
(고린도전서 1:22-24)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오직’이라는 말에 동그라미를 치세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작용하게 되는 거예요.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뭘 공격해요? 십자가를 공격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주님이 계속해서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육에 속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살려낼 수 없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이 부르신 그분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부어짐으로만 생명은,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참 생명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들이 좇는 육에 속한, 이 생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사도 바울은 그 살려주는 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죠?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보세요.
(고린도전서 15:45-46)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무슨 영?)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보시는 바와 같이 살려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세요. 그런데 그렇게 참 생명을 주시는 하늘의 떡이자, 살려주는 영!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영적인 눈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영에 속한 말을 하고 있으니, 육에 속한 너희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63절 후반부를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죠?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영은 살려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이 살려주는 거라는 것은, 이 말을 믿기만 하면, 산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못 믿는 거예요. 그 자리에 찾아온 이들이, 그걸 못 믿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안 불렀으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여러분! 유대인들은 율법만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거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죠? 유대인들은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믿었어요. 맞아요, 여러분!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완전히 다 지켜야 줄 수 있어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잘 나오죠? 3장 12절에 보면!
그리고 다 지켜내다가 중간에 가다가, 하나만 어겨도, 전부 어긴 게 돼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요.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게다가 율법은, 마음의 법까지도, 마음의 범죄까지도, 정죄를 해요. 그러니 뭐 지켜낼 재간이 없는 거예요. 따라서 율법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노바디(Nobody)!’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 표면적인 행위에 의해서, 율법의 계명을 잘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세분화해서, 지켜냈어요. 나중에는 2,134가지로 확대를 했죠. 그걸 다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2,134가지가 뭔지 기억도 다 못할 거예요. 인간은 절대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제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구약의 율법은, 무익한 거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은 창조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건 이런 거예요. 창세기 2장 17절 보세요.
(창세기 2:17)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게 구약이에요. ‘내 말 안 들으면, 너희는 죽어! 이거 먹으면 죽는다!’예요. 이게 구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어야 하는 자들에게 먹힘으로, 그들의 독을 해독하는 해독제로 오신 거예요. 해독제를 먹다 보니까, 단어도! 흐흐흐 해독제로 오신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0절 보세요.
(요한복음 6:50)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구약하고, 신약하고 이렇게 완전히 반대예요. 그죠? 구약에는 먹으면 죽는 건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먹어야 사는 거예요. 창세기 3장 24절 보세요.
(창세기 3:24)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들을 쫓아내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먹은 자들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약의 떡을 먹은 자들은, 하나님이 결코 쫓아내지 않으신다. 그래요. 요한복음 6장 37절.
(요한복음 6:37)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완전히 반대죠. 그죠? 이렇게 창세기는 요한복음 안에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제가 창세기하고 요한복음을 같이 가는 이유를 아시겠죠? 제가 1장부터 같이, 이렇게 비교해서 지금 설명해드리고 있잖아요? 다른 말로, 구약의 저주는, 예수 안에서 생명의 복음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거예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생명의 복음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생명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만, 배태되고, 출산되는 거예요. 즉 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새 창조의 존재양식인데, 죄인이 그 새 창조의 존재양식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리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새 생명으로 탄생될 수 있다는, 살아날 수 있다는, 그 진리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욕을 먹는 거예요. 배타적이 아닌 건, 기독교가 아닌 거예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다른 길도 구원에 이르는 길은 없다고,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밖에 없어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따라서 육! 즉 옛 시대의 존재양식! 구약에 의거해서 생명을 취하려 하는 자들은,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 무익하다. 그러죠? 오늘 본문은!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이 63절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려는 바인 거예요. 주님의 그 말씀에 대한 증거는, 곧 현실에서 나타나죠. 66절 보세요.
