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를 때를 대비해서 값을 정하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 서원하였으면

효자제일교회 강도사:홍 순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 너의 정한 값은 이십세로 육십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세로 이십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개월로 오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찌니라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생축이면 그 생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우열간에 정가할찌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대로 될 것이며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라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정가할찌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대로 될 것이며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두락수대로 정가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찌며 [개역, 레위기 27:1~16]

서원했으면 지켜야지

오늘 말씀 제목이 ‘여호와께 서원하였으면…’ 입니다.
여호와께 서원하였으면 지켜야지 더 이상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서원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우리 생각에 여호와께 서원하였으면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이라고 시작합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 자원해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랬으면 반드시 지켜야지요.
그런데 ‘서원하였으면 값을 정하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집이든 토지든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으면 값을 정하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서원했으면 그냥 드리면 되지 값은 왜 정합니까?
2절에서 8절까지 사람의 값에 대해서 말하고, 12절 14절 16절에는 밭의 가격에 대한 얘기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2절 중간쯤에 보면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하는 이 말은 그 뒤에 반복은 되지 않지만 9절에 보면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이라는 말에 뒤이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말을 2절과 같은 표현, ‘생축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생축이면’ 이 말은 ‘부정한 생축을 여호와께 서원물로 드리려면’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또 14절은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도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값을 정가하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데 값을 왜 정하라 할까요?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하라’는 표현도 자주 나옵니다.
두 가지를 연관지어 보세요.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값을 정하라 하시면서 동시에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하라고 합니다.

사람의 값을 왜 정합니까?
무를 때를 대비해서 값을 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서원하였으면 드려야 한다’라는 말씀이 아니고
서원하였더라도 무르려고 하거든 무를 수 있는데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어찌 무를 수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서원하였으면 지키고 드려야지 왜 무르는 방법을 이야기 하실까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답지 않은 말씀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셨으면 그것으로 끝나야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한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무를 경우를 가정하시고 그 값을 미리 정하라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일수불퇴, 낙장불입

장기 둘 때 가끔 쓰는 말 중에 ‘일수불퇴’가 있습니다.
한번 손대면 절대 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장기판에서 장기를 놓았다 들었다 하면 사람이 가벼워 보입니다.
그래서 조금 짓궂은 경우에는 무르지 못하게 내 말을 먼저 들지 않고 잡을 상대편 말을 먼저 집어내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장기판에서도 무르는 것이 사람답지 않은 일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낙장불입’ 아시나요?
화투를 칠 때 손에 들었던 패를 한번 빼서 떨어뜨리면 절대 다시 주워들지 못합니다.
실수로 잘못 내었다 하더라도, 다 뒤집어 쓰는 경우가 있더라도 취소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장기나 놀이를 할 때에도 한번 한 일에 대해서 물리지 못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평소에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도 장기판이나 놀이에서는 물리지 못합니다.
사람의 법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을 어떻게 하나님 스스로 물리는 것을 인정하시느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너무 유약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느냐 싶어요.

어쨌거나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던 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무를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무를 때를 대비해서 값을 미리 정해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장을 아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만 본다면 너희들이야 죽든지 말든지 이렇게 하라는 것으로 끝내버리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우상이나 사람이 만든 신은 이렇게 인간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한 번 내야 한다면 내야 하는 것이지 무르거나 형편에 따라서 깎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 착한 심청이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요구한 것은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깎아주든지 해야지 에누리 없이, 몸을 팔아서라도 다 갚아야 한다? 특히 부패한 고위공직자들이 아랫사람들 돈을 긁어낼 때 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인질범들이 아이를 인질로 잡고 돈 달라 할 때 사정 봐가면서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형편을 굉장히 많이 고려하고 계십니다.

사람도 무르라

본문을 읽어보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여러가지 나옵니다.
사람, 생축, 부정한 생축, 집, 밭이 나옵니다.
이 중에 무를 수 있는 것은 부정한 생축, 집, 밭 이 세 가지입니다.
사람과 생축은 무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한 번 살펴보십시다.

우선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신제사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마치 어린 사무엘을 어머니 한나가 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성전에 바치고 키웠던 것처럼
성전에 드려서 혹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도록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드리기로 서원했는데 ‘왜 사람은 무르려거든 오분지 일을 더할지니라’는 말이 없느냐 말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어도 드릴 수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경쟁이 너무 심한 경우가 그렇습니다.
성전에서 일할 사람은 한정돼 있는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다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몰려들면 어떻게 할까요? 또 성전에서 하는 봉사는 레위인들이 했기에 흔히 하는 말로 자리가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하나님 나는 바치려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못 드리겠습니다’ 하면 없어지는 것이 될까요?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에 사람 대신에 정가한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무른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되죠.