(요한복음 6:66)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Never! 다시 안 찾아왔대요. 주님의 그 말을 듣고, 주님을 좇던 제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나갔다 그래요. 그 말은, 주님을 좇던 제자 중에서도 여전히, 옛 시대의 존재양식! 구약에 의거하여, 구약의 영광!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영광! 세상의 영광을 좇아왔던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 곁에 남아 있었던 열두 제자들까지도, 구약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주님을 좇았었다는 사실이, 성경 여기저기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한 군 데만 볼까요? 마가복음 10장 32절.
(마가복음 10:32-38, 41)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 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니, 그 이야기를 중간에서 딱 끊고, 제자들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 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41절.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수난에 대해서, ‘채찍질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죽게 될 거야!’라고 이야기하는데, 제자들은, 그 이야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를 우의정, 좌의정 시켜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웃긴 건, 다른 제자들이 듣고, 통분히 여겼다는 거예요. 분하게 여겼다는 것이죠. ‘아니 저놈들이, 우리가 원하는 걸, 자기들이 먼저 가서 이야기하고 있네!’ 그래서 분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이야기는 AD 30년경의 이야기이거든요.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 가버나움의 회당의 이야기는, AD 29년경의 이야기예요. 따라서 이 제자들 또한, 가버나움 회당에서, 다른 제자들이 떠났을 때, 떠났어야 이야기가 맞잖아요? 여전히 세상의 힘을 좇는 자들은, 그 때 다 떠났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안 떠나고,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계속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들이 주님 곁에 남아 있었을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거기에 대한 대답이 67절 이하죠?
(요한복음 6:67-69)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많은 이들이 주님 곁을 떠나자, 주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으셨어요.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하고 아주 기특한 대답을 했죠.
그 말은,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데, ‘계시매’라고 번역이 된 ’에코‘라는 단어는, ‘소유하다’라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누구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이에요. 직역을 하면!
마치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죄인들에게 하늘의 참 생명인 영생이 주어지게 되는, 하늘 복음의 비밀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기특한 대답을 한 베드로가, 왜 주님께, 우의정, 좌의정 시켜달라고 졸랐던,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을까요?
왜 이런 베드로가, 이런 대답을 한 베드로가, 주님이 붙잡혀 가셨을 때, 그러한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세 번씩이나, 심지어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했을까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인했을 거란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니 왜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도,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떠났을까요? 그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사도 베드로가, 다른 곳에서 동일하게 오늘 본문과 같은 기특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죠? 그곳에 가서, 이 문제를 한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
(마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므로, 주님께 칭찬을 받죠? 그러나 이렇게 주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바로 이어서, 주님의 그 죽으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여, 주님을 야단치죠. 그죠? ‘꾸짖다’라는 뜻이 그랬잖아요? 주님을 야단을 쳐요. ‘죽으면 안 돼요.’ 그런다 말이에요.
우리는 그러한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서, 참 많이 혼란스러워요. 그죠? 멋진 신앙고백 후에 곧바로 주님을 꾸짖은 그런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참 믿음에 의해서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또 칭찬을 하신다 말이에요. 그 칭찬의 근거가 뭔지를 보세요. 그게 17절인데,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 아버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몬 베드로는 여전히 불가능한 존재인데, 순간순간 베드로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그러한 기특한 고백들은, 무엇에 대한 증거이겠어요? 불가능한 베드로를 이끌고 가시는, 요한복음 6장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현현(顯顯)인 거예요. 베드로가 잘 나서, 베드로가 특별히 훌륭한 제자라서, 그런 고백을 한 게 아니라, 이를 고백하게 한 이는, 혈육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네 의지와 선택도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표적을 보고 쫓아온 무리들과, 가버나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당신의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내 아버지가 이끌어 내게 주신 자 외에는, 나에게 올 수 없다는 선택과 예정과 제한적 속죄에 대해서 계속 반복해서, 지금 설명하시는 중이에요. 그 말미에 지금 베드로의 고백이 나온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베드로 자신의 고백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전체적인 문맥에서 어긋나 버리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 고백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의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베드로와 동일한 고백을 했던, 다윗의 고백을 시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39편 7절.