3절에 ‘성소의 세겔’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세겔과 성소에서 쓰는 세겔의 용량이 다릅니다. 성소의 세겔은 일반 세겔보다 오분의 일이 더 무겁습니다. 사람의 값을 정할 때 일반 세겔이 아닌 성소의 세겔로 오십 세겔이라는 것은 이 사람의 정가한 값, 즉 일반 세겔에 오분의 일을 이미 더 붙인 것입니다. 이미 거기에 무르는 값 오분의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무르려거든’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성소의 세겔로’라는 표현에 사람을 무른다는 의미가 이미 들어 있습니다.

사람을 물려야 할 형편인데 값을 아주 비싸게 매겨 놓으면 가난한 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 세겔이 어느 정도 되는지 이리저리 계산을 해보니 제 기분으로는 하나님께서 절묘한 몸값을 요구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비싸면 안되겠지요? 그렇다고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던 사람을 무르는데 너무 헐값이라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무르기로 하고 추가된 한 오분의 일을 제하고 나면 몸값이 일반 세겔로 오십 세겔이 됩니다. 종의 몸값이 은 삼십 세겔이라 합니다. 내가 나를 또는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면 그 값이 종보다 못하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금액이 오십 세겔로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50세겔을 환산하면 백 데나리온 정도 됩니다. 1데나리온이 하루 임금이었다고 하니 보통 노동자가 넉 달을 꼬박 일해서 번 돈이면 오십 세겔이 될 것 같아요. 넉 달 동안 꼬박 돈을 모으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내 몸값 정도가 된다니 계산을 해 보세요. 못 드릴 만큼 막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모르긴 몰라도 공양미 삼 백석을 모으기 위해 심청이가 일을 해서 모으려면 몇 년이 걸릴런지 모르겠지만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무르려고 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거액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종하나보다 못한 값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무르려 할 때에 사람의 형편을 잘 감안하셔서 정해준 값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요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장을 아주 세밀하게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물려주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8절에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여 준 이 몸값이 적은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거든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찌니라’고 합니다. 가난하여 몸값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제사장이 형편을 고려해서 값을 다시 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주 세밀하게 배려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가난한 자가 있으면 또 값을 고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배려하시는 것입니다.

깎아 주고, 물려주더라도

바꾸어 생각하면 가난한 사람의 값을 그렇게 깎아 주면서까지 그것을 꼭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형편이 안되면 깎아줄 테니 반드시 내라는 것입니다.
엎드려 절 받기라는 말이 있죠.
절은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적은 예물을 들고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바치기를 서원했지만 도저히 형편이 안되면 이렇게라도 갚을 것은 갚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누구든지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무를 수 없는 것이 두 개였는데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결국은 사람도 무를 수 있는 셈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생축입니다. 레위기 앞 부분에 보면 생축을 하나님께 가령 번제로 드리거나 제물로 드리는 사람은 원래 송아지를 드려야 하는 사람인데 형편이 어려우면 양이나 염소로 낮춰서 드릴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도 도저히 형편이 안되면 비둘기로 드려도 됩니다. 생축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할 때 이미 자기 형편을 다 고려해서 서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굳이 무르려거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본문에 나와 있는 다섯 가지 항목들은 전부 하나님께 무를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번 서원했으면 그대로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부정한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면
제사로나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정가해야 합니다.
사람이든 생축이든, 또 밭이나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더라도 하나님께서 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단, 오분의 일을 더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어떤 신, 어떤 힘 있는 자가
자기 밑에 있는 약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형편을 고려하고 배려하면서 사랑을 베푸는지 생각해 보세요.
사람 사이에도 참 드문 일입니다.
천지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며 우리를 배려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또 그 분을 우리의 아버지라 믿는 우리라면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성품을 우리가 닮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를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무르는 것을 허용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함부로 하거나 경솔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서원을 했더라도 형편이 안되면 하나님께서 물려 주시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의 형편을 고려해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호의를 우리가 악용하거나 오용하는 경우가 됩니다. 약이라도 오용하거나 남용하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어떤 분이 속이 안 좋은데 뽕나무 줄기를 삶아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말에 진하게 달여서 먹었더니 그 날부터 속이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병원에 갔다가 의사한테 혼이 났답니다.