(시편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자, 베드로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죠?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런단 말이에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이 지금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갑니까? 나는 못 갑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주의 신을 피할 수 없는, 떠날 수 없는 이유가, 8절부터 10절까지죠? 그죠? 이유가 뭐예요. 그가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시기 때문에, 못 떠난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을 안 떠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끝까지 쫓아가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따라서 오늘 본문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구절은,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소유하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신데, 우리가 그 고집 앞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 있습니까?’라고 그렇게 의역을 해서 읽는 것이 이해가 쉬운 거예요. 더! 문맥에도 맞고요.
지금 베드로를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주님인 거예요. 그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놓으셨으면,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떠나게 되어 있어요. 영생의 말씀이 계신…, 무슨 개뿔이나 뭐가 있어요? 오늘의 양식도 안 읽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는 거예요. 쫓아다니면서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고집이라니깐요. 아들까지 죽여 버린 고집!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아들까지 죽여 버린 고집! 그 고집으로 우리를 쫓아오시는 거예요.
여전히 베드로는,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있는 자예요. 그 이후로도 계속 베드로는 그런 모습밖에 안 보여줘요. 그런데 모두 다 돌아가고 있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드시고, 그의 입에서, 기특한 신앙고백이 나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실수할 때마다, 주님이 그를 붙들고 놓지 않으시므로, 그가 위대한 사도로, 생을 마치게 된 거예요.
베드로가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셨죠? 그 때, 제자들의 신앙상태를, 요한이 잘 그리고 있어요. 요한복음 21장 11절로 가보세요.
(요한복음 21:11)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데, 밤새 소득이 없었어요. 그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져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어요. 그때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보고, 옷을 걸쳐 입고, 물로 뛰어 들었다 그래요. 그죠? 참 성질 급한 건 어딜 가나 티가 나요. 그죠? 물로 뛰어들려면, 입던 것도 벗고 뛰어들어야 하는데, 벗었던 걸 입고, 뛰어 들었어요.
그들이 지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또 다시 그분의 기적을 체험한 거예요. 그들은 베테랑 어부들이에요. 그런데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이 주님을 알아봤어요. 베드로가 뛰어들었다니까요. ‘주님이다!’ 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주님을 좇아, 그 주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이 세상 것들을, 자신이 추구하던 이 세상의 힘이라든지, 그런 세상 것들을 버리고 좇아야 했는데, 그들이 뭘 했어요? 물고기를 셌단 말입니다. 거기서!
지금 주님이 오셔서, 자기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물고기가 백 쉰세(153) 마리라는 것을 그들이 셌다고요. 그들의 관심은 여전히 이 물고기예요. 내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이 물고기! 보세요. 그걸 세고 있는 그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주님의 그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그렇게 주님이 여전히 불가능한 그들을, 주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야곱하고, 에서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자기 장자권을 판 다음에, 크게 회개했어요. 그런데 야곱도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쫓겨 가는 길에, 후회를 했어요. 그런데 똑같이 회개하고 후회했는데, 왜 누구는 버림을 받고! 우리가 보기엔 더 야비한 인간! 그 인간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죠?
에서가 더 나아요? 야곱이 더 나아요? 에서가 더 남자다워요. 야곱은 끝까지 비겁해요. 그런데 누가 잘 나고, 못 나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굴 찾아오는 거예요? 야곱이 후회하고 회개할 때는, 벧엘에서 하나님이 찾아와요. 그런데 에서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 앞에서 애걸복걸하는데, 하나님이 안 찾아오는 거예요.
여러분,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후회했어요. 받은 돈까지 확 집어던지고, ‘내가 무죄한 자를 팔았다. 저이는 무죄하다!’라고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간 그 살벌한 현장에 다시 돌아가서, 용기 있게 외쳤다니깐요. ‘저이는 무죄다!’ 그랬다고요. 베드로는요? 자기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잖아요? 그리고 나가서 후회 했어요. 언 듯 보면, 유다의 회개가, 더 멋진 회개예요. 그렇죠?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만 찾아가신다니깐요.
갈릴리에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한번 보세요. 요한복음 21장 18절.
(요한복음 21:18)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는, 스스로 띠 띠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띠 띠우고 원치 않은 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겠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의지가 강해서, 베드로가 뭔가 깨달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찾아와서, 그의 백성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끌고 가시는 거예요. 띠 띠우고 끌고 가시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꼼짝 못하고 이렇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행복하지 않으세요? 그게?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배제한 삶은, 단 한 순간도 불가능한 거예요.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을 인용해서,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는 데, 이 구절을 자주 사용하죠? 그건 정말 은혜가 뭔지 모르는, 우매한 이들의 허풍인 거예요. 우리 안에서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없다니깐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끌고 가셔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고백이 터져 나오게 만드실 수는 있어요. 설사 내 안에서 진심으로 그런 고백이 나왔다 할지라도, 그건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자랑하는 데 절대 쓸 수 없는 구절인 것입니다. 이거는요! ‘내가 어디를 가도 주님이 좇아오는데, 내가 어디로 도망가겠어요?’ 이런 고백인데, 그걸 갖고, ‘내가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니까, 내 의지를 발휘하여 나는 떠나지 않았습니다.’라는, 자랑을 하는 구절로 이 구절을 어떻게 쓸 수 있냐 말이에요?
그러나 여러분이 주의하셔야 할 것은, 자신의 유익과 자랑만을 위해서 사는 파렴치한 인간들도, 얼마든지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척, 연극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잡아주시지 않는 한, 그는 끝까지 주님 곁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나갈 때에, 가룟 유다가 끝까지 남습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는 그때 떠났어야 했어요. 끝까지 남아요. 누가 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돈독한 사람처럼 보여요. 더구나 그는, 그 공동체의 돈궤를 맡아서, 수고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영생의 말씀으로, 베드로를 잡아주신 그 순간에, 유다는 유기되었다는 것을 공표해버리세요. 요한복음 6장 70절 보세요.
(요한복음 6:70-71)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자, 분명히 열둘을 택했다, 그래요. 가룟 유다도 하나님이 택한 거예요. 예수님이 택한 거예요. 모르고 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가룟 유다는 마귀인줄 알고 택하신 거예요. 그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주님은 유다를 가리켜 지금, 마귀라고 그러세요. 열한 명은 당신의 사도로 택하시고, 한 명은 마귀의 역할을 하도록, 주님 자신이 택하여, 당신 곁에 두셨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주님은, 왜 유다가 마귀인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제자로 택하셨을까요? 제자로 부르셨잖아요?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 제가 읽어본 책 중에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과, 잔 맥아더 목사님, 그리고 잔 스타트, 잔 파이퍼가 비슷한 견해를 보이셨는데, 최근에 아더 핑크의 요한복음을 제가 구해서 읽었는데, 전부 거기 있는 거 베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아더 핑크의 그 주장을 여러분에게 그냥 옮겨 드릴게요.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택해서, 3년 반 동안 당신 곁에 제자로 두신 이유 중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의 완전성을 드러내기 위함인 거예요.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38절과 39절에 보면,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자기의 오심의 이유에 대해서, 천명을 해요. 요한복음 6장 38절 보세요.
(요한복음 6:38-39)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 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히브리서에도 똑같이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는 기록이 있어요. 히브리서 10장 7절.
(히브리서 10:7)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그죠?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요?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죠? 두루마리 책은 뭐예요? 구약! 그죠? 구약! 누가복음 24장 44절.