약의 오남용도 굉장히 위험한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호의를 악용하거나 남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해서 베푸신 것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9절을 보면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바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으면 그 생축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소나 송아지가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 것이니 함부로 다루거나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꼭 물려야 되겠거든 오분의 일을 내는 것으로 여유를 두신 것이지요.

오분의 일이라는 것이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기차표를 생각해 봅시다. 기차표를 출발하기 전에 무르려 할 때 2할을 내라 한다면 땀이 좀 날 것입니다. 세금을 내야 하는데 기한이 넘어서 만약 20% 더 내라고 한다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오분의 일은 작은 분량이 아니라고 봅니다.

10절 뒤편에 보면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려 했다가 이것 말고 다른 것으로 드리려 할 때 둘 다 거룩하다는 말은 둘 다 내 마음대로 못하고 둘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은 둘 다 드려야 한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로 했으면 함부로 무를 생각하지 말고 함부로 무르려면 돈을 더 내야 하고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해도 둘 다 드려야 되는 상황이니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처음부터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심해서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도서 5장 5절에 보면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서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서원을 할 때 신중하게 하고 일단 서원했으면 반드시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도 한번 약속했으면 참 신중해야 하는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우리가 함부로 무르려 한다는 것은 곤란하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물려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안되는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소신 바꾸기: 쉽지 않은 일

하나님은 왜 백성들이 물려달라고 하면 그 때 가서 못 이긴 척하고 물려주시면 될 일이지 백성들이 말을 하기도 전에 왜 자진해서 무르는 방법을 이야기 하고 계실까요? 하나님께서 무르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셔서일까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만 이렇게 무르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고파는 것도 세월이 지나고 때가 되면 전부 원래대로 돌아가도록 해 놓았습니다. 땅을 팔아도 희년이 되면 원래 주인에게 다 돌아갑니다. 노예가 되어서 팔려서도 육년을 봉사하면 풀려나야 합니다. 안식년이 되면 원래대로 다 돌아가야 합니다. 무르는 것과 마찬가지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르는 것을 좋아하셔서 그렇게 하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무르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꼭 사람에게만 하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무르는 일을 계속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랬다 저랬다 하거나 변덕이 심한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원칙이 분명하신 분입니다. 원칙대로 행하시고 한 번 말하면 그대로 행하시는 그 분이 우리 때문에 말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원칙이 분명한 사람이 생각을 바꾸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분명한 주관을 가진 사람이 자기 생각을 바꾸거나 소신을 굽히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말씀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힘들게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 대통령이 후보 시절과 비교하면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이 있는 것 같아요. 후보 시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니 지금 왜 그러시냐고 따진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생각이 바뀌고 말이 바뀌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 그 자리에서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뀔 것입니다. 그런다고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고 따지고 묻는다면 아마도 “자네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하지 않을까요?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면 그 전에 하던 말과 다른 말을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당사자는 참으로 힘든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일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고 하셨습니다. 따 먹었으면 죽어야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저렇게 해서 결국은 죽지 않을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결국은 사람을, 훗날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려 놓으실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처음에 하셨던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무르셨습니다. 하나님께도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끔찍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배려하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이상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배려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제일 먼저 배려해야 할 사람이 아내요, 남편이 되길 바랍니다. 이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밖에 나가면 참 호인입니다. 집에만 들어오면 사사건건 화를 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려해야 할 대상이 우리의 가족,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그 다음이 믿는 형제 아닐까요? 한 교회에서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우리 성도들 사이에도 그런 배려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믿는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웬만한 허물을 좀 덮어줄 수 없을까요?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생각하면서 믿는 형제를 더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합시다.

그 다음이 주변의 믿지 않는 이웃들입니다. 요즈음은 어릴 때부터 자기 생각만 하고 자란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참 드뭅니다. 제일 표가 많이 나는 것이 자동차 같아요. 그런 일이 잘 없습니다만 교회 마당에 들어오면서 경적을 울리는 일은 절대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이가 튀어나온다고요? 천천히 가셔야지요. 아이들은 항상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는 법입니다. 탓할 것 하나도 못 됩니다. 빨리 가려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가끔 차 한대를 잘못 대서 좌우로 쭉 밀리는 것을 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면 내가 뭔데 그 정도 배려를 못하겠느냐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를 가진 사람과 그 차를 얻어 타야 하는 사람 중에 누가 누구를 더 배려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양쪽 다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차를 가진 사람이 조금 더 배려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요. 새벽기도를 같이 다니고 있는데 어느 추운 날 기다리고 섰는데 차가 오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늦잠을 자나보다 아니면 차가 사고가 났나보다’ 걱정을 하는 것이 옳을텐데, 제가 들은 말은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좀 해주지’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말입니다.