(누가복음 24:44)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모세오경) 선지자의 글과 (선지서)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런데 구약에 주님을 가리켜 기록된 글 중에,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는데, 그 뜻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구약에 기록된 그 뜻을,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신약에서 이루어내야 돼요. 그런데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일 중에, 주님이 측근! 친한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해야 된다는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고걸, 자기가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의 가장 측근 제자! 열두 명 중에, 마귀를 하나 두는 거예요. 배반자를 하나 두시는 거예요.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시편 41편 9절 보세요.
(시편 41:9)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그죠? 주님은, 구약에 자기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내용이,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3년 반 동안, 어디를 가나 같이 있어야 하는 그 제자들 사이에, 마귀를 두신 거예요.
아버지에게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주님이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애쓰셨는지, 시편 22편으로 가서 한 절만 더 보고 가자고요. 22편 1절.
(시편 22:1)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 말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이걸 그대로 인용해서 하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신약의 가상 칠언 중에 그 말만, 아람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주님이 지금 구약의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이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서, 유다까지도 당신의 곁에 두신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12절 보세요.
(요한복음 17:12)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정확하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완전성에 대한, 편견 없는 증거를 제공하시기 위해, 마귀의 편인 유다를 당신 곁에 두신 거예요.
주님의 다른 사도들과, 구원받은 많은 이들이, 주님의 도덕의 완전성을 증거를 했죠? 그렇죠?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주님 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가 편벽되고, 편향된 증거로 폄하될 수 있어요. 그죠? 어차피 같은 편이니까! 아닌데도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는 거 아녜요? 그러나 적은? 절대 좋은 말 해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적인 마귀가, 예수님 옆에서 3년 반 동안 있으면서, 결국 뭐라 그래요? ‘이는 무죄한 자다!’라고, 그분의 도덕적 완전성을 증거하고 가버렸단 말이에요.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유다를 자신의 곁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유다를 선택하셔서 곁에 두신 이유는, 죄의 흉악함을 드러내고, 그러한 죄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엄숙한 경고를 발하시기 위함이었어요. 유다는, 구세주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허락되었던 사람이에요. 엄청난 특권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들 중에서는!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던 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를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팔아먹을 수 있는 그런 흉악한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죄인은 그만큼 흉악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구세주와,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했고, 그의 기적을 보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이 돌이켜버리지 않으면, 그가 하나님께 못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교회에 알려주기 위해, 유다가 예수님 옆에 붙어 있었던 거예요.
네 번째로, 유다의 선택은 교회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 있음을, 암시해주는 거예요. 유다는 신자로 자처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는 재산과 가족마저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어요. 그렇죠? 그는 전도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가 보면, 주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 거기에 가룟 유다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가서 뭘 했다 그래요? 기적 일으키고, 귀신도 쫓아냈다고 그래요. 주님은 마귀인 유다에게도 그 권세를 줬다니깐요. 여러분, 기적 일으키는 사람들 신기해하지 마세요. 마귀들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거는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그러니까 마귀들도 할 수 있는 그런 거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만 할 수 있는 그걸 보셔야 되는 거예요. 영생의 삶!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보시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판별하셔야지, 그 사람이 일으키는 기적!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종교행위! 이런 것들을 보고 좇아가시면, 큰일 나는 거예요. 잘못하면 마귀를 좇아갈 수 있다니깐요. 마귀인 유다가 그거 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서 염소들이, 그러잖아요?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큰 권능 행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까지 했는데, 왜 나를 모르신다고 하시나요?’ 주님이 그들도 그거 할 수 있게 해주신다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 거 쫓아다니지 마세요. 여러분, 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요만큼도 반기를 들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유다가 언제 뭐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그리고 최후의 만찬! 유월절 만찬에까지 참여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 발 닦아 주는데, 발까지 턱 내놓았어요. 그 앞에다가! 누가 봐도 신실한 신앙인이죠. 제자들이 끝까지 몰랐다니깐요. 그 사람이 가짜인지, 끝까지 몰랐어요. 그래, 여러분 저를 함부로 믿지 마세요. 허허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거예요. 얼마든지 여러분의 눈에 맞게, 혹하게, 행동할 수 있어요. 죄인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죠.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기 전에 우리 인간들의 판단력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돼요. 영적인 것과 전혀 상관없는 죄인들은,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것들만을, 판단의 근거로 사용해요. 그래서 아직까지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던 제자들이, 마귀인 유다를 식별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판단력을 발휘해서, 사람과, 사건과, 상황 등을 해석하고 있나요? 잘 안 되죠?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서에서 다시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고, 여러분, 다짐을 해요. 고린도후서 5장 16절 보세요.
(고린도후서 5:16)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표준새번역으로 볼게요.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죄인들을 가리켜, 소경이라는 표현을 쓰실까요? 죄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경중과, 무거움과 가벼움! 귀천!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가르는 우를 범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본문이었던 40절과 41절을 다시 한 번 볼게요.
(요한복음 6:41-42)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 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하나님이 그 앞에 계신데, 지금 육신의 눈으로 예수를 보니까, 이게 도대체 메시아 같지가 않은 거예요. 초라한 목수의 아들인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데, ‘무슨 이게 메시아야?’ 그리고 수군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예전에 어릴 적에,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제가 태어나지 못한 것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그 때 태어나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했더라면, 제 이 믿음의 유약성, 이 연약성 때문에, 이렇게 가슴 아파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굉장히 안타까워했는데…, 저라는 인간의 이 판단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 지금은, 그때 안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보나마나 그때 태어났으면, ‘저게 무슨 메시아냐?’ 그러고, 아마 앞장서서 발 걸었을지도 몰라요. 저는 못 알아 봤을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는 알아볼 수 있을 거 같아요. 내가 그때 태어났으면, 예수님을 못 박으려고 하는 그들을 막아서서, ‘이분은 메시아라고, 절대 너희들이 죽이면 안 된다.’라고 그럴 수 있을 거 같죠? 그게 베드로라니깐요. 마귀! 베드로가 그랬잖아요? 죽으면 절대 안 돼요. 그랬더니,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를 너무 평가절상해요.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세계관과 가치관과 행동양식에 의해, 판단을 해요. 이게 귀한 거다, 천한 거다, 이게 무거운 거다, 가벼운 거다. 이런 거를, 꼭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벤츠 타고 오면 월척이고, 티코 타고 오면 피라미예요. 쳐다보지도 않아! 밥을 먹든지 말든지! 여전히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있잖아요? 그게 육의 눈으로 보는 거죠. 그죠? 그건 소경이라니깐요.
그러니까 못 알아본 거예요. 예수님만 알아보죠. ‘요놈은 마귀다!’ 그런데 제자들은 몰라요. 누구를 가리켜 이야기하는지, 끝까지 몰라요. 오죽하면, 마지막 최후의 만찬 때, 요한이 물어보잖아요? ‘누구예요?’ 못 알아먹는 거죠. 야고보서 2장 1절 보세요.
(야고보서 2:1-4)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다, 그래요? ‘저런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무슨 그리스도야? 무슨 메시아야?’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를 바라봤기 때문에, 육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기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이죠.
왜 열한 제자들이, 유다가 마귀의 편인지를 식별해내지 못했어요? 외모로만 그를 보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열심! 정직한 모습! 그런 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아야죠. 그러한 것으로만,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여러분은 영적 눈을 뜨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세상적 가치관에서 볼 때, 낮고 비천한 지경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워하시고 있으면 안 돼요. 여러분이 지금 병에 걸렸다고 해서, 여러분 부끄러워하시면 안 돼요. 내 사업이 쫄딱 망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시면, 안 돼요.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과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많이 갖고 있는 사람! 질투해서도 안 돼요. 우리는 영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이 합의해놓은, 세상의 힘! 행복이라는 것! 가치라는 거! 그것을 여러분이 판단의 잣대로 쓰시면 안 된다 말입니다. 여러분이 영적 눈을 가지셨으면, 그 사람의 겉모습을 뚫고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그분의 고귀한 영혼을 봐야죠. 그렇잖아요?