그 전날 연락을 해 줄 수 있는데 안 했다면 잘못이 있지만 새벽에 빠지는 경우는 대부분 본의 아니게 연락을 못 하고 못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락할 수 있는 형편이면 차가 오지요. 그런 형편을 알만한데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해주지’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차를 몰고 갔는데 나와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없네? 또는 못 나온다고 연락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지’ 하신다면 그것 역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말입니다. 새벽기도 가던 사람이 못 일어난 것은 굉장한 사고입니다. 4시 반에 깨야 올 수 있는데 깨어보니 5시 반이라면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날 기다리던 분이 얼마나 힘이 들고 걱정을 했을까 싶어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못 오면 연락이라도 하지’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서로를 배려하는 여유와 신뢰가 쌓여 있지 않으면 새벽에 차 태워준다고 하지 마세요. 틀림없이 시험 듭니다. 나와야 할 시간에 나오지 않는다면 못 나올 형편이 있는가보다 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 마음 없다면 ‘태우러 간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놀란 이야기는 새벽에 나를 태워야 할 차보다 예정에 없던 다른 차가 먼저 왔는데 그것을 타고 갔어요. 원래 태우고 가기로 했던 차는 한참을 기다리다 ‘못 오나보다’ 하고 교회에 와보니 앞에 앉아 열심히 기도하고 있더랍니다. 은혜가 될까요? 지나가는 교인 차가 있어서 반갑다고 탄 것까지는 좋은 일인지 몰라도 뒤에 와서 나를 기다릴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남의 차를 타면 안됩니다.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큰 시험이 듭니다. 교인들 간에도 늘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예로 드린 말씀입니다.

결혼하기 전 처녀총각끼리 식사할 때 나는 반도 안 먹었는데 혼자 밥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고 기다리는 사람 있습니다. 일찌감치 생각을 잘 해보셔야 합니다. 같이 밥을 먹을 때는 속도를 맞춰 주어야지요. 연애할 때만이라도 속도를 맞춰야지요. 그 때도 못 맞추는 사람이 결혼하고 나면 어떻겠어요? 힘들어서 걸음을 잘 못 걷거나 걸음이 불편한 분이 앞에 가고 있으면 쌩하고 지나가지 마세요. 적어도 미안한 표정이라도 짓거나 정 빨리 가야 한다면 지나고 나선 빨리 가더라도 그 옆에서는 속도를 조금만이라도 늦추는 배려도 필요합니다. 남을 도울 때 주의해야 할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기보다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도움 받는 사람의 입장을 잘 배려해 가면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이렇게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누구를 도울 때라도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에겐 못 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인물이 조금 괜찮습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인물이 조금 잘난 사람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배려라는 말입니다. 매사에 나보다 못한 사람을 배려하는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배려

이웃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배려는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르는 방법을 가르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선언하셨던 그 말씀을 하나님 스스로가 무르셨습니다. 정녕 죽어야 했던 인간을 독생자를 주시면서까지 살려 놓은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배려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배려해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라면 우리가 가장 배려하고 신경써야 할 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성도들이 장례를 치른다고 새벽 일찍 갔습니다. 누군지 모르고 오신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경조부장이 새벽같이 전화를 하니 툴툴거리며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새벽같이 성도들이 힘을 합쳐 찾아가는 것이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얼마나 유익한 효과가 있었는지 오늘 낮에 보셨지 않습니까? 온 교회가 벌 떼같이 일어나서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떼거지처럼 갑시다. 이런 영혼에 대한 배려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오신 분 중에는 몇 년을 이리저리 권면하고 불러도 꼼짝도 안 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그 영혼을 배려하는 것, 하나님께서 체면에 어울리지 않게 자꾸 물려주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잘 해주거나 칭찬 듣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넘어서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배려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 말씀을 스스로 무르셨습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스스로 혹독한 값을 치르시면서까지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무르셨습니다. 자기 외아들을 희생시키셔서 이 아들을 믿기만 하면 죄의 유무를 묻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쉬운 방법으로, 정녕 죽으리라 했던 그 말씀을 물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기뻐하시고 물려가면서까지 자기 백성 삼으시길 원하셨지만 끝내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이미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또 이런 배려를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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