우리 그 중국에 매년 선교를 가는데, 가면서 제가 가장, 우리 청년들에게 경계하는 것이, 겉모습을 보고, 그들이 못 살고,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고, 마치 나는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나누어주러 온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이렇게 풍요한 나라, 미국에서 살고 있고, 그들은 하나님이 조금 덜 사랑해서, 그런 나라에서 그렇게 못살고 못 먹고 못 입고, 편의시설 못 누리고, 그런 거 아니에요. 어찌 보면, 이 풍요의 땅!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더 불쌍한 사람들일지 몰라요. 여기는, 너무 재미있는 게 많고, 너무 자유로워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시간이 없어요. 너무 재미있는 게 많아서! 우리는 영의 눈으로 바라봐야 돼요. ‘아!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러 왔다!’ 자기들이 더 불쌍하면서, 그런 외모로 바라보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게 잘 안 될 때,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거예요. 육신의 눈을 감아버리는 거예요. 성도가 기도하는 대로, 장님이 되게 해주소서! 육신의 눈을 감아버리면, 영의 눈을 뜰 수가 있어요.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돼요. 육신의 눈을 감으라는 건, 눈알을 뽑으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그 눈을 감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보세요.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표준 새 번역)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보십시오! 새것들이여!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 것들은,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 되는 거예요. 새것들이여! 보십시오. 육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세상이 조작해놓은 그러한 세계관과, 그에 따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셔야 돼요. 그래야 진짜 복이 무엇이고, 진짜 행복이 무엇이며,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식별하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분명 그렇게 변해가고야 말거예요.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내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라고 이야기하고, 금방 ‘하나님 나도 우의정시켜주세요. 나도 좌의정 시켜주세요.’ 물고기 막 세고 있어. 이 예수님이 찾아왔는데, 물고기 막 세고 있어! 그 앞에서! 내 배를 채워주는 세상의 힘! 막 세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엔 좇아가셔서, 수제자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야곱은 계속 사기치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슴을 치며, 끝까지 좇아가셔서, 이스라엘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 열심이 여러분을 좇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우리의 소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확실한 소망 따라, 우리의 손발을, 움직이자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확실히 본 사람은, 그 소망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광극성! 아시죠? 나방이 빛을 받으면, 근육이 수축해서, 저절로 빛 쪽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닥불을 피워놓으면, 나방들이 투신자살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 걔네들이 괜히, 바보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광극성! 본능인 거예요.
마찬가지로 성도는, 이제 에이블 낫 투 씬(able not to sin),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끄심이 그를 쫓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로 움직여야 돼요. 발버둥 치겠죠. 나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발버둥 쳐요. 안 가려고!
그러나 하나님의 고집이 세요? 우리의 고집이 세요? 하나님의 고집이 더 세요. 그래서 안전한 것입니다. 그걸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쫓아오는데, 우리가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어디로 도망가시겠어요? 과학문명의 편안함, 그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종교 같은 그런 선행체계(善行體系)들로 돌아가실 거예요? 아니면 민주주의! 공산주의! 이런 이데올로기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옛 사람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부어라 마셔라 밤새도록 했던 그 옛 사람! 저처럼 되는 거예요. 그러면요! 그 해독제 먹고 막 그래야 되는데, 돌아갈 데가 없어요. 그죠?
어디로 돌아갈 거예요? 영생의 말씀이 내게 계시매, 나는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꼭 붙들고 좇아가야 돼요. 돌아갈 데가 없어요. 아무리 뒤돌아봐도 돌아갈 데가 없어요. 그 고백을 하셔야 돼요.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 고백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 고백을, 여러분의 입에서 끌어내실 것입니다. 그 복음! 그 복음에 감격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출처] 김성수목사 강해설교 요한복음(029) –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6:60~71)|작성자 클래식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